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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이야기/통일부는 지금

북한을 제 집처럼 드나든 한 남자의 이야기

 

북한을 제 집처럼 드나든 한 남자의 이야기

[최고기록 공무원이 사는 법 ③] 통일부 김기혁 서기관
북한 방문 57회…개성공단 실무작업 위해 1년간 체류도

 

공무원하면 어떤 단어들이 떠오르냐고 질문하면, 대개 ‘행정편의주의’ ‘철밥통’이라고 답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만 만들어낸다는 인상이 여전히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공무원들이 있다. 모든 열정을 불사르며 일반인도 깜짝 놀랄 만한 일들을 묵묵히 해 낸 사람들이다. 지난 11월 행정안전부는 바로 이런 공무원 94명을 ‘최고기록공무원’으로 선발했다. 이색 분야에서 일하며 묵묵히 국민의 재산과 안전을 지키는 이들을 만나봤다.<편집자>

2004년 2월 15일. 서울 소공동 한 백화점에 구름떼 같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른바 ‘통일냄비’를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스테인레스 냄비였다. 하지만 그토록 사람들의 이목을 끈 까닭은 그것이 북한 개성공단에서 만들어져 과거 수십년동안 가로막혀있던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냄비라는 데 있었다. 개성공단도, 통일냄비도 사람들에게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7년 5월 17일. 한반도 허리의 동쪽과 서쪽에서 열차 기적 소리가 울렸다. 분단으로 끊어져 있던 경의선과 동해선이 연결돼 시험운행을 하는 현장이었다. 오전 11시 30분께 남한의 문산역을 출발한 경의선 열차는 임진강역, 도라산역 그리고 군사분계선을 지나 오후 1시 북한의 개성역에 도착했다. 같은 시각 동해선에서는 북측의 금강산역을 출발한 열차가 삼일포역, 감호역을 거쳐 남측 제진역에 당도했다. 비무장지대 안에서 수십년간 멈춰서 있던 철마의 오랜 꿈이 이뤄지던 순간이었다.

2009년 12월. 이젠 사람들에게 개성공단도, 경의선·동해선 철길 복원도 더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사람들 사이에 계속 회자됨으로써 어느새 우리에겐 낮익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남모르게 고생한 이가 있다. 북한을 제집 드나들 듯 오가며 그 토대를 닦아온 통일부 김기혁 서기관이다.

북한지역 최다 방문 공무원, 통일부 김기혁 서기관.
 
허허벌판을 어엿한 공단으로…개성의 불을 밝히다

김 서기관의 첫 공직생활은 1994년에 시작됐다. 남북 경협 활성화 논의가 막 시작되던 때였다. 당시 행정고시 재경직 사무관으로 연수를 마친 그는 재경직 사무관으로는 드물게 통일부에서 공직에 입문했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에 관심이 있던 그였기에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고생길’의 시작인 줄은 미처 몰랐다.

“정부 청사가 위치한 서울 경복궁역에서 상계동으로 가는 막차가 몇 시에 있는 줄 아십니까? 12시 16분입니다.” 김 서기관은 임용 후 첫 업무로 개성공단 준비 실무를 맡았다. 덕분에 야근을 밥 먹듯 했고, 그의 퇴근은 언제나 막차와 함께 했다. 막차를 놓치는 날이면 청사 인근 사우나 시설 등에서 쪽잠을 자야했다. 

고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개성공단 공사가 시작되면서 김 서기관은 아예 1년을 북한 땅에서 살았다. 개성공단을 가동시키기 위한 실무 작업을 북한 측과 조율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개성은 전기가 충분치 않아 백열등 불빛이 껌뻑껌뻑하는 곳에서 북측과 협상을 벌여야했습니다.”

