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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이야기/정책 돋보기

창자가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네 이산가족

 

 

여러분은 혹시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곡을 아시나요?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노래이지만

당시의 비극적인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유명해진 명곡입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떠난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못뜨고 헤매일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꼭꼭 묶인채로
뒤돌아보고 또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넘던 이 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한국 전쟁이 종결된 이후인 1956년에 발표된 곡입니다.

'단장(斷腸)'이란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을 이르는 말이지요.

미아리 고개는 한국 전쟁 당시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기 때문에 전쟁 발발 초기에 조선 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 사이의 교전이 벌어진 장소였습니다. 인민군이 후퇴할 때 함께 데려간 사람들도 가족들과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배웅해야 했습니다. 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바로 이 미아리 고개에서 처형하고 떠났기도 했지요. 이 노래의 작사가 반야월은 자신의 어린 딸을 전쟁 중 피난길에 잃은 개인적 경험과 연결지어, 미아리 고개에서의 이별이라는 주제로 가사를 썼습니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떠난 이별 고개'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가사는 매우 구체적이며 애달픈 사연을 담고 있지요. 노래는 철사로 손을 묶이고 맨발로 다리를 절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자꾸만 돌아보며 북조선으로 가는 남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은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이 노래는 전쟁의 비극과 가족을 잃어버린 슬픔을 절실히 토로하여 큰 사랑을 받았고, 오랫동안 애창곡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노래로 인해 미아리 고개가 슬픔과 눈물, 한의 고개로 각인되었다는 이유로 성북구청이 '미아동'이라는 동명을 바꾸려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에게 서울을 뺏기고 열세에 처해있던 한국군이 같은 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전세가 역전되기에 이르렀고 9월 28일 빼앗겼던 서울을 수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북한이 다시 북으로 쫓겨 올라가기 전, 1946년의 『김일성선집』가운데 '남조선에서 인텔리들을 데려올 데 대하여'에 실린 '부족한 인텔리 문제를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인텔리를 다 찾아내는 한편, 남조선에 있는 인텔리를 데려와야 합니다'라는 글이 실리게 됩니다. 그 이유로 6·25 전쟁 당시 이 땅의 지식인과 각계각층의 시민 10만여 명이 북으로 끌려가게 되지요. 특히 다수가 9ㆍ28 서울 수복 직전 인민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납치당하게 됩니다. 가족과 강제로 떨어져 인민군에게 이끌려 가는 사람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으로, 울면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게 됩니다. 한 가족이 서로가 보는 앞에서 생이별을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찢어질 일이겠습니까? 겪어보지 않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아픔일 것입니다.

 

이러한 슬픈 역사적 배경이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의 배경이 되는 것이고 이 노래가 그렇게도 많은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던 이유는 실제로 이러한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희 상생 기자단은 곧 있을 남북 이산 가족 상봉을 앞두고 이러한 아픔을 안고 한 평생을 살아오신 이산가족 분을 인터뷰 하였습니다. 상생기자단이 만난 사람은 바로 손영애(63)어머님입니다.

 

 

 

여러분은 통일이나 이산가족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마음이 움직이십니까? 베트남에서 귀국한 아드님과의 저녁식사까지 미루며 상생기자단과의 인터뷰 자리에 오셨다는 말씀에 우리는 얼마나 손영애어머님이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시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따뜻한 차 한잔과 시작된 이야기는 정말 저희 기자단의 짧은 필력으로는 담아낼 수 없을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손영애어머님의 아버지는 손영애어머님이 3살 때, 그러니까 6ㆍ25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다가 북으로 다시 쫒겨 올라가던 9월 쯤에 납치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당시 손영애씨 가족은 고모부가 공군 조종사이셨기에 벙커에 안전하게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영애어머님의 60년의 아픔은 아주 작은 일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손영애어머님의 고모가 벙커에 숨어 있다가 손을 씻으러 잠깐 벙커 밖으로 나간 사이에 서울에는 폭격이 가해졌고 고모는 폭격에 맞아 숨지게 됩니다.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출가외인이라 하여 죽어도 시집에서 죽지 못하면 저승에서도 편하지 못하다 라는 풍토가 있었는데요. 워낙 살아있을 때 우애가 두터웠던 동생을 위해 폭격을 무릅쓰고 손영애어머님의 아버지는 동생을 시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할아버지와 길을 나섭니다. 

