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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북한에 잠들어 있는 독립운동가분들을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8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양주호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광복절을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태극기를 게양하고 어떻게 광복절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이번 기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북한에 잠들어 있는 항일 투쟁 독립운동가들이. 사실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흘린 고귀한 피와 땀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 광복절을 맞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이들의 희생을 추모해야 하지만, 남한에서 사망한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북한에서 사망한 이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북한에 잠들어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2~300억의 현상금을 가진 일제에겐 공포의 대상 - 약산 김원봉 

 


 

"총 23회에 걸친 의혈투쟁을 펼친 김원봉 의사는 일제 치하 당시 단연 최고 높은 현상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만큼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투사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최근 핫한 영화 암살을 보셨나요? 이 영화에서 김원봉 역을 맡은 조승우가 감명 깊은 연기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김원봉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요. 사실 약산 김원봉 선생은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극의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김원봉이라는 이름만 알고, 이 분이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김원봉 선생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논할 때 빼놓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191912, 의열단을 조직하여 직접적인 무력항일투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의열단으로 인해 일제 시기 경찰서가 폭파당하고 일제 주요 인사들이 지속적으로 암살위협을 받자, 일본은 의열단에 대한 경계와 함께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사건을 꼽을 수 있죠.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중국과의 연계를 통해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하고자 노력하였답니다. 또한 국내외 여러 단체들이 많이 분할되어 있어 조직적인 투쟁이 힘들어지자, 혁명세력의 결집을 위해 의열단, 한국독립당 등 여러 단체를 규합하여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합니다. 그리고 1938년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그 유명한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직접 일제와 맞서 싸우기도 하였죠.

 하지만 그의 사상은 공산주의도 중요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합작을 통하여 일제와의 본격적인 투쟁을 위한 연합전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노선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중국으로부터 소시민적 기회주의자이며 개인영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또한 조선의용대 자체가 직접적인 전쟁보다는 주로 후방에서 교란과 선동, 통역 등의 역할을 수행하다보니, 직접적인 투쟁을 원하는 이들과의 충돌로 인해 많은 인물들이 새롭게 만들어진 조선의용군으로 흡수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죠.

 이후 그는 임시정부로 돌아와 한국광복군의 부사령관을 역임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맞았으나, 그에겐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가 공산주의라는 이유로 일제의 편에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하기로 유명했던 노덕술이라는 인물에게 뺨을 맞으면서 빨갱이 두목이라는 치욕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크나큰 충격을 받은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벌이고 좌익세력을 대변하는 대표적 인물이던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하자 월북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이던 북한에서도 그는 안녕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당시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켜 적화통일을 이루려하자, 중립적 통일을 지향했던 그는 계속해서 이를 만류했기 때문이죠. 이러한 이유로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실각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행방이 묘연하여 언제 사망했는지에 대한 경위를 알 수 없어서 수많은 추측이 있지만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폐허로 남은 김원봉 의사의 생가>

 

 이렇게 북한에서도 외면을 받았지만 남한에서도 다른 독립운동가분들에 비하면 그 대우는 매우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위 사진은 김원봉 선생의 생가입니다. 하지만 그 터와 생가였음을 알려주는 표시만 있을 뿐, 전혀 관리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도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착잡한 기분만 드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

 

2. 한글 학자에서 조선의용대 간부까지 - 김두봉

 


 김두봉을 아는 분들은 이를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전에는 한글학자로서 그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기도 하답니다. 그 유명한 주시경 선생의 밑에서 한글을 연구한 후, 한글 강습회를 열어 국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하였죠.

 그리고 이 같은 계몽활동을 하다가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상하이로 이동하여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0년 후,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35년 김원봉이 창설한 민족혁명당에 들어가 조선의용대 간부로 지내게 되며 광복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독립투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해방 이후 평양에 돌아와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하고 중앙위원장이 되면서 비극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독립투쟁을 헌신적으로 벌여온 그였지만, 당시 김일성의 중화학공업 우선 경제발전 노선을 비판한 것을 계기로 8월 종파사건 당시 숙청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강제로 평안남도의 농장에 끌려가 노역에 시달리다가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죠.

