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①중국 근대사, 중국 20세기 초의 형세 -

'장개석(좌)vs모택동(우),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국공내전''

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기자입니다!! 많은 분들이 중국은 공산국가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대륙 옆에 있는 섬나라 대만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역시 이미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전에 소위 '쯔위사태'로 불리는 사건으로 중국과 대만의 네티즌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대만 사람이 대만국기를 흔드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그들의 싸움을 이해하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고 복잡한 과거와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부터 연재될 '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에서 공산주의 국가 중국,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만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지금의 그들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물론 국공내전과 6.25전쟁은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국공내전에는 6.25전쟁과는 다르게 타국 군대가 참여하지 않았고, 또 휴전상태로 끝난 6.25전쟁과는 다르게 국공내전에서는 승리자와 패배자가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국공내전과 6.25전쟁은 모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 전쟁이라는 점에서 아주 큰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였기 때문에 중국 대륙을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게 되었고,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중국 국민당(자유민주주의)이 대만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만약 6.25전쟁에서 북한이 국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국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냈다면 남한 정부는 제주도에 망명정부를 세우는 것을 계획했다고 합니다. 즉, 북한이 남한을 한반도에서 몰아내 한반도를 차지한 것은 중국 공산당이 중국 대륙으로부터 중국 국민당을 몰아낸 것을 보여주고, 한반도에서 쫓겨나 제주도로 망명정부를 세운 남한은 중국 대륙에서 쫓겨나 대만에 정부를 세운 중국 국민당을 보여준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결과만 보고 현재의 그들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탄생하게 된 1900년대 초반의 중국의 상황을 조명하는 것을 시작하여 중국 국민당의 탄생, 중국 공산당의 탄생 그리고 1차 국공합작, 1차 국공내전, 2차 국공합작, 2차 국공내전, 마지막으로 중국 공산당의 중국대륙 적화통일을 보는 것으로 연재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오늘은 먼저 중국 근대사, 20세기 초의 중국 형세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청나라 전성기 영토,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청나라 전성기''

중국 근대사의 시작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의 몰락에서 시작합니다. 19세기에 들어서면 청나라는 강희제(재위, 1661~1722), 옹정제(재위, 1722~1735), 건륭제(재위, 1735~1795)를 거치면서 누린 전성기의 기세를 점점 잃기 시작합니다. 영토확장과 황실경비로 인한 재정적인 부담이 가중되면서 전국적인 반란이 건륭제 말기부터 시작하고, 서양세력들의 동아시아 진출 등으로 인하여 중국의 대내적 국제적 정세는 더욱더 악화됩니다.

'아편전쟁 당시 침몰하는 청나라 해군 함대,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아편전쟁''

그렇게 청나라는 기울어가고 있었는데 청조의 멸망에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아편전쟁입니다. 아편전쟁은 1차, 2차 아편전쟁으로 나뉩니다. 아편전쟁이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청나라와의 무역에 적자를 보고있었던 영국이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아편을 수출하다가 중국 정부와 마찰을 빚어서 무력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려고 한 것입니다. 전쟁의 원인을 보시다시피 아무런 명분없는 전쟁이었기에 영국의 역사가들 스스로도 가장 불명예스러운 전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바로 아편전쟁입니다. 이러한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는 증기함선으로 무장한 영국군을 그들의 재래식 함대로 이겨낼 수가 없었고, 결국 1차, 2차 아편전쟁에서 모두 패한 청나라는 영국과 불평등조약을 맺게 됩니다. 그 후 청나라를 어떻게 요리해볼까 눈치를 보던 서양 강대국들이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종이호랑이임에 불과한 것으로 판단하고 우후죽순으로 몰려들어 청나라와 불평등조약을 맺습니다.

'태평천국운동에서 영국군(파란색)의 힘을 빌어 청군(빨간색)이 태평천국혁명군을 진압하고 있다.,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태평천국운동''

이후 청나라는 혼란을 거듭해갑니다. 아편전쟁 이후, '태평천국운동(1851~1861)'이라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납니다. 청나라 정부는 태평천국운동을 정상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고, 외국군대의 도움을 받는 등 비정상적으로 앙간힘을 다해 진압하게 됩니다. 또한 청프전쟁(1884), 청일전쟁(1894)에서 패전한 청나라는 프랑스에 베트남의 실효지배력을, 일본에 조선의 실효지배력 넘기게 되면서 동아시아의 최강대국 위상을 점점 잃어갔습니다.

