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근로자 철수가 발표된 4월 26일 저녁. 인천의 교육문화공간 담쟁이숲(원장: 더함공동체교회 이진오 목사)에서는 오영필 감독의 《거짓 우화》 다큐멘터리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진보 입장에 있지만, 진보권이 북한 인권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합니다."(이진오 목사)
다큐 콘서트를 시작하며 이진오 목사님은 "일제 강점기에서 아무리 잘 되어도 제국주의 일본의 그늘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 민족의 시대적 사명은 독립이었습니다. 분단된 지금 우리는 아무리 잘 되어도 분단 조국의 현실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시대적 사명은 바로 통일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가자들과 이 날 벌어진 개성공단 철수, 한미 해병대 연합 훈련 등에 관해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기획 탈북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획 탈북이란 많이 알려져 있듯이, 탈북을 기획하여 중개인에게 돈을 주고 원하는 사람을 탈북시키는 것입니다.
"우화라는 말은 보통은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하지만……"(오영필 감독)
이진오 목사님의 소개로 나온 오영필 감독님은 작품에 대해 "세상을 살다보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볼 때는 좋아보이던 것이 가까이 가면 갈수록 보이지 않던 결함과 추한 모습이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탈북 취재를 하면서 제가 참여했던 기획 탈북에 그러한 부분이 있음을 깨달았고, 또한 제 자신 안에도 그런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짓 우화》의 제작 과정은 제 안에 내재된 허상과 거짓들을 제거하는 작업이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다음은 다큐멘터리 영상의 장면입니다. 장면 구분은 기자가 임의로 하였습니다. 각 장면에 대한 요약 설명이므로 영상을 직접 볼 것을 권합니다)
"도와주세요!" 하지만 사진만을 찍고 돌아가는 언론인(사진 제공: 오영필)
장면 1.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여자가 무대 중앙에 등장하여 도와달라고 합니다. 한 사진 기가가 다가와 무심히 촬영을 하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장면 2. 중국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중국 국경을 넘고자 하는 탈북민들이, 그들의 탈출을 돕는 탈북 지원 단체 대표의 도움으로 중국 국경 부분의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고, 마지막 기념 촬영을 합니다.
장면 3. 2001년 12월 26일 중국 옌지 역에서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은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합니다. 탈북민들 중 이미 한국행을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정 모씨가 자신의 가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번 여행에 동참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아이들과 중국 여기저기를 떠돌며 힘든 생활을 했었다고 말합니다.
장면 4. 2001년 12월 28일 그들은 중국과 몽골의 국경 지대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원 체포되었고, 그들의 한국행을 도왔던 일행과 그 과정을 취재했던 오영필 감독은 3개월 간 중국 감옥에 구금됩니다.
장면 5. 2003년 3월 10일. 1년 후 다시 중국을 찾아간 오영필 감독. 기획 탈북의 사전 답사를 위해 광저우 영사관을 찾아 동선을 촬영합니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기밀이 새서 탈북민들과 만나기로 한 광저우 역 부근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됩니다.
장면 6. 2004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탈북 지원 활동가, 즉 오 감독 구명 운동이 진행되는 현장입니다. 오 감독의 어머니가 편지를 읽습니다.
장면 7. 중국 감옥에 있던 상황을 연극화한 장면. 감옥에서 쓴 일기의 일부가 내레이션으로 나옵니다.
장면 8. 2004년 7월 8일 입국 하루 전, 중국 광저우 교도소에서 1년 4개월 만의 출옥 장면이 당시 방송 보도 장면으로 나옵니다. 오 감독은 기자 회견 자리에서 기획 탈북이 오히려 탈북을 시도하는 분들에게 더 위험하다며 '양심선언'을 합니다. 탈북자들이 공안에 체포된 뒤, 공안의 심문으로 드러난 장소들을 역추적하여 다른 탈북 시도자들을 일망타진하기 때문입니다.
장면 9. 오 감독을 구명한 내수동교회 목사님이 등장합니다.
장면 10, 11. 기획 탈북의 배후에 탈북 지원 단체와 일본의 한 방송사가 있음이 드러납니다. 오 감독은 해당 방송사의 서울지부를 방문하여 항의 질의서를 전달합니다. 오 감독이 방송사와 계약할 때, 오 감독이 체포될 경우 적극적으로 구출해주겠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방송사가 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 감독은 중국에서 조사를 받는 1년 4개월 동안 계약 조건을 지켜 어느 탈북 지원 단체와 방송사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장면 12. 대한민국에서 친구들과 저녁 식사 자리. 오 감독의 친구들은 오 감독이 감옥에 갇혀있을 당시 본인들의 심정을 이야기합니다.
