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7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임혜민입니다. 저는 남북분단 70주년을 맞아 KB 락스타챌린지 7기 대원으로서 독일을 방문하고 왔습니다. 대학생 기자로서 매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로 탐방에 임했고, 귀국한 이후 이를 정리해서 구동독 지역 중심으로 독일의 통일 여행지를 살펴보고 느꼈던 점을 기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 대학생 기자의 독일탐방 기사 다시 읽기
대학생 기자로서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세 번째 독일 여행지는 바로 슈타지박물관과 체크포인트 찰리입니다. 베를린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두 여행지는 각각 다른 의미에서 무척 인상적인 곳이었습니다. 슈타지박물관 방문은 그동안 워크숍 등에서 배웠던 것을 독일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체크포인트 찰리는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독일 여행지였기에 새로운 기분으로 둘러보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슈타지박물관
▲ 슈타지박물관 입구
▲ 슈타지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서
여러분은 슈타지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나요?
저는 경찰대학생으로서 동독의 비밀경찰이었던 슈타지의 역할과 그 활동에 대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마치 현재의 북한 인민보안부처럼 과거 슈타지 또한 동독주민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이 없는지 사찰하였습니다. 단순히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이 아니라,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슈타지박물관은 독일 분단 당시 동독 주민들을 감시했던 슈타지의 실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곳이었습니다. 여러 층에 걸쳐 다양한 사진과 영상 자료, 증거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과거 슈타지의 활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독일은 처음부터 동독과 서독으로 나뉜 것이 아니라 서독이 먼저 생기고 동독이 나중에 생겨서 정치 체계 등이 이질적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서독은 의회 민주주의, 동독은 사회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그 중 동독 정치의 도구로서 마련된 것이 슈타지였습니다. 슈타지는 정부부처 중 치안을 담당하는 곳으로서 우리나라 검찰과 같은 법률적 권한까지 있어서 구속과 기소를 모두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슈타지는 이러한 힘을 주민 감시에 이용했고, 불순분자·의심스러운 자·전적으로 당 정책에 동의하는 자를 파악하여 동독의 제 1당인 SED(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사회주의통일당)에 보고했습니다.
▲ 동독 깃발을 보여주는 박물관 직원
슈타지박물관 입구에는 동독의 깃발이 있었습니다. 동독 깃발은 서독 깃발 위에 심볼이 있는 모습이었는데, 밀은 농부, 망치는 노동자, 각도기는 고급직종 노동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가이드를 해주었던 박물관 직원에 따르면 북한의 인공기 또한 심볼은 없지만 그 의미가 동독 깃발과 상통한다고 하였습니다.
동독 깃발과 북한의 인공기가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동독 주민의 삶은 북한 주민의 삶과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동독 내의 자유롭지 않은 체제와 주민들의 심리적 순응 정도에는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독은 철저한 감시를 통해서 이러한 주민들을 통제했는데, 당시 약 1700만 명의 동독 인구 중에서 91,000여명이 슈타지의 직원이었고 총 20만 명 정도가 정보원으로서 활동했습니다. 이를 보면 정보원의 수가 동독 전체주민의 1/10에 달할 정도로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공식적인 슈타지 직원 명단은 없으나 슈타지의 단순 노무 가담자들 등은 인터넷에 그 리스트가 공개되어 있다고 합니다.
▲ 슈타지 지부 분포도
▲ 슈타지가 사용한 범죄자 수송차
위의 지도 속 흰 점이 슈타지의 지부입니다. 동독 구석구석 슈타지 지부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20만 명 가량의 슈타지 정보원에는 동독 내 모든 학교장, 경찰 협력자, 변호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정보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슈타지가 모은 정보를 한데 모아 종이에 옮기면 80km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방대한 양의 정보는 각 국가기관에서도 신청해서 열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이드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개인의 삶이 철저히 통제되던 동독 사회가 얼마나 답답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고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보장되는 권리가 누군가에게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 같은 일은 북한주민들에게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음을 떠올렸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각 학교의 교장들은 슈타지의 주요 정보원으로서 활동했는데, 이는 학생들을 감시하는 동시에 슈타지 직원이 될 적임자를 조기에 발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동독의 학생들이 슈타지 직원이 되는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7학년(13-14세) 때 학교 담임으로부터 슈타지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슈타지 직원이 되고 싶다고 지원할 수 있었고,
8학년 때에는 슈타지에서 일할 각오를 다지고 신청서를 제출하는 시기였습니다.
9학년 때에는 슈타지에게 자신의 능력과 성품 등을 보고하고,
10학년 때 시험을 보고 본격적인 직업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7학년부터 슈타지 채용 과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이미 슈타지가 직원으로 뽑을 학생을 내정해둔 상태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학생들은 졸업 후에 슈타지에서 일하며 군복무를 대신했습니다.
이처럼 학생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슈타지 직원을 뽑기도 했기 때문에 학교장이 슈타지의 주요 정보원으로서 활동했던 것입니다. 교장들은 특히 교사들이 정부 시책 및 슈타지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꼼꼼히 파악했습니다. 심지어 학생들이 정보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박물관 가이드를 맡아준 직원의 친구가 학생 시절 슈타지 정보원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박물관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들이 슈타지가 되고자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슈타지가 집에 있는 경우 그 자녀를 뽑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가족 슈타지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교육현장에서부터 본연의 소명이 아닌 슈타지 업무가 중시되던 상황은 분단 당시에 정상적인 사생활을 누리기 힘들었던 동독 주민의 삶을 짐작케 합니다.
