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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김일성은 어떻게 1인자가 됐을까?

안녕하세요. 제9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황인성입니다.

이번에 제가 현재 공부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북한학과에서 강승규 북한학과 교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강승규 교수는 김일성의 일대기를 기반으로 북한에서 김일성이 1인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습니다.

김일성이 조선노동당을 세우고 북한의 1인자가 됐다라는 사실은 많은 분들이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와 관련된 많은 서적들과 논문들도 있지만 북한학을 공부하고 있는 제가 보기에도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이번 기사를 통해서 많은 분들이 읽기 쉽고 접근하기 쉽게 포괄적인 내용으로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연자의 개인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김일성이 북한의 1인자가 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는데요.

1인자가 되어가는 과정에서의 김일성의 모습을 현재 김정은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김일성과 김정은이 흡사하기도 한데요.

본격적으로 김일성이 1인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강승규 교수의 강연에서 나온 큰 사건들을 계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1912년,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 사이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부모님을 따라 중학교 때 만주로 이주하게 됩니다.

김일성은 어려서부터 항일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는데요.

항간에는 김일성이 중학교 때부터 항일운동으로 불리는 타도 제국주의 운동을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 '동북항일연합군(중국연합군)'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김일성이 항일운동에서 유명해질 수 있었던 사건이 벌어집니다.

지금까지도 김일성의 업적으로 미화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인 '보천보전투' 전투인데요.

 보천보전투는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부대를 이끌고 일제의 전략적 요충지인 보천보를 습격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관공서 등을

공격하여 일본 순사 7명 정도를 죽이고 하루 가까이 점령했던 전투입니다.

이 전투가 국내 '동아일보'등에서 다루면서 국내에서도 김일성의 이름이 크게 알려지고 항일운동의 지도자로 알려지게 됩니다. 

심지어 주변 국가에까지도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알린 전투입니다.

보천보전투가 큰 전투가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굉장한 업적으로 여겨지며 항일운동의 지도자로 올라서는 계기가 되었고

김일성이 훗날 자신을 미화하는데 주로 쓰였습니다.  

보천보전투와 여러 항일운동이 전개되자 일본도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요.

일본은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벌여 많은 항일 군의 우두머리들을 제거해 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점은 김일성이 속해 있던 부대에서 김일성을 제외한 모든 중대장들이 제거당하게 되는데

김일성만이 살아남게 되어 당시 소련으로 도주를 하게 됩니다.

목숨을 유지한 김일성은 소련에서 1945년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북한을 두고 소련과 미국이 각각 북한과 남한을 관리한다는 전제로 3.8선이 그어지게 됩니다.

이때, 북한의 초기 정권을 두고 여러 개의 정치세력 집단이 부딪히게 되는데요.

1.갑산파

빨치산파 라고도 불리는 갑산파는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던 세력을 말합니다.

갑산파는 다른 세력들을 물리치며 훗날 북한의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후에 김정일의 권력기반이 되기도 했습니다.

2.소련파

소련파는 소련에서 활동하던 인물들로 일명 '엘리트'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고 권력기반이 국내에서는 약했기 때문에 당시에 크게 영향을 끼치진 못 했습니다.  

3.연안파(옌안파)

연안파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항일투쟁을 하던 세력이었습니다.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후에 중국공산당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입북했던 세력입니다.

4.남로당파(국내파)

당시 남로당파는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던 박헌영이 중심이었는데요.

김일성보다 국내에서 인지도가 더욱 높았던 박헌영은 남한의 반공 분위기를 못 이기고 북한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자, 이제 이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부분이 시작됩니다!

당시 소련에서 오래 활동했던 김일성은 소련의 지지를 기반으로 북한을 장악해가기 시작하는데요.

소련은 위성국가의 개념으로 북한을 관리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요구를 잘 받아들이고 순종적인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김일성은 당시 소련에 많은 인맥을 두고 있었고 소련의 의도를 누구보다 빨리 간파하게 됩니다.

따라서 소련은 김일성을 선택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1946년 조선공산당을 조선노동당으로 바꾸고 소련을 이용하여 당을 장악하고

동시에 군에 자신의 지지세력인 빨치산의 인물들을 심어 군까지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50년,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의 도움으로 6.25전쟁이 일으키게 됩니다.

여기서 전쟁을 일으키게 된 배경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당시 남한에서 공산 지지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전쟁을 일으키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남한에 있는 공산 지지자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될 것이고 3일 안에 전쟁을 끝낼수 있을거라는 것이 제안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북한 입장에서 6.25전쟁의 결과는 실패였다는 것을 다들 아실 거예요.

김일성은 박헌영의 제안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결과의 책임을 박헌영에게 물으면서 숙청하게 됩니다.

1953년 8월, 김일성, 한국 전쟁의 종전과 회의 요약을 축하하기 위해 연합군의 군사 임원회에 참석 모습

6.25전쟁 이후 박헌영의 숙청을 시작으로 김일성은 자신의 세력과 부딪히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소련파와 연안파를 제거한 '8월 종파사건'입니다.

8월 종파사건은 북한 역사에 있어서 아주 큰 사건이었는데요.

 *자세한 전말을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에 있는 통일부 기자단 추재훈 기자가 작성한 기사를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일성을 축출하라" 8월 종파 사건 ①

http://blog.unikorea.go.kr/6363

 

김일성이 북한에서 1인자가 되기 위해서 선택한 전략은 자신에게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을 모두 숙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체사상을 만들고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1인자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62년 김정일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김정일은 조직지도부에서 주체사상을 발전시키고 이를 김일성주의로 만들면서 더욱 공고히 김일성의 1인자의 길을 닦아주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마지막으로 남은 세력인 갑산파가 있었는데요.

김일성의 후계자 선정에 불만이 있었던 갑산파는 사사건건 불만을 표출했는데요.

이것이 화근이 되어 김정일이 1967년 제 6차당대회에서 갑산파를 공격하게 되고 결국 숙청까지 이르게 됩니다.

갑산파를 마지막으로 김일성은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게 됩니다.

이로써 김일성의 1인자로서의 길은 끝이나게 됩니다.

 

어떠신가요?

저는 김일성이 북한에서 살아남아 평생을 독재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숙청 즉, 공포정치였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번 강연을 통해서 저는 6.25전쟁 이후 북한에서 벌어진 정치판도 변화에 대해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김정은의 모습을 보면 김일성과 닮아있는 모습이 참 많은데요.

그중에서도 공포정치는 더욱 닮아있는 듯합니다.

과연 북한이 공포정치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