장면 13. 수감 277일째. 오 감독의 일기 내용이 독백으로 흘러 나옵니다. 감옥에 갇혀서야 탈북민들의 입장(마음)을 이해하게 됐다는 고백입니다. 가족이 탈출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석방이 하나도 기쁘지 않다는 한 탈북민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면 14.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중국인 검사가 한국 오 감독 집에 방문합니다. 오 감독이 첫 번째 수감 때 썼던 일지를 책으로 펴낸 『금지된 여행』을 함께 보며, 책에서 검사를 처음 만난 인상이 적힌 부분을 오 감독이 영어로 설명해줍니다. 검사는 당시에 한국인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오 감독 사건에 관심을 가져 사건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그는 오 감독이 감옥에 있었음에도 낙관적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장면 15. 오 감독과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 정 모씨와의 식사 자리입니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한다는 그는 운전하면서도 가족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운전 중에 조수석에 앉은 친구의 가족이 무사히 입국했다고 하자 눈물을 흘리며 운전했다고 합니다. 오 감독이 그에게 가족을 만나고자 하는 꿈이 꼭 이루어질 거라고 하자, 그는 진심으로 거듭 고맙다며 오 감독의 손을 꼭 잡습니다.
장면 16. 정부중앙청사에서의 기자 회견. 오 감독은 일부 기획 탈북의 문제점을 밝힙니다. 언론이 탈북 지원 단체의 정보로 촬영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방송사와 탈북 지원 단체가 처음부터 탈북과 방송을 기획한다는 것입니다. 촬영 성패에 따라, 감독의 체포 여부에 따라 방송사와 탈북 지원 단체 사이에 오가는 금액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장면 17. (skip)
장면 18. 5년 후. 한 언론사 사무실에서 기획 탈북과 관련해 당시 자신을 취재했던 기자를 인터뷰하는 오 감독. 전에는 탈북 문제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이 지배적이었는데, 오 감독의 사건을 계기로 다양한 입장이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 기자는 말합니다. 그는 어떠한 입장에 서기보다 감옥에서 쓴 수기의 진실성을 살리고자 합니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쓴 종이를 돌돌 말아 출옥할 때 구두창 속에 감춰온 바로 그 수기입니다.
장면 19. 한 책방을 찾은 오 감독. 그는 《라이프 Life》 잡지를 펼쳐 봅니다. 잡지에는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소녀를 밑에서 위로 촬영한 사진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그 소녀는 죽거나 다쳤을 것입니다. 오 감독은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나라면? 사진을 찍을 것인가, 소녀의 생명을 살릴 것인가?
장면 20. 다시 첫 장면. "살려주세요!"라는 외침이 두 번 들립니다. 복부에 총을 맞은 듯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여자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는 기자. 여자는 울면서 도와달라며 손을 뻗습니다. 남자가 든 카메라의 조명이 연달아 터집니다. 여자의 목에는 'PRESS(언론)'라고 적한 명찰이 걸려 있습니다.
대담 및 질의 응답을 하는 오영필 감독(왼쪽)과 이진오 목사(오른쪽)
다큐멘터리 상영을 마친 뒤에는 오영필 감독님과 이진오 목사님이 나와서 질문과 답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질문자는 다양한 사람들로 'Q'로 적고, 오 감독의 답변은 'A'로 적습니다. 마무리 의견 없이 질의응답으로 기사를 마칩니다. 판단은 독자께 맡깁니다).
Q. 영상에서 당시 오 감독님의 기획 탈북에 관한 기자 회견 장면을 삭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편집하면서 중요한 장면들을 많이 뺐어요. 《손석희의 시선 집중》에 나온 것도 있었죠. 자료적인 가치, 제 사건이 얼마나 사회적 의미가 있는지 고려해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자료였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가를 생각했어요. 아무리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어도,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초점에 맞지 않는다면 삭제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몇 장면을 삭제했습니다.
이진오 목사: 그 장면 중의 하나가 삭제가 안 됐으면 저도 출연자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하하.
A.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 저도 그 장면을 작품에 담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하하.
Q. 중국 감옥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A. 군대 내무반하고 비슷했어요. 중국 사람들과 언어적 장벽이 있어서 저는 내면에 침전했어요. 마음 속에 떠오르는 여러 생각을 적을 수 없어서 힘든 와중에 한 달 뒤 이송된 곳에서 종이와 펜이 주어졌어요. 하루에 9시간씩 제 상념을 일기로 기록했습니다. 그런 기분 있잖습니까? 평상시에는 욕구가 안 생기는데, 통제받으면 강렬한 욕구가 생기는 것 말이에요.