 

우여곡절 끝에 죽은 동생을 시댁에 데려다 주고 아버지와 함께 울음을 삼키며 다시 벙커로 돌아오던 길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북한군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손영애어머님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그 길로 북한군에 납치되었습니다.

 

북한군이 물러가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동네에는 미아리 고개에서 북한군이 끌고 가다가 쓸모없는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행여 그 무리에 북한군에 끌려간 아들이 있을까 하여, 일주일 밤낮을 새며 바로 그 '미아리 고개'에서 미친듯이 아들의 시체를 찾으셨답니다. 그러나 시체는 보이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영애어머님의 아버지가 당시 중국어도 잘하는데다가 국군으로 군복무를 하지도 않았고 연희전문학교를 다녔던 인텔리라서 북으로 끌고 갔으리라고 추정을 하게 됩니다.

 

 손영애씨가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료. (미군부대 통과 확인증으로 추정)

 

이렇게 아버지가 끌려가 버리고 나자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전쟁통에 딸과 외아들을 잃어버린 할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몸져 누우셨다가 돌아가셨고, 손영애어머님과 어린 동생 그리고 어머니, 할머니 이렇게 4식구가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아이들은 내가 키울테니 재가하라고 어머니를 설득했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손영애어머님과 동생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하루하루 살던 가족에게 다시 큰 시련이 닥쳐 옵니다. 어머니가 지병을 얻어 결국 3년만에 돌아가시고 만 것 입니다.

 

슬픔은 원래 한번에 밀려오는 것일까요? 전쟁통에 고모를 시작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까지 잃은 것도 모자라 동생과 손영애어머님을 돌봐주던 할머니마저 이웃집의 연탄가스 사고로 불의에 돌아가시고 손영애어머님과 동생은 전쟁 고아로 남게 됩니다.

 

그 이후의 삶을 손영애어머님은 정말이지 억척같이도 살아왔습니다. 동생 공부시키고 자식들 공부시키다보니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자식들 결혼 시킬 나이가 되고 보니 정작 자신은 '아버지라는 이름을 평생 한번도 불러보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잃고 자신을 키우다가 꽃다운 나이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삶이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손영애어머님는 생전 한번이라도아버지라는 말을 불러보고 싶어서,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믿음으로 기다리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산가족 상봉 절차를 밟고 기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손영애어머님이 아버지를 만날 확률은 슬프게도 커 보이지 않습니다. 이산가족의 상봉 우선순위는 고령자부터이기 때문입니다. 63살인 손영애어머님은 직계가족을 찾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고령의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순번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게다가 차라리 생사가 확인되면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해질수도 있을텐데 북에서는 기본적인 생사 확인조차 해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손영애어머님은 이러한 문제점들이 개선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인터뷰 내내 대화를 나눈 손영애어머님은 정말이지 유쾌하신 분이었습니다. 여장부 처럼 당당해 보이셨고, 말씀도 재미있고 조리있게 잘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쾌한 성격임에도 아버지, 어머니라는 단어만 나오면 눈물을 왈칵하고 쏟으셔서 인터뷰가 몇번씩 중단되었습니다.

 

사실 이 기사를 쓰고 있고, 보고 있는 우리는 그 분의 아픔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그 분의 삶을, 그 분의 가족을 그토록 슬프게 만들었습니까? 그 분의 아픔 앞에서 다른 논리를 꺼내어 들 수 있겠습니까?

 

전쟁은 이 땅 위에서 다시는 벌어지지 않아야 할 상처를 새겨놓고 60년이 지나도록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그 상처는 '단장'의 고통으로 오늘도 이산가족들을 괴롭힙니다.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것이 정치, 경제 논리에 의해서 벌어지는 이벤트 성격의 1회성 행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P.s. 공식기사에서 덧붙이는 말은 의미가 없겠습니다만, 부족한 글 솜씨로 담아내기에는 너무나도 진실한 인터뷰를 해주신 손영애 어머님께 감사드립니다. 상생기자단이 인터뷰한 손영애 어머님뿐만 아니라 이 땅에 분단의 아픔을 가진 모든 분들의 아픔이 반드시 빠른 시일 내에 치유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