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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쫑알쫑알 수다방

개성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남북 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있는 개성은 평양, 남포에 이은 북한 제 3의 도시입니다. 개성은 서울에서 약 7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요. 이는 서울에서 고속도로로 1시간이면 갈 수 있어 사실상 천안보다도 가까운 곳입니다. 개성은 919년에 고려왕조의 서울로 자리 잡은 이후, 몽고의 침략 때문에 강화로 수도를 옮겼던 30여년을 제외한 400여 년 동안 고려왕조의 수도였습니다. 400년이란 긴 세월동안 한 나라의 수도였던 만큼 개성엔 많은 고려시기 문화재가 분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개성에 있는 문화재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개성의 문화재 전체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개성의 문화재 중 북한에서 지정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만월대

  

개성에는 고려시기 수많은 문화재가 존재합니다만 그 중에서 핵심 문화재는 궁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왕과 왕실의 거처이자 정치와 행정이 행해지던 곳, 즉 나라의 최고 관청이었하지만 현재 개성에는 궁궐이 남아있지 못하고 터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개성의 문화재는 알맹이가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지요. 고려의 궁궐터를 흔히 만월대라 하는데, 사적 4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고려의 본 대궐인 만월대 궁궐은 황성의 아래쪽에 자리 잡은 궁성 안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북쪽의 송악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의 구릉 지대에 전개되어 있습니다.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시대 궁궐이 대체로 평지에 건설된 것과 달리 흙을 높이 돋아 석축을 한 언덕진 곳에 자리 잡은 것이 만월대 궁궐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지기(地氣)’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의지와 관련시켜 설명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궁전 중심부의 건축적 위용을 과시하려는 목적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궁성 안에는 중심전각인 회경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각과 관청들이 널려있었지만, 지금은 신봉문터, 창합문터, 회경전터, 장화전터, 중관전터의 주춧돌이 풀 숲에 누워 전각이 복원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월대 법궁은 919년(태조 2)에 건설된 이후 현종대의 거란 침입, 인종대 이자겸의 난, 고종대 몽고 침입 등을 겪으며 여러 차례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였고, 공민왕대 홍건적의 침입 때 불에 탄 후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궁궐이 불에 탄 것은 1362년(공민왕 11)인데, 그 후 만월대 궁궐은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만월대 터<사진 출처 : k.daum.net/qna/view.html%3Fqid%3D0BeU7>

 

 

고려 본 대궐터는 원천석이 조선초에 ‘세월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라고 묘사하였듯이 이미 풀숲에 묻혀있었습니다. 조선시기에 이곳의 너른 마당이 여러 행사 장소로 이용되었음은 조선후기 김홍도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개성역사박물관에는 만월대 궁궐의 모형이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는데, 이것을 토대로 문경에 개경궁궐을 만들어 놓고 역사드라마 ‘태조 왕건’이 촬영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월대 서북쪽에는 사적 49호로 지정된 고려첨성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고려시기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축대부분만 남아있습니다.

만월대 법궁 외에도 많은 궁의 이름이 전해지지만 현재 위치가 확인되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공민왕 후반 이후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즉위하였던 수창궁과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에 살았던 경덕궁(목청전)은 그 터가 남아있지만 지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만월대 터<사진 출처 : pictorial.hani.co.kr/pitView.han...gtype%3D>

 

 

2. 선죽교와 숭양서원

 

고려충절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선죽교는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시기의 돌다리입니다. 이곳에서 고려말 정몽주가 피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다리의 옛 이름은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피살된 날 밤 다리 옆에 참대가 났기 때문에 이름을 선죽교로 고쳤다고 합니다. 선죽교에는 본래 난간이 없었는데 지금 있는 난간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이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여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입니다. 선죽교는 국보급 36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옆에는 한석봉이 썼다고 전하는 ‘선죽교(善竹橋)’라고 쓴 비석이 있습니다. 또한 이 다리 주변에는 정몽주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숭양서원과 표충비입니다. 사적 51호로 지정된 숭양서원은 정몽주의 집 자리에 세운 서원입니다.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 본받을만한 유학자를 제사지내는 동시에 유학공부를 시켰던 일종의 사립학교입니다. 숭양서원에는 정몽주의 위패가 모셔져있습니다. 또 근처에는 조선후기 이후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표충비 2개가 비각 안에 들어있는데 북쪽 것은 1740년 영조가, 남쪽 것은 1872년 고종이 개성에 와서 그의 충절을 기린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 합니다.

 

 

개성 선죽교<사진 출처 : www.tour.go.kr/resource/re_reso_...-B-00002>

 

개성과 개성주변의 문화유적은 고려 멸망 후 조선왕조에 의해서 철저하게 그 보호가 외면되었고, 일제시기를 전후하여서는 도굴과 약탈에 방치되었으며, 해방이후에도 보호와 복원을 위한 손길이 제대로 닿지 않은 상태입니다. 결과적으로 개성주변의 문화재에 대한 체계적인 기초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개성의 문화재에 대한 제대로 된 종합목록하나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고려왕조의 수도였던 개성은 다른 왕조의 수도였던 평양 경주 서울에 비하여 인위적인 파괴가 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전쟁 중의 피해도 상대적으로 덜했으며 그 이후의 개발도 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철저한 조사와 체계적인 보호와 복원을 위한 대책을 세운다면 다른 지역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판단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개성공단사업은 지금까지 방치하다시피 한 개성주변의 문화유산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개성과 강화 서울을 포괄하는 이른바 한강하류지역은 한반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지역으로 고대부터 쟁패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한반도의 허리이자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밖으로 나가는 문호였습니다. 지금 이곳은 남북분단으로 거의 쓸모없는 땅이 되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이곳을 남북이 공동으로 개발하는 일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보존과 개발이 하루라도 빨리 추진되어야 합니다. 중세도시 개성의 보호와 복원, 더 나아가서 한강하류의 종합적인 개발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도 함께 마련하기를 기원해봅니다.

 

 

<사진 출처 : heavyjoe.tistory.com/10>

 

출처 : 잡동사니 모음 - 네이버 블로그, 역사비평 54호(2001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