Q. 당시의 탈북 지원 단체 대표와 지금도 연락을 하고 있습니까?
A. 아뇨. 7~8년 전에 저작권 관련해서 법정에서 만난 적은 있습니다. 《서울 트레인》이라는 미국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에 제가 찍은 영상이 15분 정도가 사용됐어요. 이 부분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탈북 지원 단체 대표가 자신의 것인 양 미국 감독에게 제공을 한 거예요. 2004년을 전후로 이 영화는 100여 개의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고, 《뉴욕 타임즈 The New York Times》와 같은 매체에도 소개되었어요. 영화 덕분에 탈북 지원 단체 대표와 영화감독이 유명세를 탔습니다. 그런데 '나는 뭐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억울하고 괘씸해서 단체 대표에게 민사 소송을 걸었어요. 결과적으로는 승소했는데, 3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면서 제가 많이 지쳤어요. 원래는 미국 감독에게 소송을 걸려고 했었죠. 그런데 미국 감독이 배째란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곳의 저작권법이 한국의 저작권법과 다르고, 너무 복잡한데다가 제가 너무 지쳐있어서 포기하고 말았죠.
Q. 영상을 보니까 중국에서 찍은 필름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중국 공안들이 필름을 돌려준 건가요? 아니면 빼돌린 건가요?
A. 당시에는 몰랐는데, 제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가 제 필름을 다 압수했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후에 그와 친구가 되었어요. 사실, 그가 저에게 호기심을 가진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브로커들은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제 심문 기록을 보면서 인도적, 종교적 목적으로 탈북을 도왔다는 게 자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저에게 다가와 친해졌어요. 어느 날 그와 저녁 식사를 하는데, 친구가 된 기념으로 선물을 주고 싶은데 갖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봤어요. 저는 별 생각 없이 제가 촬영한 테이프를 받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자 그가 웃으면서 지금 당장은 줄 수 없지만 1년 뒤에는 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는 검사직을 그만 둔 다음에 테이프를 복사해서 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Q. 취조 시 공안들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나요?
A. 두 번째 심문 받을 때는 원하는 대답을 안 하다 보니, 공안이 화가 나서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경우는 있었지만 특별한 가혹 행위는 없었습니다. 당시 제 신분이 언론인이었고. 한국 영사관에서 제 사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던 듯해요.
Q. 김영환 씨는 중국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A.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우마다 다른 것 같아요.
Q.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탈북민 관련 책을 쓰면 찍으면 탈북민들 입장에서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A. 다행히 아직까지 항의는 없었습니다. 널리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본인들도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기획 탈북을 했지만, 기획 탈북을 부정적으로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Q. 저는 중국에서 7년을 살았습니다. 의문이 드는 건, 이미 첫 번째 감옥에 갔을 때 공안들의 목록에 올라갔을 텐데, 두 번째 중국에 위험 부담을 안고 간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이미 공안들이 따라 붙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요?
A. 다행인지 불행인지, 처음에는 공안의 기록에 남지 않았어요. 두 번째 잡혔을 때 노련한 공안의 유도 수사로 제가 전에도 중국에 온 일을 말했는데, 그 때 공안이 그 사실을 처음 안 거죠. 그래서 제가 처음 잡혔을 때 기록이 없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잡힌 건, 제가 방심하기도 했었어요.
Q. 북한 사람들, 브로커들, 현지 활동가들 등의 다양한 시각이 영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요?
A.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다만 저는 이 작품에서 저의 과오와 실수에 대해 좀 더 근본적으로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다른 분들의 입장을 작품에 충분히 담지 못했어요.
Q. 기획 탈북이 아니고서는 현실적으로 탈북이 어렵습니다. 오 감독께서는 기획 탈북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소수의 탈북 지원 단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인지요?
A. 저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탈북을 하면 모두 '기획 탈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넓은 의미의 '기획 탈북'에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좁은 의미의 '기획 탈북', 즉 탈북민들을 이용해서 정치적 압박을 가하거나, 돈을 목적으로 한 기획 탈북에는 반대합니다. 탈북민 자체에 집중하는게 아니라, 그들을 위태롭게 방치한 채로 북한과 중국을 압박하려는 의도와 목적을 가진 정치적 행위로서의 기획 탈북을 반대하는 것이죠.
이진오 목사: 대부분의 브로커들이 탈북민들의 정착금을 받기로 하고 기획 탈북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에 들어올 때 정부가 주는 돈의 일부를 떼어주는 것이죠. 심지어 탈북민이 브로커가 되기도 했어요. 지금은 이런 문제 때문에 몇 년 전부터 탈북민 지원 정책이 바뀌었습니다.
A. 여담인데, 2004년 국회 청문회를 하고 한두 달 뒤에 통일부 관계자로부터 저의 경험과 생각들을 듣고 싶다고 만남을 요청했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탈북민 지원 정책이 바뀐 거예요. 일부분은 저 때문에 정책이 바뀐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충분한 재정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분들께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어요.
