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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쫑알쫑알 수다방

평양이 담고 있는 역사 이야기

 

 

 동양에서 제왕학의 교본으로 널리 활용되었던 《정관정요貞觀政要》에는 "역사를 아는 자는 무너지는 답장 아래 서지 아니한다. " 가르침이 있습니다. 역사를 모르면 실패하지만 역사를 알고 생각할 줄 아는 자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배우고, 현재를 통해 과거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현실에 처해 있는 한반도의 현실, 저는 문득 한 가지의 생각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분단의 현실과 통일 후의 미래에 모습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과 논의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대해서는 얼마나 생각해보았을까요? 그리고 과거 속에서 우리가 새로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던 것일까요?

 

저는, 정면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통일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지나온 곳을 바라보는 여유로움으로 북한 지역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 역시도 통일을 준비하는 하나의 큰 족적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요?

 

 

1. 북한의 수도, 서북지역 제 1의 도시 평양.

 

여러분들은 평양을 떠올릴 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혹시, 평양을 단순히 북한 김정일 정권의 온상, 군인과 탱크가 시도 때도 없이 시내를 행진하는 군사도시와 같은 이미지로만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요? 하지만 제가 지금부터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현재의 평양과는 다른,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평양의 이야기입니다.

 

1) 기마민족의 수도, 평양.

 

서기 427년, 4세기 후반부터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에 큰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백제와 신라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동북지역의 최강국으로 군림하였던 고구려가 북쪽의 국내성에서 남쪽의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긴 까닭이었습니다. 이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고구려가 백제와 “우리 한번 붙어보자.”고 선언한 셈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지요.

대성산 기슭에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축조하여 천도 작업을 완성시키고 북방민족과의 우호관계를 다져놓은 장수왕은 본격적으로 남진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불안’에 그쳤던 백제와 신라의 우려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지요. 남쪽을 향해 거칠 것 없이 진격한 장수왕의 군대는 최고의 전략 요충지였던 한강유역을 점령하며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는 전과를 비롯하여 지금의 충주지역까지 진출하여 비석을 세우는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중원 고구려비).

평양으로의 천도를 계기로 그 위세를 떨쳤던 고구려는 연이은 전쟁으로 6세기부터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평원왕은 586년 기존의 도성을 포기하고 ‘장안성’이라는 거대한 도성을 축조하고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새로이 축조된 장안성이 지금의 평양시를 둘러싸고 있는 ‘평양성’인데요, 이곳은 668년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뒤 고구려의 보장왕이 당나라 장군 이세적에게 항복하며 무릎을 꿇었다는 가슴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2) 조선 역사상 1천 년래 제 1대 사건.

 

강직한 독립운동가이자, 식민사관에 대항한 민족주의 역사가로 활동하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려시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 역사상 1천 년래 제 1대 사건이라고 평가하며 묘청의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정신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고 합니다.

묘청이 천도를 주장했었던 서경은 바로 평양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입니다. 고려의 수도는 개성(개경)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서쪽의 위치한 또 다른 수도라는 의미에서 서경이라고 불리웠던 것이지요. 고려의 태조 왕건이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유훈 《훈요십조訓要十條》의 제 5조에도 서경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왕들이 3년에 한 번은 꼭 서경으로 가서 100일 이상을 지내고 돌아올 것을 강조하였다고 합니다.

고려 인종대에는 무신들의 반란과 북방 금나라의 등장이 함께 맞물려 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중앙 정계에 묘청이라는 승려가 혜성처럼 등장하게 되는데, 차츰 인종의 신임을 얻게 된 묘청은 풍수도참설을 근거로 개경을 떠나 서경으로 도움을 옮기자는 서경천도운동을 적극 주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칭제건원과 금국정벌과 같은 주장은 김부식 등을 필두로 한 개성파들의 반발을 사게 되고, 결국 궁지에 몰린 묘청 일파는 반란이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들의 의지를 표출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개경에 남은 동지들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거사를 일으킨 묘청의 반란은 결국 김부식이 이끈 관군에 의하여 완전히 진압되었고, 서경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역적의 땅으로 낙인찍히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3)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더라.

 

조선시대 속담 중에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평안감사가 도대체 어떤 벼슬이었길래 속담에도 등장하는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일까요?

조선의 8도道 중 평안도의 감영(오늘날의 도청 개념)이 평양에 위치하였는데, 서북지역의 중심지였던 평양은 여전히 정치·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었으며 중국과 인접해있는 지리적 특성상 교역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이 상당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부차적으로 평양에 미인이 많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관직에 오른 사람들은 누구든지 평안감사자리에 군침을 흘렸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16세기에 발발한 임진왜란 중에는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떠나자 긴급히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평양과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분조(제 2의 조정)를 구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이 같은 활동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큰 원동력의 하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평양에는 삼국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역사의 질곡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전성기과 멸망을 함께하기도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제 2의 수도라고 불리우다가 순식간에 역적의 땅으로 멸시받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왜란과 호란(정묘·병자)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비록 떨어져 다가갈 수 없는 평양, 통일 후에 맞이할 평양의 모습은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 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동북아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게 될 것인지. 그 갈림길의 결과는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달려있는 역사적 사명이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