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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문화공간

북한 미술의 뿌리 변월룡


 

통일 미래의 꿈 독자여러분 안녕하세요. 제9기 대학생 기자단 유수연입니다.

지난 3월 3일 부터 5월 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8월 5일 부터 10월 30일까지 제주도립미술관에서  변월룡 탄생 100주년을 맞아 '고국의 품에 안긴 거장-변월룡전' 이라는 주제의 전시회가 개최되었습니다.

 

( △ 고국의 품에 안긴거장 변월룡전 포스터-출처: 제주도립미술관)

 

'북은 버리고, 남은 잊었다.'

많은 독자분들에게는 낯선 이름일텐데요, 이중섭, 유영국과 함께 한국 근대거장으로 손꼽히며 북한 미술의 뿌리를 다진 천재화가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렘브란트라 불리며 다시 주목받고 있는 화가 '변월룡'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 자화상-출처: 국립현대미술관)

 

1916년 9월, 시베리아 동남단에 위치한 연해주의 쉬코토프스키에서 출생한 변월룡은 기근, 가난, 신분차별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터를 잡은 한인 이주민의 아들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부터 뛰어난 미술실력으로 주목을 받은 그는 넉넉치 못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출판사 삽화 그리기, 극장 간판 그리기와 같은 소일거리를 하며 배움을 이어갔고 중등교육을 마친 후 스베르들로프스크의 미술학교에 편입하게됩니다.

1940년,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들을 배출한 러시아 최고의 고등미술교육기관인 레닌그라드(상드페테르부르크) 회화, 조각, 건축학교(이후 일리야 레핀 회화, 조각 건축 아카데미로 개편)에 입학합니다. 이곳에서 변월룡은 전공공부 외에도 그래픽과 워크샵에서 동판화와 석판화 연구에도 매진하며 배움을 이어갑니다.

1941년부터 45년까지 독소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아카데미는 우주베키스탄 사마르칸트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변월룡은 티슈켄트 국립출판국에서 반(反)나치, 반전, 반 식민주의를 외치는 포스터를 다수 제작하였습니다.

1947년 아카데미를 졸업한 변월룡은 대학원에 진학하고, 소련 미술가 연맹 회원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대학원을 마친 뒤, 레핀 예술아카데미 데생과 조교수직을 맡고,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부교수가 되었습니다.

 

( △ 식민주의의 족쇄를 끊어버려라 /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 S. 한슈라의 초상-출처: KBS NEWS )

 

( △ 아내와 아들의 초상-출처: 제주 도립 미술관)

 

이후, 1953년 6월부터 1954년 9월까지 소련 사회의 리얼리즘을 도입하려는 북한의 요청과 소련 문화성의 명령에 따라 북한에 파견됩니다.

평양을 방문한 변월룡은 평양과 북한 전반적인 모습을 그림으로 남깁니다. 또한, 북한 화가들과 친분을 쌓으며 북한의 주요 명승지와 문화유적지를 방문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표적으로 '개성 선죽교', '박연폭포', '금강산 풍경', '금강산의 소나무'등이 있습니다.

 

( △ 개성 선죽교-출처: 스포츠 서울)

 

( △ 조선의 모내기-출처: 국립 현대 미술관)

 

북한에서 변월룡은 민간인 출입통제 구역인 판문점 현장답사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변월룡이 판문점을 방문한 1953년 당시는 휴전협정 체결과 포로교환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로, 이곳에서 판문점에서의 북한 포로 송환', ''1953년 9월의 판문점 휴전 회담장', '연병장', '판문점에서'등의 많은 작품들을 남깁니다.

 

( △ 판문점에서의 북한 포로 송환-출처: 국립 현대 미술관)

 

특히, '판문점에서의 북한 포로 송환'은 포로 교환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유일한 미술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림 속 인민군 포로들은 윗도리를 입지 않고 있는데, 이는 판문점을 지나 포로 교환 장소로 오는 트럭에서 '미국 놈들이 준 옷을 입고 조국으로 갈 수가 없다.'며 속옷만 남긴 채 모든 옷을 벗어서 길에 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한 출장의 목적으로 북한에서 2개월간 머무른 변월룡은 러시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북한 당국으로부터 직책 수행 임기 3년간 평양미술대학 고문 겸 학장으로 추대되어 더 오랜기간 북에서 머물게 됩니다.