A. 해당 탈북 지원 단체 대표는 언론의 주목을 받고, 미국에서 곳곳을 돌아다니며 강연회를 가지며 막대한 후원금을 받았어요. 브로커들로부터 제때에 돈을 못 받아도 상관없었죠.
A. 저도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는 몰랐는데, 카메라가 타인에게서 저에게로 이동하여 장면이 진행됩니다. 저는 관찰자로 갔지만 '기획 탈북'이라는 이슈에 동참한 주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나타난 것이 된 거죠.
Q. 해당 단체 대표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A. 없어요. 다만 그분을 보며 '악'에 대한 고민을 해요. 처음에는 제가 선이고 저쪽은 악이라고 생각해서 그분을 손가락질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를 향했던 손가락이 저를 향하는 것을 느꼈어요. 제 안에 있는 악을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제 안에 있는 선과 악, 밝음과 어둠의 모호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과거처럼 강하게 그 분을 비난하지 않아요. 그 분 주위에서 관계 맺고 있는 분들은 그 분의 선함을 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분의 입장에서는 저를 악하다고 볼 근거가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누가 옳고 그르다는 논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그 대표님이 스스로 자신의 악을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에요. 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제 안에 있는 악을 들여다 본 거예요. 내가 토한 것을 자신이 뒤적거리는 행위는 정말 힘들고 역겨운 과정이죠. 하지만 두 번 다시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A. 보통 대작 다큐멘터리는 10년에 걸쳐 제작됩니다. 저도 한때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었죠.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제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정도의 완성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제 인생 가운데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 충격으로 자기를 미워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그 때의 경험들을 통해 더욱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고 넓은 안목을 가진 것만으로도, 저는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Q. 도입 부분과 결말 부분에서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데, 조금씩 다르더라구요. 결말 부분에서, 죽어있는 여성의 목에 'PRESS(언론)'라는 명찰이 걸려 있는 것을 부각시켰는데 혹시 언론의 죽음을 이야기한 것인가요?
A. 첫 장면에서는 남자가 사진을 찍고 나가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자신의 분신인 카메라를 놓고 나갑니다. 남자의 태도는 과거와 조금 바뀌었지만, 여전히 위험에 빠진 여자를 도와주지는 않죠. 아직도 성숙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차이는 있어요. 첫 장면에서 촬영을 마치고 카메라를 가져간 것은 이익의 도구를 확보한 것입니다. 사진을 기사에 실으면 돈이 되니까요. 반면,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를 내려놓은 것은, 그 여자를 돕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통해 이익을 취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입니다.
《라이프》 지 사진
A. 저는 이 작품을 만들면서 이 사진과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라이프》의 기자처럼 사진을 찍을 것인가, 아니면 사진기를 내려놓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저만의 답을 내렸습니다. 저라면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자를 비난할 수도, 비난할 자격도 없습니다.
A. 무대 위에 쓰러진 여인의 장면에는 두 가지 은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진 기자도 저고, 쓰러진 여자도 저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도,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에도 처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명확히 선과 악으로, 수혜자와 시혜자로 구분지을 수 없는 것이 삶이죠. 두 번째는 언론의 비윤리적인 부분에 대해 비판하고 싶었습니다. 자업자득인 거죠. 언론이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등 원칙과 바른 길을 걷지 않으면, 언론이 위기상황이 올 때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사장될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A.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돈을 뺏기고 얻어맞아 길가에 쓰러져 있습니다. 그걸 높으신 분들이 보면서 그냥 지나가는데, 혼혈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줍니다. 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외면했던 스스로를 돌아보았습니다. 저의 지극히 작은 도움은 당사자에게는 지극히 큰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웃을 향한 사랑과 신을 향한 사랑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걸 얼마 전에 깨달았어요. 저에게는 '강도 만난 자'가 탈북민입니다. 북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나 중국에 있는 탈북민들을 만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하지만 한국에 있는 탈북민들은 스스로의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도울 수 있습니다.
Q. 중국하고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서 기획 탈북을 하는 것이 안 좋다고 했는데, 압박하면 강제 북송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A. 이게 어려운 부분입니다. 조금 전에 저는 《라이프》에서처럼 떨어지는 사람을 촬영하는 기자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만 신중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쉽게 접근하지 말고, 한 번 더 자문해보기를 원해요. 옳은 일인가, 이 일을 했을 때 부작용은 없을 것인가에 대한 자문이 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진오 목사: 강제 북송 반대 운동을 해서 강제 북송이 안 된 사람이 있는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공안이 늘어나고, 그런 일이 벌어질 때 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탈북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강제 북송 반대 운동가들은 유익을 얻는데, 중국 현장에서 탈북을 돕는 분들은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결국 강제 북송이 되고 나서는 책임질 사람이 없게 되고요. 아직까지는 북송 취소 사례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A. 부정적 사례가 긍정적 사례보다 더 많은 것은 사실이예요.
(대담자들의 의견과 기자의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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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도움: 엘리프, 오영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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