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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영화 <밀정>의 모티브, 황옥경부사건


(이 글은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 <밀정>의 모티브, 황옥경부사건


최근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신작 영화 <밀정>이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 9월 26일 기준으로 발표한 영화 <밀정>은 누적 관객수 690만 명을 돌파했으며, 개봉 후 17일 동안 예매율 1위를 기록했습니다. 영화 <암살>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일본 밀정에 관한 이야기가 다루어지기도 했습니다.


한편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사건 또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황옥경부사건>이 그것입니다. 황옥은 일제강점기에 일제 경찰로 일하며 밀정 역할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지금까지도 황옥이 일본의 밀정이었는지, 혹은 조선인 독립투사들을 위해 일했던 이중간첩이었는지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스포츠경향과의 인터뷰에서 황옥경부사건을 모티브로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김지운 감독 ⓒ스포츠경향


"이정출(황옥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을 중심에 놓은 이유는, (그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정신적인 이중국적자의 내면에 흥미를 느꼈다. 항일, 친일로 변신하는 인물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공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정채산이라는 인물이 극적이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할 수 있지만 이정출만의 매력이 분명히 있다. 한 나라의 시스템이 정상적이지 않을 때 개인도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개인에게 직접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황옥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위장 잠입했는지, 밀정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인물의 마음이 궁금했다." (관련기사 ☞클릭)


일본에 체포된 황옥(왼쪽)과 김시현(가운데)


황옥은 1885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하여 일본 경찰로 경부(경감급)까지 승진한 인물입니다. 경부는 조선인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였고, 그의 역할은 독립군을 감시하고 체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황옥이 일제강점기의 소용돌이치는 독립투쟁의 장에 전면으로 나선 것은 1920년입니다.


의열단은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기 위해, 당시 일본 경찰 중 거의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황옥을 포섭합니다. 당시 황옥은 일본 경기도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옥은 거사를 계획한 날 일본 경찰이 1,000여 명의 조선인을 검문하리라는 것을 의열단에 알려, 총독 암살 작전은 실패하지만 의열단원의 목숨을 구해줍니다.


10명이 넘는 일본 경찰에게 권총 두 자루로 맞섰던 의열단원 김상옥


3년 후인 1923년 1월, 종로경찰서에 독립투사가 던진 것으로 추정되는 폭탄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독립투사이자 의열단원이었던 김상옥이 상하이에 거주하다 서울(경성)로 잠입해 폭탄을 투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의 경성 통치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되자, 크게 당황한 일본 당국은 김상옥을 폭탄 투척 용의자로 지명하고 그를 체포하려다 사살합니다. 일본 당국은 이와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선인 경찰이었던 황옥에게 밀정이 될 것을 권유합니다.


한편 의열단은 김상옥을 필두로 다른 의거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김상옥이 체포되어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의열단은 또다른 단원이었던 김시현을 필두로 경성 내 주요 일제 시설을 폭파시키는 대규모의 의거를 새로 기획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김시현은 과거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황옥을 포섭합니다. 황옥은 조선인 독립투사들에게서도, 일본에게서도 밀정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의열단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은 일본 경찰이었던 황옥을 직접 판단하기 위해 그를 중국으로 불러들입니다. 황옥은 일본 경찰에게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의 관련자를 색출한다는 핑계를 대고 톈진에 가서, 김원봉을 만납니다. 김원봉은 황옥을 신뢰하기로 결정하고, 의열단의 대규모 의거를 돕기 위해 폭탄 36개, 권총 5정을 철로를 통해 경성으로 반입합니다.


그러나 이 의거는 의열단 내 밀정인 김재진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가고, 황옥, 김시현 등 대다수 의열단원이 체포됩니다. 황옥은 재판에서 자신은 일본 경찰의 밀정이라고 주장했으나, 혐의를 완전히 씻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1924년 의열단원이었던 김지섭이 일본에 잠입해 왕궁에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때 폭탄이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은 황옥이 폭탄에 총독부 물건이라는 소인을 붙였기 때문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 결과 일본 경찰의 밀정이라고 주장한 황옥의 주장은 일본 재판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했던 의열단원 김지섭


김지섭은 황옥이 조선인 밀정이냐는 일본 당국의 질문에 "황옥을 밀정이라 함은 웃기는 일이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황옥은 결국 이중간첩 혐의로 1924년에 징역을 선고받습니다. 그는 몇 번의 탈옥과 재수감을 반복하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고, 이후의 생사는 알 수 없습니다.


황옥이 일제의 밀정이었는지, 독립투사의 밀정이었는지는 아직도 불확실합니다. 황옥은 일본 재판장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경찰 관리로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고, 성공하면 경시까지 승진 시켜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고 발언하며 조선인 밀정임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이 "황옥은 경기도 고등과 경부이나 과거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 불행히 관헌에 체포된 애련한 자"라며 끝까지 황옥을 두둔했습니다.


황옥을 끝까지 믿었다고 알려진 의열단 단장 김원봉


역사학계에서도 황옥에 대한 평가는 사실상 내려지지 못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은 "해방 뒤 의열단장 김원봉이 황옥을 의열단원이라고 증명했다는 것 역시 사료를 통해 입증된 이야기가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인지라 확인이 힘들다"면서도, "(일본)밀정이라면 아예 재판을 안 받아야 하는데 재판을 받았다"며 판단을 유보했습니다. 작가이자 역사강사인 심용환은 "황옥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힘들다"며, "행적의 작은 애매함을 두고 이 사람이 위장 친일파였다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의견이 분분한 황옥, 영화 <암살>에도 다뤄지듯 당시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일제에 맞선 투쟁일 뿐만 아니라,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의심과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워해야만 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독립을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독립투사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추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