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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남북이 하나되어 반환에 성공한 임진왜란의 또 다른 기록, 북관대첩비

 

최근 극장가에서 영화 명량이 큰 화두입니다.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500만 관객 돌파라는 엄청난 기염을 토해내고 있는데요. 영화 명량이순신이라는 역사적 키워드와 영화배우 최민식씨의 노련한 연기력이 합쳐져 관객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를 선사해주고 있습니다.

 이순신 이외에도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맞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칼과 창을 들고 일어난 여러 장수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활약은 전란 이후에도 역사 속에 남아 우리들에게 오롯이 전해지고 있는데요. 이 중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홍의장군 곽재우, 진주대첩에서 전사한 김시민, 승병들의 지주 사명대사 등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시 정문부라는 인물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정문부 장군은 누구이며 '북관대첩비'는 무엇일까?

1592년 일본은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치려하니 길을 빌려 달라.)’를 구실로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조선을 침략합니다. 당시에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어 마땅한 군사력조차 보유하지 못했던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힘없이 무너지게 되고 결국 수도 한양이 함락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일본 육상부대는 승승장구하여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북진하게 되는데 이 중 2만 2천여 명의 정예로 구성된 가토 기요마사의 2군이 함경도 쪽으로 진군하여 길주 부근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 함경도는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생포되고 내부에서 반란까지 일어난 상태였습니다. 이 때 정문부 장군은 뜻이 맞는 인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가토 기요마사에게 맞서게 되는데 처음에 모인 수가 대략 2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 전투에서 고군분투한 끝에 결국 가토 기요마사의 대군을 물리쳐 패퇴시키게 됩니다. 여기서 있었던 일련의 전투들을 통틀어 ‘북관대첩’이라 명명하였고, 숙종 때 이를 기려 길주에 북관대첩비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 임진왜란 의병도▲ 임진왜란 의병도 (출처: 두산백과)          ▲ 정문부 장군 영정▲ 정문부 장군 영정 (출처: 민족문화)


   약 100년 여간을 일본 땅에 놓여있게 된 북관대첩비

즉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 장군의 승전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1905년 한반도에서는 대한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전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 제 2사단 소장이었던 이케다 쇼스케는 병력을 이끌고 북진하던 중 함경도 길주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곳에서 우연히 비석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록을 본 이케다 마사스케는 격분하였고 이 것은 일본 역사의 수치다.”라며 비석을 통째로 뽑아내어 일본 본토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북관대첩비는 일본 야스쿠니 신사의 한 구석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일본은 콘크리트에 몸체를 박고 몸체보다 두 배 이상 무거운 머릿돌로 비석을 눌러버린 후에 비석에는 대첩이라 표기되었으나 사실과는 다르니 이 비석의 내용을 믿지 마시오.”라는 안내판까지 설치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4년 후인 1909,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이 나는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서 있는 조선 비석을 발견했다.”라는 기록을 남기지만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비석의 존재는 서서히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가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1978, 한 재일 한국인 학자가 조소앙 선생이 쓴 글을 읽게 되고 야스쿠니 신사를 뒤져 비석을 찾아낸 후 그 존재를 박정희 정부에 통보하여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이듬해인 1979, 최초로 한국 정부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일본에 요청하게 되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이어 1996년에는 일본의 승려인 가키누마 센신이 야스쿠니 신사에 반환을 촉구하였고, 2000년에는 한국과 일본의 불교계가 연합하여 북관대첩비 반환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2004년에는 북관대첩비 환국 범민족 운동본부가 출범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해서는 남북간 조정이 필요하며 신사에 반환을 강제할 수 없다.”라는 입장을,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는 비석은 원래 북한의 길주에 있었던 것이니, 남북이 통일되면 돌려주도록 하겠다.”라는 입장을 각각 취하며 북관대첩비 반환을 계속 거부하였습니다 


   남북이 하나되어 100년 만에 북관대첩비를 제자리에 놓다

 결국 남한과 북한 정부는 북관대첩비 강탈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난 2005년에 15차 남북장관급회담을 개최하였고, 공동보도문에서 남과 북은 일본으로부터 북관대첩비를 반환받기로 하고 이를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외교통상부를 중심으로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북관대첩비 반환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어 200510, 북관대첩비는 한국으로 반환되었고 경복궁을 거친 뒤 이듬해인 20063월에 드디어 원래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갔습니다 


                      ▲ 반환 이전의 북관대첩비 (출처: 동아일보)▲ 반환 이전의 북관대첩비 (출처: 동아일보)           ▲ 북한으로 반환된 북관대첩비 (출처: 한겨레)▲ 북한으로 반환된 북관대첩비 (출처: 한겨레)

 북관대첩비의 반환은 단지 수많은 문화재 반환 사례 중 하나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과 북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지금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지만, “역사 앞에서는 남과 북이 상관없이 모두 하나의 민족이다.”라는 주제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남북 관계에 있어 좋은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상 제7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이태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