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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독일 통일의 일등 공신 '통일의 총리 헬무트 콜'에게 배우는 통일에 대한 자세

안녕하세요, 제7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임혜민입니다. 최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독일을 방문하여 각국 고위급 인사들과 회담을 나누면서 통일외교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바 있습니다. 특히 '제2차 한독 통일외교 정책자문위 회의'에서는 과거 독일이 분단 상황에서 국가 내부뿐만 아니라 국외 분위기를 어떻게 조성하였는지 그 노하우를 듣고 교훈을 얻을 수 있었지요. 당시 독일과 현재 한국의 상황은 각각 다르지만, 국내외 정세 변화를 통일로 연결시킨 독일의 사례를 살펴본다면 한국이 통일을 준비하는 데에도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일 통일의 일등 공신으로 꼽히는 이는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입니다. 그는 이전 정부의 동방정책을 이어받아 통일을 실현시키는 정치적 지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통일 비전을 가졌고, 어떻게 외교 기회를 살렸던 것일까요?

#임혜민▲ 통일의 주역으로 꼽히는 헬무트 콜(출처:평화문제연구소 블로그)

'통일의 총리', 독일을 위하여 결단을 내리다.

헬무트 콜은 1982년부터 1990년까지는 서독의 총리, 이후 1998년까지는 통일독일의 총리로서 일하였습니다. 총 16년에 이르는 시간을 독일 총리로 재직해서 역대 최장수 독일 총리입니다.  그는 1989년 11월 28일 서독 연방의회에서 ‘독일통일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통일 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이는 아무도 통일 논의를 쉽게 꺼내지 못했던 가운데 통일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공식 선언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서독에서는 통일 논의가 독일 민족주의, 즉 나치의 망령을 부추기는 행위로써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헬무트 콜이 통일 비전을 설정하고 추진력 있게 기회를 활용한 것은 엄청난 용기와 정치적 능력이 필요한 일이었다고 하네요.

10단계로 이루어진 통일방안은 독일 통일을 동독과의 정치적 협상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유럽 통합을 위한 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 내용으로는 동독 지원, 동·서독 협력 강화, 동독에 자유·비밀 선거 도입, 군축과 군비 통제,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력 포기 및 정치범 석방, 계획경제의 폐기 및 시장경제로의 전환 등을 핵심으로 합니다. 이처럼 다른 나라가 아닌 독일 스스로 통일 과제를 설정하고 실천해나감으로써 독일이 통일과정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헬무트 콜은 동독 주민의 시위가 통일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통일 여건을 조성하는 결단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우선 헝가리와 비밀교섭을 가지고 동독 주민이 대량 탈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습니다. 1989년 5월 2일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 철조망을 제거하자 헝가리를 통하여 동독주민들이 매일 수백 명씩 탈출하였습니다. 동독 정부는 헝가리 정부에 항의하였고, 동독과 헝가리 간의 여행협정에 따라 동독주민들은 체포·송환되었습니다. 이에 헬무트 콜은 1989년 8월 25일 네메트 헝가리 총리와의 비밀교섭을 실시하였습니다. 차관제공, 비자면제, 헝가리의 유럽연합 가입 지원 등을 약속하여 동독주민 송환의 근거였던 여행협정 파기약속을 받아낸 것입니다.

동독탈출자가 급증하자 야당 사민당은 동독과의 화해·협력이 어려워질 것을 염려하였고, 각 주 정부들은 탈출자 정착지원에 부담을 느껴 난색을 표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독주민의 수용제한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컸습니다. 하지만 헬무트 콜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동독탈출자 58만 2천여 명을 조건 없이 모두 수용하였습니다. 이는 동독주민들의 ‘발로 이룬 혁명’을 가능케 한 결단이었습니다.

더불어 헬무트 콜은 급변하는 동독사태에 신속·정확하게 대응하여 동독 공산정권의 위기를 통일로 이어나갔습니다. 그는 「조약공동체」구성을 위한 협의와 동독 경제지원을 약속하여 동독주민들이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가지도록 하였습니다. 이후 동독정부가 위기 상황에서 경제지원을 요구하였을 때에는 이를 냉정하게 거절하고 신속한 통화·경제동맹 체결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동독 공산정권이 연명하지 못하고 통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임혜민(출처:쿠키뉴스에서 재인용)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을 기억하시나요? 드레스덴은 원래 헬무트 콜이 통일과 관련된 연설을 남긴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연설을 통하여 독일 국민의 자결권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고 하네요. 독일이 주체적으로 통일을 이끌어가고 내부의 변화를 하나의 목표로 모아낸 과정을 보면 한국 통일을 이루어나갈 때 참고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독일이 통일을 주도하여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타국의 지지와 협조를 어떻게 이끌어냈던 것일까요?



2차 대전 전승 4대국을 움직인 통일외교로 2+4조약을 성사시키다.

#임혜민▲ 통독 당시 부시, 고르바초프와 환담하는 헬무트 콜(출처:평화문제연구소 블로그)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었기 때문에 독일은 전승 4대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동의가 있어야 통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통일 독일이 국제정치적인 시각에서 각국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했지요. 이 때 콜 총리의 치밀한 설득 외교와 기민한 상황 대처가 빛을 발했습니다.

콜 총리의 판단력과 협상력을 발휘하여 다른 국가들이 독일 통일을 지지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우방과 인근 국가들이 동독 소요사태를 보고 동요하였습니다. 이 때 콜 총리는 통일독일이 유럽통합에 걸림돌이 아닌 이득이 될 것이라고 그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소련에 대해서도 대규모 경제지원을 약속해서 통일독일이 소련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주지시켰습니다. 콜 총리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오데르-나이세선 인정, 통일독일의 NATO 잔류 등의 주요 사안을 즉각 수용하여 미국이 독일 통일을 전폭 지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통일독일 연방군 감축, 대소 경제지원 등의 어려운 사안까지도 신속하게 결정하여 효과적으로 대외 교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통일에 반대하던 소련을 설득하기 위하여 콜 총리는 대규모 차관과 육류 등을 제공하며 고르바초프와 신뢰관계를 형성하였고, 고르바초프의 고향 코카서스에서 통일독일의 NATO 잔류 등 민감한 현안을 완전히 타결하였습니다.


#임혜민▲ 독일통일 승인 협정에 날인하는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 동독, 서독의 지도자들(출처:평화문제연구소 블로그)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집회에서 콜 총리는 전승 4개국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며 그들에게 공치사를 하는 외교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통일 직전에 10개월의 시간을 들여 미국 대통령과 여덟 번, 프랑스 대통령과 열 번, 소련 대통령과는 네 번을 만나서 통일외교를 펼치고 그들을 설득하였습니다. 2+4회담은 이들 모두가 한데 모인 자리였기 때문에 독일 통일에 대한 4개국 동의 절차를 대폭 간소화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살펴본 것처럼 헬무트 콜은 국내외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때로는 판단력을 발휘하여 어려운 결정을 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이끌어갔습니다. 당시 독일은 동서독 상황 대처뿐만 아니라 통일외교의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한국 또한 남북관계와 더불어 적절한 대외교섭을 통하여 통일을 지향해야 할 것이며, 이는 과거 독일의 사례를 교훈삼아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국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통일을 준비한다면 타국의 지지를 받되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 대학생 기자 임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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