 

( △ 평양미술대학교-출처: 조선향토대백과)

 

당시 평양미술대학은 전쟁으로 인해 평안북도 피현군 송정리로 옮겨 가 있는 상태로, 낡은 건물을 임시교실로 사용하고, 교실이 부족하여 일부 수업은 천막에서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열악하였습니다.  

또한, 미술교재도 없었으며 교수진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3-5년간 유학한 뒤 바로 교수가 되어 실력이 미흡했습니다. 이에 변월룡은 교수들의 석사과정 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실기와 소논문 발표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이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연구 성과를 공유하게 하여 전문적 교육과 자발적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일일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미술교재를 만들었으며, 잘못된 교육 프로그램 및 학년별 커리큘럼을 전문적으로 재수립 했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한국 고유의 전통 미술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동양화학과가 없었는데, 변월룡은 이의 중요성을 직접 당국에 역설하여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에 체류하며 변월룡은 예술가를 포함한 많은 유명인사들과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대표적으로 무용가 최승희, '새박사'로 알려진 김일성종합대학의 원홍구 박사, 문학가 홍명희, 이기영, 한설야, 연극배우 박영신, 미술이론가 한상진 등 많은 유명인사들과 교류를 가졌고, 친해진 후에는 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 △ 무용가 최승희 / 승무를 추는 최승희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 네이버 매거진 캐스트 )

 

 변월룡은 파견기간 약 15개월간 평양미술학교 설립에 관여하며 학장 및 고문을 역임하고 북한 현대 미술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귀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평양 미술대학의 토대를 마련하고, 잇달아 8.15 광복 9주년 전람회를 준비하던 변월룡은 결국 과로로 인해 이질에 걸렸고, 그를 간호하기 위해 소련에서 아내 제르비조바가 북한으로 오게 됩니다

이질: 시겔라(Shigella) 균에 감염된 상태를 의미하며, 대장소장을 침범하는 급성 감염성 질환으로 제1군 법정 전염병이다. 환자 또는 보균자가 배출한 대변을 통해 구강으로 감염되며, 매우 적은 양(10∼100개)의 세균도 감염을 일으킨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1억 6500만 명의 환자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되고(환자 중 69%가 소아), 2000년대 이전에는 이 중 0.5%가 사망하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최근에는 세균성 이질로 인한 사망이 감소하였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점차 건강을 회복한 변월룡에게 아내는 소련으로 돌아갈것을 간청했고, 변월룡은 북에 남아야하는 이유를 설득하며 갈등을 겪습니다. 결국, 잠시 소련에 돌아갔다가 미술 교재 및 수업에 필요한 자료, 그림 재료 등을 구해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변월룡은 북을 떠납니다.

하지만, 두,세달 뒤에 초청장을 보낸다는 북한 당국의 말과는 다르게 초청장은 오지 않았고, 과거 북한으로의 영구 귀국을 제안받았으니 거절했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더이상 북한을 방문하지 못하게 됩니다. 숙청자로 분류되어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고국 여행길조차도 막혀버리게 되었고, 김일성 주체사상이 확립된 이후 북한에서도 변월룡의 존재는 망각됩니다.

변월룡은 이후 북한과 가깝고, 자신의 유년시절을 보낸 연해주를 자주 찾으며 동판화로 그림을 남깁니다. 또한, 사할린을 방문해 한인들을 만나고 인물화를 그리는 등 고국을 그리워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 △ 풍경-출처: KBS NEWS )

 

( △ 금강산-출처: KBS NEWS)

 

 이렇듯, 평생 고국을 그리워했지만, 1년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냉전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에 가로막혀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한.러 수교를 4개월 남긴 1990년 5월 25일, 일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최근, 변월룡이라는 인물이 재조명되면서, 오랜기간 단절된 북한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문학계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광복 후 북한에 미친 소련의 영향과 같은 연구가 미술계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북한 미술사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통일 후 더 많은 변월룡의 작품을 남과 북 모두에서 볼수 있길 바라며 이상으로 제9기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유수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