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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다양한 나라의 통일 사례 : 독일, 예멘, 베트남

전세계적으로 많은 분단국가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반도만이 유일한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대표적인 분단국가였던 독일의 예 또한 있지만, 우리와 같이 분단 국가였던 예멘과 베트남에 대해서는 독일만큼 상세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단국가였던 독일, 예멘, 베트남의 통일의 다양한 사례를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1) 독일

독일이 서독과 동독으로 나누어 진 것은 다들 아시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항복 후 얄타협정에 의거 독일주권을 연합군이 장악합니다. 이때에 '4대국 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독일을 분할·관리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중에 서방과 소련은 독일의 전후 처리과정에서 절차상의 견해차이를 보이게 되며, 결국 대립상태로 발전하게 됨으로써 독일의 분단은 사실상 고정화되었습니다.

이후 1948년 2월 23일 미국, 영국, 프랑스 관할 지역은 서독으로 바뀌게 되었고, 같은 해 3월 30일 반발한 소련은 동독으로 바꾸게 됩니다.


이렇게 분단 후 서독은 아데나워 초대 총리이후 '자석이론' 또는 '힘의 우위에 의한 통일 정책'에 입각하여 서독의 국력 증강과 국제적 위상 강화에 주력합니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대동독 지원이 바로 독일 통일의 밑걸음이 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69년 10월 집권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정부는 조금씩 동서독 교류 범위를 넓히고 화해·협력을 통해 서로의 교류를 활발하게 만들어 독일통일의 원동력을 마련합니다.


▲ 독일 평화통일의 본산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 (출처:세계일보 2012-06-20 http://bit.ly/OEVayJ)


1985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 시행의 결과로 냉전체제가 점차 완화되고, 동유럽 국가들은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동독 주민들은 1989년 10월 라이프치히에서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시작하였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두각을 드러낸 민주화 세력은 1990년 3월 역사적인 자유총선거를 실시합니다.

이 선거에서 당선된 드메지어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동독 정부는 서독의 콜정부에 동독 15개 지구가 분단 전의 5개 주로 개편되어 서독연방에 편입하는 통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서독과 동독은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통일 초기 막대한 인플레이션 및 동독 지원으로 인한 국가부채 상승, 실업난 및 인구난 등의 악재에 부딪혔지만, 20여 년이 흐른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독일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최근 그리스발 유럽금융위기에서도 독일은 AAA신용등급을 유지하며, 위기 해결을 위해 활약하고 있습니다.

독일 통일후 최고 성장률..3.6%

수출.투자가 성장 견인..재정적자는 GDP 3.5% 유럽 최대인 독일 경제가 지난해 통일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방통계청은 12일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이 2009년에 비해 3.6% 증가했다고...

출처:연합뉴스 2011-01-12 http://bit.ly/OSE5T9


독일 기업신뢰도 통일후 최대폭 상승
독일 경제는 최근들어 수출이 증가하고 실업률이 하락하는 등 회복세가 완연하며 유럽 재정 위기도 점차 해소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중앙은행(분데스방크)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정부 공식 전망치인...

- 출처:연합뉴스 2010-07-23 http://bit.ly/NUAjey


2) 예멘

예멘은 과거 오스만투르크와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각자의 이유로 북예멘과 남예멘으로 독립하였습니다. 독립이 시간적 차이를 두고 이루어졌고,  이념상의 이유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분단되었습니다.

북예멘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터키군이 북예멘에서 철수하게 되자, 자이드 부족의 이맘(이슬람 성직자) '야이야'가 시나를 수도로 삼아 회교군주국으로 독립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아랍 지역에서의 개혁운동이 확산되자 제한된 개방정책을 실시하였으나, 1962년 9월 26일 민중들의 반정부 시위를 계기로 자유주의를 선봉하는 장교들에 의해 왕정이 붕괴하였습니다. 이후 '예멘아랍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꾸어 출범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남예멘은 제2차 세계 대전이후 민족주의 운동이 전세계로 확산되는 과정 속에서, 영국과의 계속된 투쟁 끝에 1967년 좌파 계열의 민족해방전선이 주축이 되어 11월 30일 영국과의 독립협상을 끝내고 '남예멘인민공화국'로 출범하였습니다.