 그의 행보는 어쩌면 김원봉과 비슷한 면이 보입니다. 항일 독립 투쟁을 하다가, 같이 조선의용대라는 조직에서 활약하기도 하였죠. 하지만 광복 이후 북한에서 정치활동을 하다가 김일성에 의해 공통적인 이유로 숙청당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사회주의 운동가였다는 이유, 북한에서 정치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라는 면에서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3.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독립투사로 - 벽초 홍명희

 

<일제 치하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소설 임꺽정>

이 인물은 여러분께서 많이 생소한 이름일 것 같습니다. 벽초 홍명희는 조선 후기 매우 유명한 소설인 임꺽정의 저자이자 독립운동가랍니다.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죠!

홍명희는 위의 두 인물처럼 적극적으로 항일독립투쟁을 벌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국가가 완전히 망한 사건인 '경술국치'이후 오산학교, 휘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습니다. 1920년대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도 지냈었죠. 그리고 1927년 민족 단일 조직인 신간회의 창립에 힘쓰고, 그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행동했죠. 하지만 신간회 제 1차 민중대회 사건의 주모자라는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이 인물이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일제 시기 최대의 장편소설로 꼽히는 임꺽정의 저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작품이 일제 치하 시절 현실의 모순을 그리는데 중점을 두지 않고, 오히려 사회주의적 관점으로 봉건주의의 체제 모순을 위주로 신랄하게 비판하였다는 점은 매우 아쉽습니다. 하지만 그 일제 식민지 시절 한민족의 정신을 나타내는 소설 자체가 극히 드물었을 뿐 아니라, 조선시대 전통적 사회상과 풍습을 잘 나타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는 광복 이후 좌익 운동에 가담하다가 곧바로 월북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수립하는데 큰 도움을 주면서 부수상 등 요직을 맡았습니다.

 

4. 내가 바란 조국은 분단된 국가가 아니다 - 몽양 여운형

 

 이 인물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한 분들이라면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바로 몽양 여운형 선생으로, 이 인물 또한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였지만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이라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서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같이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운형은 일제 치하 이전 1990년 대 우리의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은 민중 운동인 국채보상운동 당시 경기도 양평에 지회를 설립하면서 처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제 치하 이후에는 각종 민족 계몽운동에 힘쓴 인물이기도 하답니다. 또한 1919년 3.1운동에 관여하였고, 파리 강화회의 때는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파견보내는 등 외교적인 활동에도 그 능력을 여실히 보여주었죠.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차장으로 임명됩니다. 

 이후 여러 독립운동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도 병행하면서 중국의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기도 하는 등 자신의 정치 색채를 보다 뚜렷이 하죠. 사회주의 운동이 끝나고 다시 독립운동을 진행하던 도중,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잡혀 3 년간의 옥살이를 살기도 했습니다. 


<왼쪽이 원본사진이며 오른쪽이 일장기가 말소된 사진이다.>

 1933년에는 우리에게도 유명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도중 마라톤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당시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을 맡고 있던 여운형이 "손기정은 조선의 선수"라는 이유로 손기정 선수 사진의 일장기를 말소해버립니다. 이 사건에 대한 징계로 조선중앙일보사는 3년 간의 폐간조치에 취해졌으며, 또한 여운형은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건국 준비를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주도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합니다. 하지만 좌우 정치색에 따라 한반도가 분열될 조짐이 보이자,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을 위해 힘쓰게 됩니다. 이후로도 1947년까지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힘쓰지만, 같은 해 7월 19일 여운형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저격을 당하여 사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여운형 의사는 아니지만, 북한에 잠들어 있는 항일독립투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한 몸 희생하면서 그토록 바랐던 것은 오로지 하나, 온전한 조국의 광복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수 십 년 동안 분단된 채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죄송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분들이 아닐까요? 매해 독립 의사들이 쌓아온 업적을 기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분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바래온 그 소망을 하루 빨리 이루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기사를 보는 많은 분들이 독립운동가들에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통일에 대해 진정으로 염원하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상 기사를 마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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