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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쫑알쫑알 수다방

[6월의 테마:6ㆍ25 남북전쟁 60주년]두번째 이야기

 

 



세계의 DMZ를 가다

 

아직까지도 무력분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가 한반도(the Korean peninsula)는 북위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여 남과 북으로 갈려 있습니다. 정전 협정에 의해 합의된 군사분계선으로부터 쌍방이 각기 2km씩 후퇴함으로써 남방한계선으로부터 북방한계선까지의 구간을 비무장지대(DMZ)라 하는데, 명칭에서 드러나듯 비무장지대 내에서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감행하지 못할 뿐더러 지역 사령관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접근도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DMZ는 우리 한반도에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1. 중동지역의 시리아 - 이스라엘 간의 비무장지대(DMZ)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악연은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1948년 5월 건국을 선포하면서 비극의 전쟁사가 시작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리를 잡고 건국을 선포하자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 5개국이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입장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공격을 감행합니다.

 

물론 이 1차 중동전쟁에 참가한 5개국 중 하나가 시리아입니다. 하지만 시리아 등 아랍권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했고, 시리아는 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츠하크 라빈의 이스라엘군에 골란고원을 빼앗깁니다.

시리아가 이에 이를 갈며 기회를 엿보는 것은 당연지사. 결국 골란고원을 되찾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시리아는 1973년 이집트와 함께 이스라엘에 기습 공격을 실행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4차 중동전쟁인 욤 키푸르(유월절) 전쟁에서도 골란고원을 되찾는 데 또 다시 실패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이후 10여 차례 UN 결의를 무시하고 1981년 골란고원을 자국 영토로 합병하려는 정책을 취합니다.

 

98년에는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골란고원의 반환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대규모 공격하면서 이러한 약속은 또 다시 무산되는 과정을 거쳤고, 2001년 이스라엘에 강경파인 아리엘 샤론 총리가 취임하면서 시리아를 비롯한 아랍권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 끝에 결국 2001년 4월, 이스라엘은 레바논 내의 시리아 공군 기지를 공격하는 행동을 했는데요. 이는 시리아가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를 지원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위의 지도에서 붉은 색으로 색칠된 DMZ는 1973년 욤 키푸르 전쟁(Yom Kippur)에서 확정된 것으로 아직까지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지도라고 보입니다. 이들의 비무장지대는 우리의 것과는 달리 UN의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제62호)을 통해 확정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2. 콜롬비아의 비무장지대(DMZ)                                                               

                                                                             

 

내전을 해결하거나 평화롭게 완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비무장지대가 설정된 예도 있었습니다. 남미의 콜롬비아에 존재하는 비무장지대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처럼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war)이 아닌 내전(internal conflict)이 원인으로 발생했다는 점이 흥미로운 점입니다. 콜롬비아는 탈 냉전기 이후에도 반정부 게릴라가 그 세력을 떨치는 많지 않은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콜롬비아에서 활동했거나 활동 중인 게릴라 단체는 1964년 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족해방군(National Liberation Army or Ejercito de iberacion Nacional: ELN)과 1966년 결성된 콜롬비아 혁명군(Revolutionary Armed Forces of Colombia or Fuerzas Armada Revolucionarias de Colombia: FARC), 1973년 결성된 M-19(The April 19 Movement) 등이 있습니다. ELN은 반미, 마오-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본이념으로 산업시설 국유화, 토지 몰수, 농촌 개혁 등을 통해 인민 정부 설립을 목적으로 창설되었습니다. FARC는 콜롬비아 공산당 산하 무력부로 창설되었으며 콜롬비아 및 남미 전체의 반군 단체 중 가장 큰 규모로 장비와 훈련 상태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좌익 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하며 초창기부터 반미와 반정부주의를 표방해 오고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여러 콜롬비아의 대통령들은 내전을 종식시키려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998년 새로 선출된 파스트라나(Pastrana)대통령은 좌익 게릴라와 평화 회담을 열어 FARC에게 위 지도상 노란색에 해당하는 크기의 영토에 비무장지대를 설정했습니다. 허나 비무장지대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반군 단체들은 군사훈련을 지속하고 마약 거래를 하는 등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위 비무장지대를 2002년에 공식 폐지하게 됩니다. 

 

 

3.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비무장지대(DMZ)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침공함으로써 페르시아 만 전쟁 (Persian Gulf War)이 유발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국경선 확정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국경 분쟁을 겪었던 바가 있었는데 분쟁지역 가운데 특히 페르시아 만 어귀에 위치한 부비얀 섬은 전략적인 요충지로서 이라크의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와의 국경선 확정 협상에서 이 지역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협상 자체를 포기하면서 무력 침공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급습했으며, 8월 8일에는 쿠웨이트를 공식적으로 병합합니다. 이에 UN의 안전 보장 이사회는 8월 3일 이라크에게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8월 6일에는 무역 금지 조치를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뒤이어 미국군과 NATO 동맹군, 여러 아랍 국가들의 군대가 주변국에 파병되었고 이라크에 대한 무력 사용을 경고했음에도 이라크 군대가 철수를 거부하자, 위의 다국적군은 결국 1991년 1월 16~17일 페르시아 만 전쟁을 개시하여 2월 27일 쿠웨이트 시를 탈환합니다. 전쟁은 이라크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고 쿠웨이트는 독립을 되찾았으며, UN의 이라크에 대한 무역규제 조치는 종전 뒤에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위의 비무장지대는 1991년 4월 3일에 유엔안보리 결의안(제687호)에 의해 설정된 비무장지대로서 유엔 감시단(UNIKOM)에 의해 관리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비무장지대를 살펴보았습니다. 비무장지대란 결국 무력 분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가슴 아픈 현실을 체감할 수 있었는데요. 다음 편에서는 독일과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 등에 대해 주로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