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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함흥이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함흥이 들려주는 역사이야기

 

오늘도 어김없이 ‘통일 미래의 꿈’을 찾아주시는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상생기자단 4기 지민구 기자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더위에 시달렸었는데, 갑자기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환절기에는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는 사실. 잊지 않으셨죠?

 

이번시간에는 북한의 지역사 시리즈 네 번째를 맞이하여 평양, 개성, 의주에 이어

‘함흥’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함경남도에 위치한 함흥(咸興)은 함경산맥의 줄기가 이어져 있어 대부분의 지형이 산지로 이뤄져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경산맥과 낭림산맥으로 둘러싸인 관북 제 1의 곡창지대 ‘함흥평야’ 덕분에 농업 생산력도 상당했다고 합니다. 또한, 동해와 인접해 있는 지리적 특성상 어업의 발달도 두드러졌다고 하네요.

 

그런데 사실 함흥은 평양이나 개성처럼 한 나라의 수도였던 것도 아니었으며, 의주처럼 활발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던 곳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흥에 집중해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관객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하면서 조연배우를 통해서도 큰 재미와 감동을 얻듯이, 함흥 지역은 역사라는 무대에서 비록 주연은 아니었으나 그 무대를 한층 더 훌륭하게 만들어준 조연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입니다.

 

자, 본격적으로 함흥의 지역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침없는 청년군주 진흥왕과 마운령비

 

  

약 1세기 무렵, 만주지역을 거점으로 급속도로 성장한 신흥국가 고구려는 주변 국가 정복을 통해 차츰차츰 영토를 넓히고 있었는데요. 함흥은 이 시기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 후 몇 세기가 지나도록 함흥은 별다른 역사의 소용돌이 없이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데요. 그러나 6세기에 이르러서는 거대한 폭풍이 함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약체로 평가받았던 신라는 법흥왕 재위기에 불교 수용과 율령 반포를 계기로 내실을 다졌고, 그 뒤를 이어 진흥왕이 재위에 오르며 전에 없었던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불과 열 살이 되지 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진흥왕은 열정적인 젊은 군주답게 왕성한 정복활동 시작하는데요.

 

한반도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 한강 유역을 백제로부터 빼앗은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보복하러 쳐들어온 성왕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야연맹의 맹주 대가야를 복속시켜 영토를 확장시키고 군대를 강화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의 영토로 진군하기도 하는데요. 진흥왕의 진출을 통해 신라의 영토가 지금의 원산만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정력적으로 정복활동을 진행했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진흥왕은 자신이 개척한 땅에 순수비(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를 세워서 후대 역사가들에게 많은 연구자료를 남겨주기도 했는데요. 우리는 그 중에서도 ‘마운령비’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마운령비는 이원군 마운령이라는 산 고개에 위치하였으나 현재는 함흥에 위치한 ‘함흥역사박물관’에 옮겨져서 보존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마운령비가 진흥왕이 지금의 함흥 지방을 포함한 함경남도 지방을 정복했다는 결정적인 역사적 증거입니다. 발견 당시 비문이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어서 대부분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곳을 정복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 그리고 지역 민심을 살피고 공로자들을 포상한다는 내용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제왕건호’ ‘짐’ ‘순수’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신라인들의 자존의식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지금의 함흥지방까지 진출한 진흥왕의 업적으로 말미암아 신라인들은 자신들도 삼국의 패권을 손에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같은 자존의식이 삼국통일을 향한 첫 발걸음이 되었던 것이죠. 지금도 함흥지방을 찾으면 청년군주 진흥왕과 위풍당당한 신라군사들의 함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2. 쌍성총관부, 그리고 조선 건국의 발원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그가 처음부터 대단한 세력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고조부 ‘이안사’라는 인물은 원래 전주지역의 향리였는데 고려의 원나라 간섭기에 가족들을 이끌고 쌍성총관부 지역(지금의 함흥·흥남지역)으로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의 직접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이었는데요. 이성계의 고조부와 조부, 그리고 아버지는 대대로 원나라의 지방관리로 임명되어 지역의 세력가로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쌍성총관부는 고려의 중앙과는 거리가 먼 변경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집안이 중앙 무대에 진출할 기회는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데요. 바로 원·명 교체기를 틈타 반원 정책을 고수하던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려 했던 것이죠. 이 때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공민왕에 협력하여 고려의 수복 활동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고 이자춘은 그 공로로 벼슬을 받아 큰 세력가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성계는 바로 함흥지역에서 실력을 쌓고 시작하여 종국에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함흥 지역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고 칭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3. 함흥차사,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자들

