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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우리는대학생기자단

[느영나영 제주탐사] 4.3평화공원 평화기념관



[느영나영 제주탐사] 2017년 3월 12일,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이 제주도의 4.3평화공원을 찾았습니다. 이념과 사상, 의심과 분노로 벌어졌던 폭력적이고 참혹했던 당시의 상황처럼 날은 우중충하고 흐렸습니다. 참혹했던 제주 4.3사건을 생각하며, 평화와 통일이 얼마나 필요한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4.3평화공원 현장스케치] [4.3평화공원 평화기념관] [관음사와 4.3사건]


▲제주4.3평화기념관 전경


▲평화기념관 초입 '역사의 동굴'. 동굴처럼 표현해놓은 입구는 끝날 듯 끝나지 않도록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긴 동굴을 걸으면, 당시 죽음을 피해 숨어들던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 중간중간 깨진 항아리 등의 조형물이 분위기를 더해줍니다.


▲역사의 동굴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백비(白碑; Unnamedd Monument).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는 문장이 와닿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총칼에 찔려 죽어갔는데, 이름조차 제대로 붙여지지 못한 역사, 이름조차 분단된 현실이야말로 분단의 가장 큰 아픔입니다. 언제쯤 하나의 이름으로 역사를 기억할 수 있을까요? 통일이 되는 그날, 이 백비에 실제로 4.3사건의 이름이 쓰여질 수 있을까요?


▲4.3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의 사진들. 녹슬어서 멈춰버린 시계가, 마치 지금 상황을 은유하는 것 같습니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독립운동이 강렬하게 진행되던 지역이었습니다.


▲해방 후 일장기가 내려가는 모습. 해방은 한반도 모든 민중들에게 기쁨이었지만 순식간에 분단의 아픔으로 덮여져버렸듯, 제주도민들에게도 해방의 기쁨은 학살의 고통으로 지워져버렸습니다.


▲해방공간(1945.8.15~1948.8.15)에 대해 설명하는 경남대 심지연 교수


▲4.3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3월 1일에 있었던 발포사건입니다.


▲제주도 대정면의 농민위원장이자 남로당 책임자였던 이운방의 회고록


▲좌익세력으로 색출되는 당시 제주도민들의 상황을 표현한 작품


▲당시에 좌익세력으로 몰려 붙잡힌 시민들로 감옥은 항상 꽉차있었습니다


▲무장봉기가 확대되기 전, 평화협상을 체결했던 무장대 총책 김달삼(왼쪽)과 진압군 사령관 김익렬 중령(오른쪽). 김달삼은 중등학교 교사 출신이고, 김익렬은 일본군 소위 출신입니다.


▲평화협상은 극우 청년들이 저지른 마을 방화사건으로 인해 깨집니다.


▲미군은 오라리 방화사건이 터지자 이를 지상과 상공에서 촬영하였고, 각종 필름을 붙여 '제주도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라는 무성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무장대가 오라리 방화사건을 저지른 것처럼 왜곡 묘사하고 있습니다.


▲안내사의 설명을 들으며 영상을 관람하는 관람객들. 영상은 당시 제주도민들이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던 방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캡쳐된 화면은, 사람들이 동굴 속에 가둬진 후 불로 태워지는 모습입니다.


▲제주 4.3사건을 조사한 미국의 한 교수는, "이념이 다르더라도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끔찍한 초토화작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제주도 중산간의 모든 마을이 표적이 되었고,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죄가 있든 없든, 단지 중산간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습니다.


▲'다랑쉬굴 사건' 현장을 재현해놓은 모습입니다. 1948년 12월 18일, 무장대를 추적하던 군인들은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동굴을 발견합니다. 무장대 세력이라고 판단한 군은 동굴 밖에 있는 사람들을 사살한 뒤,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장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합니다. 군대는 수류탄을 던지며 사람들을 위협했지만 끝내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질러 동굴 안의 사람들을 질식사시켰습니다. 희생자는 11명으로, 9살난 어린이도 있었습니다.


▲전시관 끝에는 4.3사건의 참혹함에 슬퍼하고, 언젠가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길 기원하는 포스트잇들이 붙어있습니다. 4.3사건은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 가장 큰 분단의 고통입니다. 4.3사건은 분단의 폭력성을 가장 확연히 드러내는 사건이자, 위에 써있는 문구대로, 평화와 통일, 인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상징입니다. 언젠가 통일이 된 미래에, 4.3사건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추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