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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②중국 국민당의 탄생

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②중국 국민당의 탄생 -

 

안녕하세요 통일부대학생기자단 노도희기자입니다. 오늘은 지난 기사에 이어서 '중국 국민당'의 탄생에 대해서 연재물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쑨원의 초상화, 출처: 구글코리아. '쑨원''

중국 국민당의 창당을 논할 때 절대 빠질 수없는 두 인물이 있는데, 바로 손문(쑨원)과 장개석(장제스)입니다. 먼저 손문에 대해 잠깐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손문은 1866년 11월 12일 광둥 성의 췌이헝이라는 마을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췌이헝이라는 마을은 당시 포루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와 꽤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즉, 손문은 어릴 적부터 중국문화와 서양문화를 동시에 접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손문은 전통식 교육을 받음과 동시에 서구식 교육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손문은 신학과 의학을 배웠는데, 그렇지만 그는 의학보다는 당시의 혼란했던 정치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손문이 이러한 역사적 환경속에서 혁명가로서 성장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장제스의 초상화, 출처: 구글코리아. '장제스''

장제스는 중국 저장성의 펑화현이라는 곳에서 1887년 10월 31일에 소금장수 아버지의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장제스 역시 손문과 비슷하게 전통식 교육과 서구식 교육을 동시에 받았는데, 1906년에 바오딩 군관학교에 입학하면서 군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듬해 장제스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911년까지 일본 군대에서 군복무하였습니다. 하지만 1911년 신해혁명이 중국에서 발발하자, 중국으로 돌아와 청나라를 타도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기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신해혁명 당시 사용한 18성기, 출처: 구글코리아. '신해혁명''

쑨원과 장제스의 만남은 신해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쑨원은 1905년에 신해혁명이 발발하기전에 '중국혁명동맹회'라는 조직을 일본에서 창단합니다. 중국혁명동맹회는 쑨원이 청나라정부를 뒤엎고 혁명적 민주공화국을 중국에 건설하기위하여 혁명에 뜻이있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만든 조직입니다. 이러한 중국혁명동맹회는 쑨원의 '삼민주의(민족, 민주, 민생)'를 지침으로 하였고, 외국열강을 추방하고, 토지 재분배를 하는 등을 목표로 삼는 조직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내에서 쑨원의 지지자가 늘어나자 청나라는 일본에게 쑨원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고 쑨원은 추방당하여 망명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혁명은 일어났으나, 혁명운동자들도 갑작스러운 신해혁명에 당황스러운 입장이었고, 그들은 새로운 중국을 일으킬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혁명을 이끌어 줄 정신적인 지도자가 부재하자 중국 민중들은 모두 쑨원을 주목하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쑨원은 그해 12월에 귀국하여 드디어 '중화민국'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해혁명 진행도, 출처: 구글코리아. '신해혁명''

하지만 청나라 왕조가 아직 멸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화민국은 새로운 중국을 대표한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청나라 조정은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군권을 주어 중화민국을 토벌할 것을 명하자, 쑨원은 결코 혁명군이 토벌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위안스카이에게 제안하여 만약 청을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을 공화정정부로 이끌어간다면 그에게 총통자리를 내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그러한 제안을 수락하였고, 약속대로 역으로 청나라를 공격하여 청나라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킴으로써 청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약속을 잘 이행하는 듯 보였으나, 그는 공화정을 선택하는 것이아니라 다시 군주제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의 총통이 된 상태에서 쑨원은 중화민국에서의 위안스카이의 어용정당인 공화당에 대항해 국민당을 창설합니다. 이 국민당이 바로 훗날 '중국 국민당'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당은 바로 해산되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중화민국의 의회 투표에서 국민당이 공화당에게 대승을 거두어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강제적으로 해산시킨 뒤, 자신의 야심인 황제 즉위를 위하여 점차 독재적인 정부로 중화민국을 변질시켜갑니다.

'위안스카이가 몰아낸 청나라 왕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 출처: 구글코리아. '부의''

위안스카이의 배신으로 결국 신해혁명은 실패한 것이었고, 이에 쑨원은 다시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기 위해서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1914년, 쑨원은 살아남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그가 망명한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창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쑨원의 이러한 운동으로 몰락했다기보다 자멸을 초래하여 멸망하였습니다. 위안스카이는 공화정을 버리고 과거의 황제 군주제로 돌아가려고했습니다. 그는 결국 1914년 새로운 왕조를 선포하고 그가 황제임을 스스로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과 그리고 심지어 그를 따르던 장군들마저 그를 저버리니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6년에 황제 선언을 무효화한다고 선언했으나, 저버린 민중들과 장군들을 다시 돌이킬 수 없었고 결국 고독속에 1916년에 병사하고 맙니다.

이렇게 위안스카이가 무너지자 각지의 지방세력가들이 자신들이 그 지역의 최고 정치,군사 세력자임을 자처하며 지방정권들이 난립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대가 군벌시대입니다. 베이징에 위치한 중앙정부는 말 그대로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지방에 난립한 군벌세력들을 토벌할 힘도 군대도 재정력도 없었기에 지방 군벌들에게 징세권과 군사력을 인정해 줄 수 밖에 없었고, 지방 군벌들은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군벌들과 연합하는 것은 물론 외국군대를 끌어오는 것 역시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중국판 3.1운동이라고 부르는 5.4운동, 출처: 구글코리아. '5.4운동''

이러한 중국의 혼란시대에서 쑨원은 1919년 5.4운동의 영향을 받아 중화혁명당의 본부를 도쿄에서 상하이로 옮긴후 마침내 '중국 국민당'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광둥지방으로 돌아온 쑨원은 남부지방의 군벌세력들과 동맹하여 그들이 진정한 중국의 중앙정부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군벌들은 그를 인정해주지 않았으며, 외국들 마저도 그들을 인정해주지않고 오직 북방군벌의 허수아비인 베이징 중앙정부를 중앙정부로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국민당의 창당, 출처: 구글코리아. '중국 국민당''

상황이 진척되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결국, 1922년 쑨원은 그의 동맹 군벌세력과의 알력으로 광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에게 손을 뻗은 것은 바로 소련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쑨원은 그들과 충분히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소련 역시 1921년 중국 공산당이 탄생한 것에 더하여 중국 국민당에게 접근하고 싶었기에 충분히 정치적,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할 용의가 있었습니다.

자 다음의 상황으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방금 언급된 '중국 공산당'의 탄생도 짚고 가야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탄생'을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통일부대학생기자단 노도희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