당시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안은 임금 문제였는데, 북측은 숙련 정도에 따른 노동자별 임금 격차를 미화 10달러로 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초과근무 등을 감안할 때 저임금을 찾아 개성공단을 찾은 우리 기업에는 전혀 이득이 될 게 없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무조건 1달러를 주장했습니다. 결국 협상은 2달러에서 마무리됐고, 이는 개성공단에 입주한 우리 기업들이 선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됐습니다. 이 협상으로 아직도 북측이 저를 욕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성공한 우리 기업들을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큰 보람도 없을 것입니다.”

개성공단의 2003년(위)과 2009년 모습. 김기혁 서기관은 개성공단의 변화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라고 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보람이 컸던 만큼 고통도 컸다. 1년 동안 북한에 체류하면서 그리운 가족을 볼 수도, 정해진 공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 들어가고 한 3개월쯤 지나면서 함께 생활하던 동료들 사이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들 혈압이 오르고, 말라리아나 디스토마 같은 풍토병에 걸리고 이유없이 아파했어요.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받으면서 나오는 마음의 병이었습니다.”

김 서기관 역시 어느날 혈압이 오르고 안압이 높아져 남한으로 긴급후송된 적이 있다. 하지만 병원에서 아내 얼굴을 보자마자 거짓말처럼 씻은 듯 나았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멈춰선 철마를 달리게 하다

개성에서는 1년간을 보낸 김 서기관은 남한으로 돌아온 후 다시 경의선·동해선 등 철도·도로 연결 사업에 투입됐다. 체류까지는 아니었지만, 사흘이 멀다하고 북한을 오가야 하는 일이었다. 분단으로 수십년간 멈춰있던 철마가 다시 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경의선과 동해선 개통일이 2006년 5월 25일로 잡히면서 하루하루 기대도 높아졌다.  

“당시 제 일정을 살펴보면 가히 살인적이었습니다. 오전에 경의선 남측 문산역에 도착,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판문점역, 개성역 등을 차례로 돌아보며 자재나 설비 등 공사에 문제는 없는지 살피고 오후 2시에 다시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남으로 옵니다. 그리고는 한반도를 가로질러 열심히 차를 달려 다음날 오전 9시 동해선 쪽 군사분계선을 넘습니다. 감호역, 금강산역 등 동해선의 북한 현장을 점검하는 일이었죠. 그땐 몰랐는데 당시 북측 담당자는 우리와 같은 일정을 소화하다 차 사고로 2명이 숨지기도 했다는군요.”

뉴스에는 나오지 않았던, 경의선·동해선 철도가 연결되기까지의 숨겨진 스토리이다.

김 서기관은 그렇게 경의선이 연결되고, 2007년 5월 시험운행될 때 남측 인사들과 함께 열차에 올랐다. 서서히 열차가 움직이고, 드디어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 열차 안에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가 울려퍼졌다. 손에는 한반도기를 든 이들의 눈물 섞인 합창이었다. 김 서기관의 마음도 순간 뭉클해졌다.

경의선, 동해선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일인 2007년 5월 17일 오후 개성을 출발한 열차가 임진각을 지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북한 방문 57회 … “하루빨리 누군가 내 기록 깨줬으면”

지금껏 김 서기관은 총 57회 북한을 다녀왔다.  행정안전부가 인정한 최다 북한방문 공무원이다. 개성공단 실무작업을 위해 북한에 체류했던 1년은 아예 제외했다. 하지만 김 서기관은 자신의 기록이 오래 유지되길 원하지 않는다. 하루빨리 남북관계가 좋아져 자신의 후배들이 부지런히 북한을 오가며 자신의 기록을 깨주길 바라는 것이다.

“개성공단에 가보면 그곳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들의 얼굴이 3개월만 지나도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처음에는 남한 노동자들과 달리 피부색도 더 검은 듯 해보였는데, 함께 일하고 밥먹고 생활하다보면 어느새 같은 모습이 되는 거죠. 그런 것을 보면 통일도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북한을 제 집들 듯 했던 남자, 그는 오늘도 같은 동포로서 남북한이 함께 웃으며 지내는 날이 오길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