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학생기자단/쫑알쫑알 수다방

서울의 환호와 평양의 좌절, 88서울올림픽의 기억속으로

 

  여러분 혹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알고 계시나요? 혹시 기억하고 계시나요?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리는 세계로 향하게 되었고, 눈부신 도약과 발전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올림픽 개최를 위해서 당시 우리 정부는 엄청난 노력을 하였으며, 북한과의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던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1. 서울올림픽 유치의 배경

 

                                                  ▲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서울올림픽 유치계획을 발표

  박정희정부 시절 1978년 9월 24일부터 10월 5일까지 12일 동안 서울 태릉 국제종합사격장에서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는 대한체육회가 국제올림픽대회에 가입한 후 처음으로 치루는 세계적 규모의 대회였습니다.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룬 후 우리 정부는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에 1988년도에 서울에서 올림픽을 유치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10ㆍ26사건과 오일 파동 사건으로 서울올림픽 유치 계획은 보류되고 말았습니다.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자 IOC는 '계속 유치 의사가 있다면 독일 바덴바덴의 IOC 총회장에 홍보관 장소 임대료를 납부하고 준비토록 하라'는 전문을 우리 정부에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정부는 88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전 국가 역량을 총결집하고 동원했습니다. 

  미소 간의 신(新)냉전 고조라는 국제환경, 강력한 후보지였던 일본 나고야와의 유치경쟁, 분단국으로서의 안보불안 문제 등 여러 제약요인에도 불구하고 전 국가적ㆍ국민적 노력으로 서울은 1981년 9월 30일 IOC총회에서 나고야를 52대 2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제24회 올림픽대회 개최지로 선정되었습니다. 

 

2. 서울올림픽 유치에 대한 북한의 반응

  갈등과 경쟁 상태였던 북한으로서는 서울에서 올림픽대회가 유치되는 사실이 반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1981년 12월 3일자 노동신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조선이 국제올림픽경기대회를 주최하는 만큼 <<유엔성원국>>으로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면서 <<유엔단독가입>>을 위한 외교활동을 적극 벌릴 것이라고 하였으며 <<공산권>>과 <<공식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발포하였다. ㆍㆍㆍ이번 기회에 사회주의 나라들과 쁠럭불가담나라들에 접근하여 <<국교>> 및 기타 <<공식관계>>를 맺어보려는 괴뢰들의 책동은 또한 올림픽 간판을 들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저들의 처지를 개선하며 나아가서 남조선을 그 무슨 <<국가>>로 인정받아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두개 조선>>정책의 또 하나의 다른 표현인 이른바 <<교차승인>>을 실현하기 위한 교활한 술책이라는 것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1981년 12월 3일 노동신문 中에서

 

  위와 같이 북한은 서울올림픽이 단순한 국제대회가 아니라, 서울에서 진행하는 올림픽 경기는 '미국의 남조선 강점을 찬성하며, 남북을 영원히 분열시키려는 미국과 남한의 책동을 부추겨주는 것'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특히 남한과 외교우위 경쟁을 펼쳤던 북한으로서는 심각한 외교적 타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서울올림픽 유치에 대한 북한의 대응

 

                                              ▲ 등소평 주석(중국)에게 담배불을 붙여주는 김일성 주석(북한)

