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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시대가 잉태한 한 재일동포 가족의 비애

시대가 잉태한 한 재일동포 가족의 비애

-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 -

 

 

 

 

해방 후 남북은 서로 다른 체제를 지향하며 서로 다른 제도를 구축해왔다. 군사적 대치, 이념대립, 이산가족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표현들은 분단의 아픈 역사를 잘 보여주는 징표들이다. 쉽게 치유할 수 없는 건 남북 간의 첨예한 대립만이 아니었다.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에게도 쉽게 아물지 않을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비운의 역사는 이 민족 누구에게나 고통 하나쯤은 별것 아니라는 듯 비웃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가슴을 저미게 하는 한 재일 동포의 가족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오늘도 “안녕 평양”이라 말하는 사람들, 바로 재일본 출신의 영화감독 양영희씨의 가족 이야기이다. 양영희 감독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그냥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또 다른 표현을 빌면 과연 이 영화를 세상에 공개해야 하는지를 10년이라는 제작 과정동안 계속 반문해야 했다고 한다. 어떤 가족의 이야기일까?

 

 

chapter #1.   세뱃돈 받는 아버지

 

 

 

양영희 감독의 아버지는 조총련 설립 초기부터 오사카 본부의 핵심멤버로 일해 왔다. 북한체제와 김일성의 위대성, 민족 교육의 중요성을 매일 선전하면서 재일본 운동을 위해 몸바쳐왔다. 당시 조총련은 전국에 40곳의 본부와 지부, 160개 이상의 민족학교를 세운다. 북한으로부터 받은 교육 원조비, 그 결과로 60% 이상의 교포들이 조총련을 지지하게 된다.

 

2004년 1월 1일. 단란하게 식탁에 앉아 설 인사를 나누는 가족들. 딸 영희는 그해 77세를 맞는 아버지에게 세뱃돈을 드린다. 아버지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내 처와 딸이 있으니 아버지는 정말 행복하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또 딸이 아직 미혼인 것을 걱정하며 ‘빨리 상대를 찾아 결혼하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80세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면서, 죽으면 묘를 평양에 옮겨달라고 한다. 딸 영희가 반대하자 평양에 있는 큰 아들과 상담해 보자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의 입에서는 “해당화 피어지는 섬 마을에...”라는 구슬픈 노래가 들려온다.

 

 

chapter #2.   1971년 오빠들과의 이별

 

 

 

 

해방 후 재일 동포 사회에는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다. 재일 교포 중 99%가 이남출신인데, 성향에 따라 조총련과 민단으로 나누어진다. 또, 일본의 민족 차별로 재일본 동포들은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된다. 그 당시(1970년대) 북한은 소련의 원조에 힘입어 남북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북한에 미련을 가지고 이북으로 향한다. 1959년부터 20년 동안 진행된 <귀국사업>으로 9만 명 이상의 재일동포들이 이북행 귀국선에 몸을 맡긴다. 당시에는 민족통일이 곧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세 오빠가 북한행 귀국선에 오르기 전, 영희네 가족은 다 같이 바다가 있는 온천으로 여행간다. 이것이 일본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이었으며, 그 후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기까지는 30년이란 시간이 걸린다. 7살이던 영희는 “귀국”이란 말도 몰랐고, 떠나가는 오빠들에게 매달려 울기만 했다. 그날 어머니는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아가타 항에서 아들들의 이북 행을 바라만 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다. 당시 중고등 학생인 아들들을 미지의 땅으로 보내는 아버지가 밉기도 했겠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결정을 지지하고, 이후에도 조총련 일을 헌신적으로 돕는다. 그 후 북한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지원물품을 도와달라는 하소연들뿐이다.

 

 

 

chapter #3.   영희의 첫 평양 방문

 

 

 

 

영희는 오사카 조선학교에 다니면서 자연히 북한을 숭배하는 교육을 받는다. 당시 일본 조선 학교에서는 “어머니 조국, 혁명의 수도 평양, 김일성 혁명사상”에 대한 내용들을 많이 가르쳤다. 또 조총련 간부의 딸답게 학교생활도 잘 해야 하고, 오빠들처럼 사회주의 조국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당부도 받는다. 그래서 오빠들이 살고 있는 평양을 항상 궁금해 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문화의 수혜를 받으며 영화 연극, 록 콘서트 등의 자유로운 여가 생활도 즐긴다.

 

1983년 난생 처음 조선학교 학생 방문단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다. 11년 만의 상봉이었지만 정해진 <면회시간>으로 인해 오빠들과 대화는 제한을 받는다. 평양 방문동안 지정된 관광지 방문 후엔 충성을 다짐하는 날들이 계속이었다. 오빠는 커피와 클래식이 없이는 못사는 사람이다. 그 당시 북한은 자본주의 문화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클래식 음악이나 생활양식을 허용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클래식 음악 만 허용했고, 영희는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CD를 오빠에게 보내준다. 평양을 방문할 때마다 같이 음악을 듣는 것이 유일한 안식이고, 위안이 되었다.

