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그날, 서울과 평양에서는>
한민족의 경사, 광복절
미국의 독립 기념일, 프랑스의 대혁명 기념일, 중국의 5·4운동 기념일 이 기념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시·공간은 달랐지만, 모두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날들입니다. 그리고 각 나라에서는 이날을 기리기 위해 국경일로 지정하고, 성대한 기념행사를 갖기도 합니다.
외국 뿐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에도 많은 국경일이 있습니다. 3·1운동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3·1절부터,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현충일, 최초의 헌법 제정을 기념하기 위한 제헌절, 그리고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고 전해지는 개천절까지. 하지만 그 중에서도 국민들의 가슴을 가장 뭉클하게 만드는 날은, 일제의 36년간의 폭압으로부터 해방을 맞이한 8월 15일 광복절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다가올 66주년 광복절. 광복절도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겨버린 셈인데요,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우리 국민들은 광복절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보았는지요? ‘올해에는 광복절 폭주족들이 얼마나 거리를 질주할까, 이번 광복절 특별 사면에는 어떤 사람이 선정되었을까, 주말이 겹치는 황금연휴에 어디로 피서를 떠날까?’ 같은 문제에만 관심을 쏟지 않았었나요? 사실, 광복절부터 우리 민족의 분단은 시작되고 있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까요?
1945년 8월 15일 그날, 서울과 평양에서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초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서서히 일본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전세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1945년 8월 6일,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하게 됩니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몸소 실감한 일본은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8월 8일, 독일 전선에서의 전투를 일찌감치 마무리 짓고 동북아지역 전선을 관망하던 소련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시베리아지역에 주둔하던 수 십 만의 소련군은 전의를 상실한 일본 관동군을 격퇴하고 서서히 남하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원자폭탄보다 무차별적으로 진군하는 소련군이 더 무서웠다는 이야기도 있었다네요.
미군은 북쪽, 소련군은 남쪽으로 진군하였지만 그들의 공통된 목적지는 바로 한반도였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세의 영향력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이나 미국으로 뿔뿔이 흩어져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국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죠. 그나마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비밀리에 결성되어 다가올 독립을 준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윽고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으로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만, 당시 서울의 모습은 우리들의 상상처럼 “대한독립만세”를 열창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많은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낮에 천황의 항복방송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이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일본군이 무장한 채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뛰어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죠. 심지어 종로경찰서의 일본 경찰들은 한민족 지도자를 모두 말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고 하니, 그 어수선한 분위기를 짐작할만 합니다. 다행히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 안재홍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활약으로 최악의 상황은 모면하였지만, 그 만큼 해방직후의 서울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같은 시기, 평양에서는 더욱 불길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바로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진군해오고 있었고 8월 22일에는 평양을 점령하며 한민족의 해방군 행세를 하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이 때 소련군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게 등장한 사람이 바로 김일성입니다. 배를 타고 귀국한 김일성은 평양에 나타나 수십만 군중 앞에서 해방 기념 연설을 했다는데요. 이 때 짧은 스포츠 머리에 어눌한 연설을 하는 김일성의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는군요.
이렇듯, 민족이 해방을 맞이한 1945년 8월 15일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날이었지만 그 기쁨조차 함께할 틈도 없이 소련군과 미군이 진군하였고, 광복절은 독립을 쟁취한 영광스러운 날이자 분단의 역사가 시작된 가슴 아픈 날이기도 합니다.
어느 덧 광복 후 6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남·북은 지난 66년간 단 한 번도 두 손을 마주잡고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맞이할 통일기념일에는 서울시민과 평양시민이 함께 “대한통일만세”를 외치며 우리 마음속 달력에 깊숙히 새겨넣을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해봅니다.
“대한독립만세”
그리고
“대한통일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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