<출처:중앙일보 2012-03-22 http://bit.ly/NzaAY4>


출범후 남북 예멘사이에는 끊임없는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으며, 이에 아랍국가들이 중재하여 협상을 체결하는 등의 과정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남북 예멘은 통일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으며, 무력충돌-평화협정-통일원칙의 과정이 반복되는 속에 1989년 남북 예멘은 정상회담 끝에 통일헌법안을 승인하였습니다. 이후 1990년 5월 공식적으로 통일을 선포함으로써 합의 통일이 이루어 졌습니다.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인 아랍권의 중재 노력과 고르바초프의 영향이 있었으며, 유전에 대한 공동개발 필요성, 남북 예멘 지도자들의 권력배분 합의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체제(민주주의-이슬람)에 대한 논의와 군대 통합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으며, 이에 따라 남북 예멘 주민들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계속적인 상호불신과 갈등의 심화로 인하여 남예멘 지도자들은 3년간의 과도기가 끝나자 다시 분리독립을 시도하였습니다. 1994년 남북 예멘 간의 내전으로 7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북예멘이 승리함으로써 남북 예멘은 무력재통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합의통일 이후 서로간의 강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갈등을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에 실패하였기에 무력재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무력재통일 초기에 강한 남예멘의 불신감이 악영향을 끼쳤지만, 세계은행과 IMF의 재정적 지원으로 정부와 경제가 안정기를 되찾고 예멘 전체 사회가 발전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3) 베트남

베트남 또한 위의 예멘처럼 식민지의 영향으로 분단이 시작되었습니다. 1952년 4월 26일 제네바 협정을 시작으로 프랑스와 북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북베트남군이, 남쪽에는 프랑스군이 각각 주둔한다는 휴전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북베트남에는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정권이, 1955년 1월 20일 남베트남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민주정권이 들어섰습니다.

당시 5천여 명의 공산당 공작원들이 남베트남에 잔류해 있었는데, 이들로 하여금 남베트남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가운데 국력을 약화시켰고, 이에 남베트남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시행하였으나 반정부세력은 확대와 지하화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1960년 11월 11일과 1963년 11월, 1964년 1월 30일 등 잇따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정국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정국이 이렇게 혼란에 빠진 사이 1960년 12월 20일, 다들 잘 아시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공)이 결성되어 농촌지역으로 급속히 퍼지게 됩니다. 이에 고무된 북베트남은 베트공을 지원하여 남베트남 정부의 전복을 기도하는 한편, 남베트남 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적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에 1962년 2월부터 미국은 베트콩 소탕작전을 개시하였고, 1964년 5월 우방국들의 지원을 호소하게 됩니다. 이때 한국 또한 참전하여 그 위명을 떨칩니다. 이후 미군 62만 명과 우방국(한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에서 온 지원군도 6만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전세는 더욱 불리해져 갔고, 미국내의 반전논의와 병역기피 현상이 심해지자 1969년 1월 25일 미국과 북베트남은 비밀협상을 시작하였으며, 1973년 6월 23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휴전 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1975년 4월 30일에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남베트남 정권은 붕괴하였습니다.

이후 무자비한 독재 체제에 의한 심각한 인권유린으로 목숨을 걸고 탈출한 보트 피플이 90만 명에 이르렀고, 경제성장은 퇴보만을 거듭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도이모이(개혁) 정책을 1986년부터 시행하여 계획과 경제 건설에 착수하였으며, 부분적인 사유재산을 허용하였습니다.

 

▲ 베트남 경제수도인 호치민시 일부 <출처:아시아경제 2012-07-13 http://bit.ly/MrV67s>

이상으로 다른 국가들의 분단 및 통일 사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다른 국가들 또한 식민지 또는 외세에 의해서 분단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서 사상적인 대립이 공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 남북 관계에서 우리가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선적으로 정치적인 지도자들의 단결 및 단합이 있어야 하며, 대국민적으로 통일에 대한 정당한 이유 및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통일의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는 소통이 이루어져서 서로간의 불신과 대립이 해소되어야 통일의 초석이 닦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통일후에도 통일이 되었다고 해서 마음을 놓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차이를 메워줄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이 장기적으로 뒷받침되어야 안정적인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남북 간에도 분단후 50여 년동안 많은 차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메꿀 수 있는 정책 및 국민적 인식이 지금부터 준비되어야 앞으로 다가올 통일이 예상보다 빨리 다가오더라고 당황하지 않고 만반의 여유를 가지고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1세기 통일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


출처 및 참고

○ 분단국 통일 사례와 남-북한 통일 정책 / 임정현 / 2010년

○ 분단·대립 접경지역의 해외사례와 한반도 DMZ의 시사점 / 박은진외 4명 / 2012년

○ 분단극복의 경험과 한반도 통일 / LG경제연구원 / 199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