 

 

chapter #4.   평양 16km 지점

영희 어머니는 평양의 손자, 소녀들에게 보낼 학용품 정리한다. 아들 셋을 평양으로 보낸 후 30년 동안 계속해온 일이다. ‘부모밖에 못하는 짓이다’라면서 약과 학용품, 각종 생활필수품을 장만한다. 세 오빠 모두 결혼했고 손자, 손녀도 6명이나 됐기에 해마다 평양으로 보내는 지원 물품은 늘어만 났다. 2001년 10월 아버지의 진갑을 축하하기 위해 북한 원산행 <만경봉 92호>를 탄다. 만경봉 92호는 북한에 친척을 둔 재일동포들이 지원물품을 보내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원산항에 내린 가족들은 버스를 타고 평양으로 이동한다. 그때 영희의 눈에는 평양 16km 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영희에게 평양은 더 이상 어머니 조국도, 혁명의 수도도 아닌, 그냥 보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정다운 곳임을 실감한다. 30년 만에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평양음악무용대학에 다니는 손자는 할아버지 앞에서 멋진 피아노 연주를, 손녀는 조부모들이 보내 준 물품이 고맙다고 큰 소리로 인사한다. 할아버지도 며느리들이 마련해준 한복을 입고 입가에 미소를 띤다.

 

 

chapter #5 2004년 6월의 오사카 선언

영   희 : 오빠들 3명 다 평양으로 보낸 거 후회하세요?

아버지 : 벌써 가버린 거 할 수 없지, 그렇지만 만일 안 보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너무 일찍 판단한 거야.

어머니 :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발전하면 잘 살 수 있다.

영   희 : 너무 오래 믿지 않아요?

어머니 : 믿는다는 건 오래 될수록 가치가 있는 거지! 빨리 조일 국교 정상화 되고 북한에 있는 자식들이 부모 친척 만나러 일본에

            도 올 수 있어야 되고, 전화 통화쯤은 자 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단란한 가족의 대화. 시대의 흐름에 역류했던, 반항의 화신 같던 아버지도 인생의 종착점을 가까이 하면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을 딸에게 솔직히 터놓는다. ‘네가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정세가 바뀌었으니까!’라면서 자기는 죽어도 바꿀 수 없다는 한국 국적도 딸에게만은 허용한다. 이 작은 사변이 일어나기까지는 부녀간의 치열한 갈등과 대립, 그리고 수십 년의 시간이 걸렸다.

 

 

chapter #6 다시 세뱃돈 받는 아버지

 

 

 

 

2004년 7월. 초라하고, 적막한 병상. 영희의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병원으로 입원한다. 20초 이상 눈을 뜨지 못할 만큼 심각한 상태다. 2005년 정월. 아버지는 딸에게서 또 다시 세뱃돈을 받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운신도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예전처럼 대화도 원만하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평양으로 가자! 다시 가족들이 기다리는 평양으로 가자”라고 한다. 가장 가슴 아프지만, 가장 뜨거운 가족의 유대 관계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chapter #7 재회를 위한 “디어 평양” 

 

2001년. 아버지의 진갑은 평양 옥류관에서 진행된다. 멀리 원산, 신의주, 청진 등지에서 100여명의 친지들이 모인다. 아버지는 “1946년부터 조총련 사업을 위해 일했는데, 아직도 충성을 다하지 못했다. 아들, 딸, 며느리, 손자들을 혁명가로 키우는 것이 나에게 남겨진 일이다. 어떻게 하면 열렬한 김일성 주의자로 키울까에 대해 고민”이라고 말한다.

 

그 동안 아버지는 가족들 몰래 북한에 있는 가족, 친척, 친구들에게 돈과 물품을 보냈다. 그 사람들 모두 아버지의 설득으로 평양에 간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가 북한 사회에서 어떤 정치적 처벌이나, 경제적 어려움 없이, 정말 ‘안녕히’ 잘 지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오직 수령과 조국에 대한 충성만이 허용되는 사회이기에 그 체제에 어긋나는 발언이나, 위배되는 행위는 곧 단절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오늘도 “수령”을 위해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   양영희 감독

 

이 영화는 뭔 옛날에 있었던 역사 이야기도, 여느 스크린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무수한 가족 이야기도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와 무관한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남북의 첨예한 이념 대립으로 인해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인 우리 이웃들의 삶이다. 그러나 어떤 시대적 환경도, 이념적 장벽도 가족이라는 행복 동산을 침범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따뜻한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극과 극으로 대립되는 남북이라는 이분법보다 어제를 수용하고, 오늘을 포용하고, 내일로 모두 함께 가자는 것이 감독의 의도이고 속삭임이라고 여겨진다.

 

 

                                                                                             이진송 기자 dosta31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