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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영나영 제주탐사] 제주 4.3사건 이야기



 이번 기사에서는 너무나도 슬프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 제주 4.3 사건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 4.3추념식에 참석한 한 유족의 모습.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사건의 발단>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략적 기지였습니다. 이후 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일본군은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있던 제주민들이 귀환하며 급격한 사회적 변동에 따른 혼란을 겪습니다. 귀한한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 하였고, 도민들은 식량 부족에 시달렸으며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은 미군정에 의해 다시 등용되어 부정을 저지르는등 민심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도내 불만과 갈등은 이후 일어난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

그러던 1947년 좌파진영인 제주 민전이 주최한 3·1절 기념 집회에 구경을 하던 어린 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치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일부 군중이 이에 돌멩이를 던졌고 이를 경찰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남로당(남조선 노동당) 제주도위원회는 바로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민·관 총파업에 돌입합니다. 이에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경찰에 대한 반감과 이런 감정을 부추기는 남로당에 의하여 3·10 총파업이 발생했다고 분석했으나 경찰의 과오를 파악해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좌익세력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전개하였습니다.



<전개과정>

당시 미군정청의 경무부장 조병옥은 3·1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합니다. 제주 총파업 사태는 경찰의 대량 검거가 지속되어 1948년 4·3 발발 직전까지 약 2500명이 구금되었습니다. 그동안 지역 주민과 경찰간의 크고 작은 충돌도 계속되었습니다.

1947년 11월 유엔은 한반도의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안을 총회에서 통과시켰지만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대두되기에 이릅니다. 이에 좌·우를 막론하고 남북 분단을 우려하는 가운데 남로당은 단독선거 저지를 위해 1948년 이른바 2·7 구국투쟁을 전개하였고 제주에서도 여러 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후 제주 남로당 임원회의에서 강경파와 온건파의 논쟁 끝에 무장투쟁이 결정되고 결국 1948년 4월 3일 새벽 350명의 무장대가 경찰서와 우익단체 거주지를 습격했습니다. 이에 미군정은 전남 경찰을 급파하고 함정을 동원 해안을 봉쇄합니다,

그러나 근본적 대책 없이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힘으로 진압하고자 하는 방침은 도민들의 반발로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킵니다. 사태 해결에 한계를 느낀 미군정은 무장대와의 교섭을 지시했고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의 합의등으로 사태가 무마되려고 했으나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 으로 인해 협상은 파기 됩니다, 방화사건 직후 현장조사를 통해 김익렬 중령은 우익청년들의 방화사건임을 밝혔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하여 총공격을 명령합니다.

그러던 와중 남한에서 실시한 5·10총선거에서 제주도는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고 6월 재선거도 무산된 상황에서 같은해 8월 15일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고 9월에는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섭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해안으로 주민들을 강제 이주 시킨뒤 11월 제주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강경진압에 나섭니다. 4개월간 진행된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마을(200m~600m)의 95% 이상이 불타고 우익단체들의 학살을 피하기 위해 산으로 숨어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등의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이때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며 지금도 그 피해흔적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실시,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합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지고,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사실상 사태는 마무리 됩니다.

<경과>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주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또다시 희생 되고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는 비운을 겪습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을위한특별법'이 제정되고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하였습니다. 위원회는 진상 조사 결과 제주 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를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 무장대가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 전면 개방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 정의하였습니다.


제주 4.3위령제 추도사를 낭독하는 노무현 대통령 http://blog.naver.com/jejuhsk/90002999775

 

희생자 신고 접수 결과 1만 4028명으로 집계되었지만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며, 군인 경찰 전사자는 320여 명 정도로 파악됩니다. 마침내 2003년 진상조사 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또한 제주 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으로 2008년에는 제주시 봉개동에 4·3평화공원이 개관하였습니다.

 

섯알 오름 학살터 추모비에 놓인 고무신

 

제주도에 내려가 직접 취재를 해보며 가장 놀랐던 것은, 저희가 굳이 제주 4·3평화공원, 섯알 오름 학살터 등 4·3관련 유적지를 가지 않더라도 이동 중 제주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그 흔적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제주 전역에서 많은 희생과 피해가 있었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고, 세기가 바뀐 지금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갈등의 역사가 하루빨리 마무리 되기를 희망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주 4·3 사건 [濟州四三事件]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