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 운동과 북한
경기도 소재의 모든 고등학교가 내년부터 역사과목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한다고 경기도 교육청이 발표하였다. 역사 교과서가 2002년 7차 교육과정 때 선택 과목으로 지정된 지 정확히 10년 만에, 한국사(국사) 과목이 필수 과목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는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청소년들에게 우리나라 국가 정체성을 확립시키고,약해져있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긍정적인 영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에게 왜곡되거나 잘못 알려져 있는 역사와 근현대사가 바로 잡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 같은 소식은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의미 있는 기념일인 3ㆍ1절이 며칠 지난 3월 4일에 발표되었다. 3ㆍ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일본식민지 지배하에서 범 국민적으로 일어난 항일 독립운동으로 우리에게는 일본에 항거하여 전국적으로 봉기한 독립운동이라는 의의가 있으며, 그 영향력은 우리나라를 넘어 중국의 5ㆍ4 운동뿐만 아니라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부분의 청소년들 및 성인들까지도 3ㆍ1 운동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모른다는 모 언론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제 아무리 3ㆍ1 운동이라 할 지라도 역사 교육이 없이는 크게 인식되지 않음을 돌아볼 수 있었다. 때문에 앞으로 한국사 과목이 필수 교과목으로 지정된 만큼, 3ㆍ1 운동 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사가 한반도를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바르게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자유대한"에 실린 서울 3.1운동 시위 군중
그렇다면, 북한이 바라본 3ㆍ1 운동은 어떠한 모습일까? 북한은 3ㆍ1 운동을 포함한 모든 항일운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김일성이 참여한 항일무장 혁명투쟁만이 유일한 항일 투쟁 운동으로 인정하고 의미 있게 평가한다. 따라서 3ㆍ1 운동을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권을 위해 온 민족이 떨쳐 일어나 일제 침략자들 반대해 싸운 전 인민적 항쟁이었으며 민족의 기개를 과시한 거족적인 애국투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 운동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 절하하고 있다. 북한이 일제로부터 우리가 독립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3ㆍ1 운동을 평가 절하하는 이유는 김일성과 직접적인 연관을 찾을 수 없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3ㆍ1 운동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운동 자체를 김일성 가계와 연결하여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3ㆍ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종로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태화관에서 300미터 떨어진 탑골공원의 팔각정에서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이 시발점이다. 이날 독립선언서의 낭독이 끝나자마자 태극기가 휘날렸고, 만세소리가 종로 거리에 가득찼다.
3ㆍ1 운동 중 만세를 부르는 여성들
‘기미독립선언서 처음 내용 인용’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 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3ㆍ1 운동 자체의 시작을 종로의 태화관이나 파고다 공원이 아닌 평양이라고 교육시키고 평양의 청년학생들과 군중들이 숭덕여학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고 바꾸어 말하고 있다. 3ㆍ1 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평양의 숭실대학교 학생들로서 평양숭실학교의 학생인 김형직이 학교를 중퇴하기 전까지 학교에 다니면서 반일학생운동의 거점으로써 평양숭실학교를 이용하고, 결국 평양이 3ㆍ1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3ㆍ1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8살이었는데, 8살의 어린 나이로 3ㆍ1 반일 항쟁 시위의 대열에 참여하였다고 북한은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김일성이 8살의 어린나이에 시위 대열에 참여했는지는 실제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북한이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이면을 살펴보면 그 진실에 대하여서는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
북한이 3ㆍ1 운동을 평가절하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김일성이 직접적으로 활약하기에는 너무 어린나이에 일어난 운동이라는데 설득력이 생긴다. 3ㆍ1 운동의 시발점을 평양으로 바꾸어 김일성이 3ㆍ1 운동에 참여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너무나 어린나이에 이루어진 3ㆍ1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민족대표 33인에 대하여 ‘일제에 대해 민족 독립을 구걸한 나약한 부르주아’라고 평가하고 유관순 열사에 대하여서도 특별히 언급하지 않음으로 3ㆍ1 운동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북한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민족대표 33인의 무저항 독립운동을 조직적인 무력투쟁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에게 독립을 구걸했다고’ 평가 절하하는 것이다.
결국 3ㆍ1 운동이 비무력 투쟁으로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이 운동 자체가 ‘식민지 나라에 대한 미제의 새로운 팽창야욕을 실현하는데 유리한 정세를 마련하려는 흉악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북한은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독립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운동이었던 3ㆍ1 운동에 대한 북한의 평가는 냉혹하리만큼 비판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객관적이고 바르게 교육되어야 할 국사(근현대사)까지도 수령중심의 체제 유지를 위하여 왜곡하고, 변형시켜 인민들에게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후에 우리나라와 북한의 통일시 역사에 대한 전 국민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북한과의 역사 바로잡기 교류를 통해 객관적인 역사를 확립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 다시 고쳐 쓴 북한의 사회와 문화 (전영선, 2006, 역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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