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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의주'가 들려주는 역사이야기

의주가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안녕하세요? 통일부 상생기자단 4기 지민구기자입니다.

북한의 지역사 시리즈를 시작한지 어느덧 세 번째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평양과 개성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의주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의주와 신의주의 기묘한 동거

 

의주는 중국 만주지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지리적인 특성상 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바로 의주에 대해 자료조사를 시작하려는 찰나 저는 한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북한 행정구역상에 이미 의주(義州)가 존재했지만, 새로운 의주라는 뜻을 가진 신의주(新義州)라는 지명도 함께 있었던 것이지요. 어째서, 의주라는 지명이 두 곳이나 생기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100여년 전, 구한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합니다.

 

때는 1906년, 러·일 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일본이 조선을 집어 삼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시기였습니다.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를 침략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의선(서울과 의주를 연결하는 기차선)을 부설하였고, 그때부터 일본인이 점차 정착하기 시작하여 커다란 거주 지역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각종 관청 및 주요 시설이 들어서고, 개항장으로도 지정되면서 이 지역이 행정·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하는데요. 그 결과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던 의주 지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현재까지도 신의주가 국경지역의 최대 중심도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 입니다. 의주가 쇠퇴하고 신의주가 급속히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 바로 그 속에는 일제의 침탈 야욕이 숨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의문점도 해결해 보았고 하니 본격적으로 의주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세치의 혀로 드넓은 땅을 얻다

 

삼국시대, 고구려 영토에 속했던 의주는 고구려의 패망 이후에는 발해의 영토에 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발해가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자, 이 지역은 북방 민족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얄궂은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이후에 후 삼국을 통일한 고려왕조가 등장하지만 이미 강성해진 거란족의 위세 때문에 과거 고구려·발해왕조의 북방영토를 회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이렇게, 의주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멀어지는가 싶었지만 한 장군의 뛰어난 언변 덕분에 의주는 다시 한민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바로, 거란족의 제 1차 침입 당시, 군사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외교력으로 북방의 강동 6주를 되찾아온 ‘서희 장군의 담판’이 이루어졌던 것이지요.

 

결국 고려는 거란족의 인정을 받고, 994년에는 이 지역의 여진족을 완전히 몰아내고 압록강 연안으로 진출하여 6주를 설치하게 됩니다(당시에는 의주 지역이 흥화진(興化鎭)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족은 고려의 강동 6주 지배를 순순히 인정하지 못하고 대군을 파견하여 고려로 침입하는데요. 이때 강감찬 장군의 활약으로 흥화진전투(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덕분에 강동 6주의 반환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고, 이 때부터 의주 지역은 한민족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3. 충신과 역적의 갈림길에서, 위화도 회군

 

원나라 쇠퇴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신흥 무인 이성계, 그는 북방지역에서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몰아내고 남부해안지역에서는 왜구를 소탕하면서 큰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어느덧 그의 위세는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던 최영 장군을 넘어서 왕권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는데요.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원나라의 쇠퇴기를 틈타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지역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동정벌론’에는 순수한 영토 회복의 의도보다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요. 이를 간파한 이성계는 요동정벌군을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 요동정벌의 4대 불가론(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3.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의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다 4.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을 제기하며 ‘개경으로 회군’이라는 반역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성계의 이 모습은 마치 로마의 명장 카이사르가 이탈리아 반도의 루비콘강 앞에서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로마로 진군한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요? 어찌되었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수도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비롯한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이성계는 우왕을 쫓아내고 창왕을 왕위에 앉히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을 기념하는 사당이 남아있다고 하는군요.

 

 

 

 

 

 

 

4. 대륙으로의 모든 길은 이 곳에서 부터 시작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격언에도 나타나 있듯이, 고대 로마제국은 탄탄한 도로망 구축을 통해 전 유럽을 지배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강을 이용한 해상운송이 발달하면서 육상 도로망은 사실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육로교통이 홀대받는 가운데도 국가의 특별한 관리를 받는 조선 제 1의 도로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의주대로’입니다.

 

의주대로는 조선의 수도 한양과 의주를 연결하는 길을 의미하는데요. 당시 천하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수도 북경과 직접 연결되는 가장 빠른 육상통로였기 때문에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차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왕의 어명을 받은 많은 사신들이 이 길을 통해 중국을 왕래하였고,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경제 교역이 이루어지는 주요 통로로서 활용되며 문화교류의 기능까지 담당하게 됩니다. 이만하면 일개 도로가 한 국가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었는지, 짐작할 만 하죠?

 

자, 이러한 의주대로를 통해 큰 혜택을 누린 집단이 있는데요. 최인호씨의 소설 『상도』와 이를 원작으로 재구성된 MBC 드라마 『상도』에 등장한 동양최고의 거상 ‘임상옥’을 기억하시나요?

 

 

 

사실 임상옥은 픽션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수차례나 등장하는 실존인물인데요. 그도 의주대로를 통한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혜택을 누린 ‘의주상인(만상灣商)’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조선 전기만 해도 중국과의 무역이 국가 사이의 조공무역으로만 존재했고, 개인과 개인간의 사무역은 일체 금지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상업의 발달과정에서 중국과의 무역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의주를 중심으로 한 만상(의주상인)들에 의해 중계무역의 형태로 사무역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서 ‘개성이 들려주는 역사이야기’편 에서 개성상인(송상)에 관해서 이야기 했었는데요. 의주상인들이 중국시장의 물건을 구매하고 국내 시장에 보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면 개성상인들은 국내 시장에서의 직접적인 판매를 했다고 합니다.

 

 

바로 『상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임상옥은 의주에서 일개 점원으로 시작하여 청나라 상인의 방해와 견제를 깨뜨리고 자신만의 경영철학으로 막대한 재화를 벌어들여 동양 최고의 거상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그렇게 벌어들인 재화를 빈민구제에 사용하여 벼슬을 받기도 했다는군요.

 

5. 철마는 언제까지 멈춰있어야 하는가

 

 

 

 

젊음의 거리 신촌,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지만 신촌역을 지나는 경의선 열차가 가진 분단의 아픔을 생각해본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까요? ‘경의선’은 말 그대로 서울과 의주를 연결하는 철도로서 분단 이전까지만 해도 한반도 교통의 큰 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경의선을 타고 갈 수 있는 곳은 파주 임진각까지입니다. 그곳에는 경의선을 힘차게 달리던 ‘철마’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한 마디 소망이 깊게 새겨져 있죠. 철마는 달리고 싶다 Let the iron horse run again. 우리의 철마는 언제까지 저 곳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요. 힘차게 달리는 철마와 함께 경의선을 가로지르는 가슴벅찬 상상을 해보며 이번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