 

 

 

 

 

우리나라에서 널리 쓰이는 사자성어 중에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한문 그대로 해석하면 함흥으로 떠난 차사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사실 그 내면에는 한 번 떠난 사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는 조선 건국 초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그에게는 본처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이 6명이나 있었습니다. 그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할 당시의 나이는 이미 58세, 그렇기 때문에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가 언급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원칙상으로는 첫째 아들이 그의 후사를 이어야 하겠으나, 불행히도 장남 이방우는 조선 건국 1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장남의 죽음으로 후계자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두드러졌던 인물이 5남 이방원이었습니다. 이방원은 문·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아버지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헌을 세웠고(선죽교에서 고려 최후의 충신 정몽주를 살해한 사건은 그의 대표적인 공적이었죠), 그 명성과 공로를 발판으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야망은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2명의 아들을 낳으면서 위기를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을 건국하기도 전에 조강지처를 잃은 이성계는 신덕왕후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는데요, 그녀가 아들을 낳자 형제 서열을 불문하고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이 같은 이성계의 결정은 왕자들 간의 불화의 씨가 되었고 제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건국공신 정도전과 신덕왕후의 아들 방번, 방석이 살해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고령의 이성계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2남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제 2대 왕 정종) 자신의 고향 함흥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방간과 박포가 일으킨 제 2차 왕자의 난이 이방원에 의해 진압되면서 그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정종은 즉시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고 재위 2년 만에 왕위를 양위하기에 이릅니다. 멀리 떨어진 함흥에서 이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이성계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고 하는데요. 이방원(태종)이 왕위에 올라 자신의 아버지를 모셔오고자 함흥으로 사자(使者)를 보냈으나 이성계는 이방원의 사자들을 활로 쏴 죽였다고 하여 함흥으로 떠난 사자들은 돌아오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함흥차사(咸興差使)’가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함흥차사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대부분 야사를 통해 전해지는 내용이라고 하며 조선왕조실록 등의 공식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이성계를 방문하고 멀쩡히(?) 돌아오는 사자도 있었다고 하니,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역사만이 알고 있겠지요.

 

4. 함흥냉면에 관한 이야기

 

 

 

 

북한을 대표하는 음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사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의 냉면과 같이 국수를 차가운 육수와 함께 먹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면을 뜨거운 국물과 함께 먹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냉면의 기원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냉면(冷麵)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세기 초에 이르러서 인데, 그 문헌에서 조차 냉면의 맛이 새롭고 독특하다는 것을 보아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냉면은 보편적인 음식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냉면이 문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이후부터였습니다. 유명한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저서에는 냉면을 맛있게 먹는 법이 서술되어 있다고 하네요.

 

“차가운 육수에 면발만 있으면 다 같은 냉면 아니야?”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사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관서지방(평양)과 관동지방(함흥)의 구분만큼 그 맛에서도 확연한 차이가 나타나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두 냉면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 비밀은 바로 면을 만드는 재료에 숨어있습니다. 평양냉면은 메밀과 녹말을 섞어서 면발을 뽑아내지만 함흥냉면은 감자와 녹말을 섞어서 면을 뽑아내었던 것이죠. 사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감자가 재배된 곳이 바로 함경도입니다. 지형적인 특성상 메밀을 재배하기 어려웠던 함경도에서는 19세기에 전해온 감자를 원료로 하여 면을 뽑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함흥냉면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회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냉면 위에 홍어회 등을 넣어서 비벼 먹는 것이 별미라고 하는데요. 직접 함흥을 방문하여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통일이 이루어지면 냉면으로 유명한 평양·해주·함흥 등을 방문하며 냉면 맛을 비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마도 그것은 통일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소소한 즐거움일지도 모릅니다.

 

 

 

이번시간에는 함경도에 위치한 함흥의 지역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현재 함흥시는 주변의 흥남이나 원산에 비하면 그 발전 속도가 더딘 편입니다. 하지만 ‘함경도’라는 지명의 유래가 함경도에 위치한 유명한 도시 ‘함흥’과 ‘경성’을 합쳐서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 아직도 함흥은 관북지방의 중심도시로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통일이 되면 나진·원산 지역과 함께 동해안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중심 도시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과거 함흥이 ‘조선 건국의 발원지’가 되었듯 앞으로는 ‘통일한국 발전의 발원지’가 될 것을 기대해보며 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