동독에는 일반 감옥과 별개로 슈타지 감옥이 따로 있었으며 수송차 또한 특수차량이 있었다고 합니다. 박물관 1층에는 그 수송차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슈타지에 의해 범죄자로 지목되었던 이들은 데모 주동자보다는 동독을 탈출하려다 붙잡힌 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16만 명이 슈타지에 의해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 슈타지가 착용했던 옷가지와 각종 장비
▲ 슈타지가 민간인 사찰에 이용했던 감시 도구
슈타지가 착용했던 근무복과 장비 등은 박물관에 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슈타지 근무복은 군복과 유사하고 철모 소총 등이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슈타지는 권총을 늘 지참하고 다녔습니다.
주민들을 감시하던 감시 카메라 등의 도구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물뿌리개도 사진기로 사용할 수 있었고, 언뜻 보면 새집처럼 생긴 도구도 잘 살펴보면 감시 카메라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독 주민들은 이러한 감시 도구들이 곳곳에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늘 감시되고 통제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여 함부로 체제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 박물관 직원의 설명을 듣는 KB 락스타 챌린지 7기 대원들
동독 주민들 가운데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자, 서독 문화에 관심이 있는 자는 슈타지에 의해 감시를 받았습니다. 사상이 의심되어 슈타지의 심문을 받았던 여학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심문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한 것 때문에 학업 성적이 특출났음에도 불구하고 슈타지에 의해 의대 진학이 좌절될 정도로 개인의 삶이 좌지우지되었다고 합니다.
가이드를 맡았던 박물관 직원의 형은 동독을 탈출하려다 감옥에 갔는데, 이는 자기 집안의 주치의나 교회 목사가 밀고하여 발각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슈타지는 동독 주민의 삶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통일 이후 슈타지 처벌문제는 어떨까요?
슈타지에 대해 이루어졌던 전체 250건의 재판에서 단 세 명만이 감옥에 갔다고 합니다. 이는 동독과 서독 간의 통일계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계약 당시 동독 주민은 동독법으로 처벌하기로 했기 때문에 당시 합법적이었던 슈타지 활동 자체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 살인 등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자만 처벌할 수 있었고, 슈타지 활동 중 중대한 위법 행위가 있었던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처벌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슈타지 정보원이 사찰 활동 중 우체통 안에 들어 있던 돈을 보더라도 감시에서 끝났을 뿐 이를 절취하지 않았기에 법에 저촉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서독법에 따라 벌금형에 해당하는 경미한 범죄로 해석될 경우 동독법이 아닌 서독법을 적용하였고, 동독과 서독의 공소시효가 서로 달랐기에 공소시효가 짧은 법을 적용했습니다. 이처럼 상황에 따라 유리한 법을 적용했기 때문에 슈타지 처벌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며 한국통일 이후의 인민보안부 직원 혹은 고위 간부의 처벌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체크포인트 찰리
▲ 체크포인트 찰리 전경
슈타지박물관 방문 이후에 들렀던 곳은 체크포인트 찰리였습니다. 이곳은 1961년부터 1990년까지 베를린 장벽의 검문소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이름은 '프리드리히슈타트 검문소'였지만 "C"라는 간단한 별명으로 불리다가 '체크포인트 찰리'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입니다.
위의 사진에도 볼 수 있듯이 동베를린 방향으로는 소련군, 서베를린 방향으로는 미군의 얼굴이 높은 표지판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날 수 있었던 이들은 인정받은 군대 인사, 기자, 외교관, 고위 인사들뿐이었다고 합니다. 분단을 상징하는 특이한 장소였기 때문에 냉전시대 스파이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체크포인트 찰리를 다룬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 체크포인트 찰리 앞 벽 박물관
▲ 독일 분단 당시 동서 베를린 지도
슈타지박물관에서 많은 자료를 보고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면 체크포인트 찰리는 맞은편에 있는 ‘체크포인트 찰리의 집(Haus am Checkpoint Charlie)'에서 베를린 장벽의 역사와 동독 주민들의 탈출 이야기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벽 박물관'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고 하네요.
벽 박물관 앞에서는 실제 베를린 장벽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함께 갔던 조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 체크포인트 찰리 근처에 있는 베를린 장벽의 일부
독일로 떠나기 전에는 체크포인트 찰리에 대해 잘 몰랐었기 때문에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통일 여행지를 방문할 수 있어서 신기하고 설레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치 제7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으로 막 선발되고 나서 들렀던 공동경비구역(JSA)이 떠오르는 곳이었습니다. 어쩌면 통일 미래에는 우리나라 JSA 또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여행지가 되고, 체크포인트 찰리처럼 그 옆에 맥도날드나 스타벅스가 들어서는 날도 오지 않을까 기대해보기도 했습니다.
저와 함께 떠난 이번 독일 여행은 어떠셨나요? 여러분 또한 이곳에서 독일의 통일 이야기들을 새로 알게 되셨나요?
저는 '통일'이라는 테마로 독일을 둘러보며 대학생 기자로서 전할 이야기가 많아서 남들보다 더 바쁘게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재미있었습니다. 일주일 정도의 독일 일정동안 가져온 이야기보따리가 아직 많이 남아 있네요! 새로운 이야기와 유익한 정보를 담은 기사로 돌아오겠습니다. 이상 대학생 기자 임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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