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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우리나라와 북한과의 스포츠 외교 역사

 

 

 

이달 초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가 확정 되었는데요. 23기로! 드디어 이루어낸 국민 염원입니다. 올림픽 유치가 국가 브랜드 향상, 경제 발전 등 대한민국에 미칠 영향력을 기대하며 연일 언론에서도 동계올림픽 유치를 자축하고 있고, 범국민적 관심이 모두 평창 동계올림픽에 쏠려 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통해 얻은 성과는 한둘이 아닙니다. 올림픽 유치를 통한 경제적인 효과, 동계스포츠 발전 등 직접적인 이익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이번을 계기로 한국의 스포츠 외교가 다시 한 번 세계 무대로 거듭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 무엇보다 가장 컸습니다. 비록 2번의 유치 실패가 있기는 했지만 끊임없는 도전과 치밀한 전략, 전방위적인 노력이 지방 소도시의 올림픽 개최라는 성과로 이어지면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럼, 평창 올림픽 유치 성공과 함께 요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스포츠 외교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하죠.

 

스포츠외교 스포츠를 국가 간의 정치, 외교 등에 이용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포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스포츠 참여자는 전형적으로 특정 사회조직을 대표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스포츠를 매개로 국내 정치를 반영해 외교에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스포츠 외교를 통하여 각 국 간 이해관계가 완만해진 경우가 적지 않고, 우리나라 또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적대국 관계를 유지해 온 중-미 관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인 핑퐁외교는 스포츠외교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는데요. 1950년 한국전쟁 때 중국이 북한에게 군사적 지원을 했기 때문에 미국은 중국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고 대중국 금수조치 등 경제봉쇄정책으로 국제사회에서 중국을 고립시키는 외교정책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19691월에 출범한 닉슨 행정부는 당시 소련에 대치하는 뒷심이 필요했고,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역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소련과의 관계를 대등하게 만들고, 국제적인 고립을 피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두 나라간의 이해가 맞아 1971410일 미국 탁구 선수팀이 중국을 방문하게 되는 역사적인 '핑퐁외교'가 시작되었습니다. 328일부터 일본 나고야에서 열리고 있던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석 중이던 중국 대표팀이 미국 대표팀을 초청할 뜻을 비췄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양국은 북경에서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탁구 경기를 가졌고 이는 미-중 관계를 크게 호전시켰습니다. 이후 미-중 관계는 급진적으로 발전했고, 미국은 197812월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고 이듬인 197911일 중국과 수교하게 됩니다. 결국 2.7g의 작은 탁구공이 국제 외교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핑퐁외교 수립 30주년을 기념해 탁구를 치는

                                               헨리키신저(오른쪽)과 중국 대표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스포츠를 매개로 북한과 어떤 교류를 해왔을까요?

의외로 지금까지 교류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종합대회가 아닌 국제대회에서 지금까지 남북한이 의견차를 좁혀 실제 단일팀을 구성한 것은 탁구와 축구에서 단 두 차례뿐입니다. 1964년의 제18회 도쿄올림픽대회에 단일팀으로 출전하는 문제를 놓고 북한이 먼저 회담을 제의했고, 남측은 이 제안을 수용하여 4차례의 체육회담이 개최됐었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기득권 싸움에 결국 단일팀 구성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북은 전례 없이 빈번히 만나 체육교류에 관한 논의를 하게됩니다.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1988년5679 서울 올림픽,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 등을 거치며 화해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이어 91212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제4차 남북체육회담에서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뜻밖의 결과가 도출됐습니다. 따뜻한 통일의 바람을 타고 단일팀이라는 새로운 시도가 시작된 것이지요. 개인종목 탁구에서 단일팀을 구성해 세계선수권 대회에 출마,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단체종목인 축구에서도 단일팀이 결성되었는데요, 선수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야 경기를 잘 풀어나갈 수 있는 단체종목의 특성 때문에 당시 개인종목 단일팀보다 더 많은 관심과 기대가 쏟아졌습니다.

 

19914월 일본 치바에서 열린 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6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 선수들이 단일팀으로 참가하였고, 여자탁구는 16년간 8회 연속 우승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중국을 꺾고 단체전 우승을 거머쥐었고, 청소년 축구는 8강 진출이라는 값진 성과를 얻었습니다.

 















<남북 단일팀 논의를 위한 회담 장면>

 




<1991 남북 단일팀 여자탁구 우승 시상식 장면>

 

 

20006ㆍ15 공동선언으로 조성된 남북 화해, 협력 분위기는 남북 체육교류에서도 양적, 질적인 많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남북이 동시입장을 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였죠. 남측과 북측의 기수가 함께 한반도기를 들고, 선수들 역시도 한반도기를 흔들었습니다.

 

한반도기는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지도를 그려넣은 깃발로, 남북이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후 남북이 함께 참가하는 체육대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2006 도하 아시안게임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동시입장은 없다고 합니다.

 

 

 

 

남북 스포츠 교류를 통한 정책적 기능은 순기능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스포츠 외교의 정책적 기능에 관한 연구; 윤여경) 첫째, 남북 스포츠 교류의 명시적 순기능은 남북 화해협력 및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남북 스포츠 교류는 기존 남북 간 갈등과 긴장을 해소하고 민족의 동질성과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남북 간의 통일을 저해하고 있는 것은 영토를 갈라놓은 휴전선뿐만이 아니라 상호 간에 자리 잡고 있었던 불신의 장벽이었습니다. 스포츠 교류는 운동선수, 스포츠 관계자, 응원단의 직접적인 접촉뿐만 아니라 언론매체를 통한 중계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의 앙금을 풀면서 하나가 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 남북 스포츠 교류는 잠재적인 순기능을 갖습니다. 남북 간 스포츠 교류의 제도화를 구체화 할 경우 이것은 남북 간 제도적 통합의 단계로 발전되어 결국 정치적인 통일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즉 남북 간 일상적인 사회기능의 통합 필요성이 증가되게 되어 상호간의 연대가 발생하게 되면 전쟁이나 물리적 힘을 배제하는 소극적 평화를 넘어서서 적극적인 평화인 통합단계로 나아가게 될 가능성이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스포츠와 올림픽에 대한 남북의 기본적인 입장차이로 다른 회담들과 별다른 차이 없이 정치적 선정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민간차원의 활발한 체육교류를 지속적으로 하고, 대외적으로도 올림픽 단일팀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계속한다면 스포츠만이 가지는 교류와 화합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세대를 뛰어넘어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료 출처>        단일팀과 민간교류 활성화가 과제(민족21 허재철 기자)

                         스포츠외교의 정책적 기능에 관한 연구(고려대학교 윤여경)

                         동아일보(1991.02 기사 사진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