  북한은 남한이 88서울올림픽 유치 결정 이후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IOC 위원들과 접촉하여 남한은 올림픽을 유치할만한 능력이 없다는 주장으로 남한의 올림픽 유치를 적극적으로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또한 서울에서 올림픽대회 유치가 확정되자 북한은 서울이 전쟁위험이 있다면서 올림픽 유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서울올림픽 유치 방해를 위해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국가들에게 보이콧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IOC 결정사항이므로 서울올림픽 유치 변경은 불가능 하다고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고, 중국 국가올림픽위원회 노금동(路金棟) 부위원장도 보이콧운동을 거부하였습니다. 보이콧운동이 호응을 얻지 못하자 북한은 올림픽 공동주최 쪽으로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1985년 10월부터 87년 8월까지 4차례에 걸친 로잔 체육회담에서 북한은 남북공동주최안을 고수했습니다. 북한의 핵심주장은 '대회 명칭에 평양이 들어갈 것, 공동주최에 걸맞는 실권과 조직 행태를 인정, 북한의 몇몇 지역에서 일부 종목을 분산개최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냉전구도를 형성하고 있던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에게 북한의 '올림픽 공동주최'는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1985년 11월 13일부터 15일까지 베트남 하노이에서 서울올림픽 참가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사회주의권 체육장관 13명이 모여 회담을 하였는데, 쿠바를 제외한 11개국은 올림픽 참가문제는 각국의 문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서울올림픽이라 하여도 참가결정과 논의는 각국이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외교적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김일성 은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과의 회담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올림픽 불참을 유도해 주거나, 공동주최를 주장하는 북한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등소평 주석과의 회담에서도 한중교역의 심각성을 말하면서 중국의 서울올림픽 불참을 유도하려 하기도 하였습니다.

 

4. 서울의 환호와 평양의 좌절

 

▲ 서울올림픽 개막식의 한 장면

                                   

  당시 우리 정부는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북한의 대응에 맞대응 하였습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의 불참과 1984년 LA올림픽에서의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의 불참을 고려하여 1988년 서울올림픽은 결코 반쪽짜리 올림픽을 개최하지 않으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등장으로 미국과의 신 데탕트를 형성하고 있었고, 세계전략의 중심은 아시아였기 때문에 우리정부는 소련과 긴밀히 접촉하여 '서울올림픽에 참가한다면 1983년 사할린 상공에서의 KAL 007편 피격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안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고 서울올림픽의 참여를 유도하였습니다. 또한 향상된 국력(군사력, 경제력, 국제적 지위)를 바탕으로 중국과의 무역을 확대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우리정부는 사회주의국가의 초강대국인 소련과 급부상한 중국이 올림픽에 참가하면 모든 사회주의국가들은 자동적으로 올림픽대회에 참여하게 될 것이고, 북한의 위협과 주장은 자동적으로 무효화될 것을 예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은 소련과 중국은 서울올림픽대회 참여를 발표하였고, 이에 따라 북한을 제외한 사회주의국가들은 서울올림픽대회 참여를 발표하였습니다. 북한은 보이콧 대응을 실패하여 서울올림픽대회 참가를 포기하는 대신 1989년 평양에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최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대한민국(종합 4위)은 국제적인 지위와 이미지가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그래서 북방정책(대(對)공산권 외교정책)을 추진하여 사회주의 진영의 거물인 소련과 중국과 수교를 하게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고, 헝가리와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과도 수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올림픽대회를 계기로 정치적ㆍ경제적 파워는 물론이며, 소프트파워에서도 북한을 압도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북한과의 체제경쟁과 외교무대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북한은 남한정부의 북방정책으로 자연스레 외교적 고립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우연의 일치인지 심각한 식량난까지 맞이하게 되는 등 국가위기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스포츠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루는 능력과 여건을 충분히 입증한 남한이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아마 88서울올림픽대회 직후라 볼 수 있습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남한은 꾸준한 발전과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였지만, 북한은 빈곤과 기아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평행선은 '서울의 환호, 평양의 좌절'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 남북공동입장(2004아테네올림픽)

               

  이렇게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한 남북한의 관계, 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한 우리정부의 노력을 알아보았습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공동입장은 하였지만, 아직까지 남북단일팀으로 올림픽대회 참가를 한 역사는 없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통일대박을 위해 추진하여야 할 과제가 아닐까요? 

 

 

 

<참고문헌>

정영철 외 공저_한반도 정치론(선인 출판)

위키백과 - 서울올림픽(검색)

오진용_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나남 출판)

노태우 대통령 회고록(조선뉴스프래스 출판)

<사진출저>

네이버 블로그(등소평에게 담배불 붙여주는 김일성)  

네이버 포토갤갤러리(서울올림픽 개막식) 

네이버 블로그(서울올림픽 유치계획 발표) 

여러분의 공감 하나가 통일부기자단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글 내용에 공감하셨다면, 공감을 꾸욱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