'청일전쟁에서 돌진하는 일본제국군,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청일전쟁''

이렇게 내우외환으로 망해가고 있는 청나라에서도 자체적으로 부흥을 위한 운동을 많이 시행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양무운동(1861~1894)과 변법자강운동(무술변법, 1898)이 있습니다. 양무운동은 서양의 근대식 무기와 군대체제를 도입하여 서양식 군대를 갖추어 강대국의 위상을 지키자는 운동이었는데, 비효율적인 운영과 청나라 관리들의 부정부패 등으로 효과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결정적으로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대패함으로써 양무운동의 한계가 드러남으로써 양무운동은 실패로 막을 내립니다. 이후 양무운동의 실패를 본받아 더욱더 혁신적인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변법자강운동입니다. 양무운동이 외형적인 체제와 문물만 도입을 하는 개혁운동이었다면, 변법자강운동은 정치, 교육의 정신적인 면에서도 서양의 방법을 도입하여 전면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변법자강운동은 수구파, 즉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혀 효과적으로 진척해나갈 수 없었고 결국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양무운동 당시 연마하고 있는 청나라 군인들,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양무운동''

아편전쟁 이후로 끊임없는 내우외환이 일어나고, 그리고 내부적으로 개혁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청나라 왕조는 드디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신해혁명(1911)입니다. 신해혁명의 시작은 다소 생각치도 못한 부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많은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인한 전쟁배상금, 내부적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이용된 군자금, 그리고 각종 개혁운동에 소모된 비용 등을 외국으로부터 빚을 지면서 충당한 청나라 정부는 재정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철도 국유화를 선언합니다. 당시에 철도라는 것은 산업의 기간으로서 매우 중요한 시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외국세력 역시 철도의 소유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청나라 정부는 그 철도를 국유화 하여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빌리는 담보로 이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러한 청나라 정부의 결정은 지역 실권자들과 민중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혁명의 불씨를 심게됩니다.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청나라 정부는 이들에게 강경하게 탄압하였습니다. 이러한 강경 탄압은 오히려 시위대들의 무장과 봉기를 자극했는데요, 결국 '무창'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이러한 봉기는 다른 지역들의 봉기를 촉발하면서 전국적인 무장봉기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전국적인 무장봉기는 그 지역의 청나라 조정의 실효권을 잃게 만들었고, 결국 (신해)혁명군은 난징을 함락시킨 후, 외국에서 귀국한 혁명세력의 상징인 '쑨원'을 앞세워 '중화민국'이라는 혁명정부를 세우게 됩니다. 혁명정부인 중화민국은 중국대륙에 등장한 최초의 공화정 국가로서 이후 '중국 국민당'의 불꽃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화민국이 등장함에따라, 청나라 왕조는 사실상 거의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신해혁명 직후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선언,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신해혁명''

중화민국이 들어서자 청나라 정부는 당시 군권의 실세였던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중화민국 세력을 수습하고 정리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에 혁명정부의 초대 총통이었던 쑨원은 군사력과 자금 등 모든것이 부족했기에 위안스카이의 세력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위안스카이에게 중화민국의 총통자리를 내어주는 대신에 공화정 국가의 설립, 남경을 수도로 지정 등의 협상조건을 걸고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스스로 사임합니다. 총통의 자리에 오른 원세개는 자신에게 실권을 모두 주었던 청나라를 공격하여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쫓아내어 청나라를 멸망시킵니다. 하지만 그는 쑨원과의 약속을 거의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자, 전 국민적인 반원세개 혁명세력이 들고 일어났고, 그를 타도하기 위한 무장세력들이 그에게 도전하였습니다. 결국 원세개는 군주제를 포기하고 중화민국의 이름을 회복한다고 선포했지만 결국, 58세의 나이로 1916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군대 제복을 입은 원세개,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원세개''

원세개가 사망하자 원세개의 뒤를 이어, 또는 중국 각지에서의 지방실력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그들의 지역에서의 패권자로 스스로 칭하며 소위 춘추전국시대처럼 군웅할거의 시대로 돌입하게 됩니다. 이 시대를 바로 '군벌시대'라고 합니다. 군벌시대의 군벌들은 그들의 군대를 육성하기 위하여 농민들을 쥐어짜는 등 백성을 핍박하는 행동을 많이 하였는데 이들은 중국이 근대 통일국가로 나아가기위해서 반드시 청산해야될 암적인 존재였습니다.

'원세개의 사망 이후 군벌시대로 돌입한 중국 대륙의 세력도, 사진출처: 구글코리아, '군벌시대''

바로 이때 중국 군벌시대를 종결시키고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등장한 자가 바로 '쑨원', '장개석'과 '중국 국민당'입니다. 다음편에 '중국 국민당'의 탄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통일부대학생기자단 노도희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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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참소년 2016.12.10 11:10 신고 댓글주소 | 수정/삭제 | 댓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른 다음편 읽으러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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