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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북한 전망대

북한에서는 3.1절을 어떻게 바라볼까?


한국의 가장 큰 기념일 중 하루는 바로 매년 3월 1일, 3.1절입니다. 3.1운동은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의심이 한반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가운데, 1919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비폭력 평화 만세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3.1운동을 기념하는 날이 3.1절입니다. 우리나라는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3월 1일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의 3.1절 기념사는 특히 한일관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중요하며, 최근에는 유관순 열사를 '누나'라는 호칭으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성평등적 인식도 함께 논의되고, 모 인터넷 강사가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지도자 33인에 대해 비판을 했던 것이 큰 논란이 되는 등, 3.1절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주요하게 받아들여지는 날입니다.


3.1운동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민족지도자 33인과 서울의 대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을 기획했고, 이것이 거국적인 3.1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일제는 3.1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그 결과 시간이 흐를 수록 만세운동은 조금씩 폭력성을 띠기도 했습니다. 3.1운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게 하는 촉발제이기도 했으며, 이전까지 폭력적인 강압통치를 했던 일제가 회유에 기반을 둔 문화통치를 펴게 하는 기점이기도 했습니다.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등, 유례없는 평화운동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위의 내용들이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을 평가하는 대체적인 시선입니다. 그런데 이는 한반도 남쪽에 있는 우리들의 시선입니다. 한반도 북쪽의 북한에서는 3.1운동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북한의 3.1절은?


북한은 3.1운동을 "3.1인민봉기"라고 부르며, "자주 독립을 염원하며, 식민 통치 하에서 쌓이고 쌓인 인민의 원한과 분노가 폭발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3.1절을 공휴일로 지정할 만큼 중요한 기념일로 다루는 반면, 북한에서 3.1절은 크게 대수롭지 않은 날입니다. 1980년까지는 으레 '3.1인민봉기 기념보고회' 등으로 3.1운동을 기념했으나, 1980년 중반 이후에는 국가 사상 기조를 김일성 일가 중심의 민족주의로 맞추면서 별다른 행사로 기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북한은 1980년까지는 3.1운동이 러시아 10월 혁명(1917)의 영향을 받은 서울시민들이 시작한 반일투쟁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 이후에는 3.1운동이 시작된 곳이 평양의 숭덕여학교며, 수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1운동의 결정적인 주도자이자 지도자도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형직이 한반도 전역과 중국의 동북3성까지를 아우르는 대규모 독립단체인 '조국광복회'의 회장으로서, 3.1운동을 독자적으로 주도했다고 말합니다.


김일성에 대한 숭배도 등장합니다. 1912년 출생으로 당시 7살이었던 김일성은 아버지 김형직과 함께 열성적으로 운동에 참여했는데, 이를 본 평양 시민들이 "아이도 저렇게 열성인데 어른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며 큰 감명을 받고 더욱 열심히 운동에 참가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이 평양의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주장은,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운동에 참가했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반도 너머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국광복회의 회장이었고, 조국광복회가 운동을 주도했다는 주장은 허황되게 들립니다. 더구나 유의미할 만큼 영향력이 있는 독립단체가 없었던 1910년대에, 그처럼 광대한 조국광복회라는 단체가 있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운동 자체가 평양에서 먼저 일어났다는 주장은 사실입니다. 서울에서 3.1운동은 대략 오후 2시 30분에 시작됐는데, 평양에서는 오후 1시에 시작했습니다. 평양의 3.1운동은 당시 평양의 장대현학교와 숭덕학교 등에서 종교인들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나오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3.1운동은 남한지역보다 북한지역에서 더 크게 일어났습니다. 당시 3.1운동이 처음 시작된 도시는 서울,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등 7개 도시였습니다. 서울 1곳을 빼면 전부 북한지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평양의 운동 규모가 가장 컸습니다.


3.1절과 관련돼서 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3.1운동 기념식에서 평양 시민이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사건이 그것입니다. 광복을 맞은 이듬해인 1946년 3월 1일에, 김일성은 평양 역전광장에서 3.1봉기 27돌 경축대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년이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수류탄은 연단에 던져지고 잠시 폭발하지 않았는데, 이 때 소련군의 노비첸코 중위가 이를 주워 되던지려는 순간에 수류탄이 터져 중상을 입었습니다. 김일성은 노비첸코 중위에게 외국인에게는 최초로 노력영웅 칭호를 수여했으며, 1985년에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원한 전우>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탈북민들은 한국에 도착했을 때 3.1절을 크게 기념하는 것을 보고 두 번 놀란다고 합니다. 첫째는 한국에서 어떻게 김일성과 김형직을 기리는 3.1절 행사를 이렇게 크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3.1운동은 김형직과 김일성의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3.1운동을 무슨 의미로 기념하는지를 알고 나서는, 자신이 지금껏 알고 있던 3.1운동에 대한 정보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에 또 놀란다고 합니다.


이처럼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남북은 서로 다른 시선으로 서로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의 과정에도, 이처럼 다른 생각들이 남북 주민들의 소통을 방해하는 일도 무척이나 많을 것입니다. 언젠가 북한의 주민들과 더 원활하게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도록, 3.1운동 등 여러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서 북한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미리 알아보는 것 또한, 통일을 준비하는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추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