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통 베스트

북한의 숨은 권력, 김정숙ㆍ김경희는 누구?

 

  안녕하세요~ 상생기자단의 조유미 입니다.

 북한의 새로운 미래 지도자로 지목받은 김정은을 후견하는 후견인이 김일성의 딸이자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김경희는 남편 장성택과 함께 미래의 북한에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할 실세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김경희보다 더 북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여성은 누가있을까요? 바로 김정일의 생모이자 김일성의 첫번째 부인인 김정숙입니다. 오늘은 북한사회에 살아서, 죽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성 김경희와 김정숙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 김정숙 선전 삐라 출처 ; www.fotoya.net> 

 

 

김정숙

 

김정숙은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생모로 1917년에 태어나 1949년 33살의 나이로 아기를 낳다가 사망했습니다. 때문에 실상 북한 사회보다는 일제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런 김정숙이 그의 아들 김정일이 김일성 후계자로 등장한 이후부터 북한 여성들이 따라 배워야 할 귀감으로 미화되었습니다.

 

북한 선전자료에 의하면 김정숙은 1933년 부터 반일 활동에 참가하고 1935년 항일유격대에 관여했으며, 1937년 압록강 상류의 중국 영토인 창바이현(長白縣)에서 당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부대장이던 김일성의 지도 아래 조국광복회 지하공작 사업을 수행하던 중 일제에 체포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다시 항일유격대로 돌아가 김일성 부대의 작식대원(作食隊員)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지키는 등의 활약으로 인해 북한에서는「항일의 여성혁명가, 백두 여장군」등으로 우상시 되고 있습니다.

 

 

                                    < 김정숙의 업적을 기리는 그림 출처; www.kpaf.org>

 

  김정숙은 김일성과 결혼하여 1942년 2월 김정일을 낳았고 8ㆍ15 해방 후 평양에 돌아와서 딸 김경희를 낳았습니다. 북한에 돌아온 김정숙은 자녀교육에 힘쓴 한편 민주여성동맹의 창설 과정에도 참여했으며, 1949년 9월 22일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북한의 문헌들은 김정숙이 어떤 병으로 죽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지만, 사산아를 낳다가 죽었다는 것이 현재의 통설입니다.

 

  

 

                                                                 < 김정숙의 동상에서... 출처; 연합뉴스>


 

 북한은 김정숙을 우상화하기 위해 1968년 9월 함경북도 회령에 그녀의 동상을 세웠고, 1974년 같은 곳에 혁명사적관을 건립하였으며, 1981년 8월에는 양강도 신파군을 김정숙군으로 개칭했습니다. 김정숙의 생일인 12월 24일은 현재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취임일과 겹치며 북한의 기념일로 추대되고 있습니다. 

 

< 김일성의 딸이자 김정일의 동생인 김경희

 

김경희

 

 김경희(1946년 5월 30일 생)는 김정일(1942년생), 김만일(1944~1947) 다음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서 다음으로 태어난 외동딸입니다. 김경희는 3살 때 어머니 김정숙이 사망하자 빨치산 1세대 가족인 최광(전 인민무력부장)의 부인 김옥순과 류경수(전 군단장, 6·25전쟁 시 서울 최초 입성 탱크 여단장)의 부인 황순희(전 조선혁명관박물관장)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습니다. 8살 무렵에는 계모 김성애와 같이 살았는데 계모는 김정일과 김경희에게 잘 대해주었고, 김정일과 김경희는 이복동생(평일·영일·경진)들과도 청소년 시절에는 사이좋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경희는 평양인민학교, 남산고급중학교,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잠시 어학연수를 했습니다. 일부에서는 모스크바 대학에 유학을 했다고 하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 장성택 ;출처 시사IN>

 

 김경희와 장성택의 결혼 일화는 매우 극적입니다. 김경희는 장성택과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같이 다녔습니다. 나이도 1946년생으로 동갑입니다. 김경희는 장성택을 좋아하게 돼 둘이 연인관계로 발전했습니다. 그 소문을 접하고 김일성은 장성택의 가족 관계를 조사시켰는데, 장성택 아버지 쪽에 일부 문제가 있음을 알고 결혼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김경희가 강력히 반발하며 장성택과 계속 만나자 김일성은 장성택을 원산경제대학으로 보내버렸습니다. 그러나 김경희는 주말마다 직접 차를 몰고 평양에서 원산까지 올라가 장성택을 만났고 결국 김일성과 김정일은 이들의 결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김경희와 김정일 출처; magazine.hankyung.com > 

 

 김경희는 지난 2003년 9월 최고인민회의(국회) 제11기 대의원 기념 촬영을 끝으로 종적을 감췄습니다. 이후 김경희는 남편 장성택과의 불화, 친딸 장금송이 2006년 프랑스 유학 중 부모의 결혼 반대 문제로 고민하다가 자살한 일 등이 겹치면서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우울증 치료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김경희는 2009년 6월 김정일의 함남 함주군 협동농장 시찰 때 동행, 6년간의 공백을 깨고 다시 등장했습니다. 곧이어 '당 부장'직책으로 불리며 정치 무대에 공식 복귀했습니다. 이번엔 북한의 첫 '여성 대장'이 됐습니다.

 북한 소식통은 "김경희 재기는 김일성 가문을 의미하는 '백두산 혈통'이 후계자 김정은을 전폭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라고 했습니다. 김정일과 김경희는 각각 일곱살과 세살 때인 1949년 어머니 김정숙이 출산 중 사망한 이후 서로를 의지하며 계모 김성애 등의 후계 도전에 맞섰던 사이입니다.

 금번 당 대표자회를 전후한 김경희의 부상은 김정은으로의 후계구도에서 김경희가 앞으로 남편인 장성택과 함께 김정은의 강력한 후견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건강이 향후 5~7년간 유지된다면 김정은이 비교적 순조롭게 3대 세습권력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러나 5년 이내에 김정일이 사망한다면 김정은이 권력을 이어받더라도 안정적으로 장악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에 김경희와 그 남편인 장성택을 전면에 내세워 김정은을 돕고, 과도적 정권을 관리하려는 것입니다. 

 

 북한정권의 위기관리 능력은 지난 2008년 8월 김정일이 와병 상태에서 장기간(51일간) 등장하지 못했을 때 간접 확인되었습니다. 당시 절대 권력자인 김정일의 와병 중에도 북한이 큰 동요나 혼란 없이 평상시대로 유지되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에도 장성택, 김경희 등이 당 관료와 군 간부들을 지휘하여 이른바 안정적인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향후 김경희의 행보가 주목시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 모두 다음엔 더 좋은 기사로 찾아 뵙겠습니다~

 

 참고 :  주간조선 뉴스 weekly.chosun.com

 

 

 

 

 

 

 

 

 

                     이 기사는 2010/10/24, 다음 뷰 [사회]부문 베스트에 선정되었습니다.

더욱 유익한 콘텐츠로 찾아올 수 있는 통일 미래의 꿈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