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통일과 통합 사이 (2) 베트남의 통일과 통합

베트남의 통일과정

  프랑스는 19세기 중반부터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880년 중반이 되어서야 베트남은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을 경제적으로 수탈하고자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베트남은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한 호치민의 주도 하에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베트남의 독립영웅 호치민 (출처 : http://dcafe.tistory.com/728)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일본이 베트남을 침략했다. 이제 베트남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합심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해나갔고,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베트남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베트남은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향한 외세와의 기나긴 싸움에 돌입하게 되었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heung&logNo=100041873298&viewDate=¤tPage=1&listtype=0)


  일본이 물러가자 호치민은 1945년 9월 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북부 베트남에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다. 동시에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철수를 감시하기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북베트남에는 중국의 장제스의 군대가, 남베트남에는 영국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호치민은 남부 베트남 지역에는 진출할 수가 없었다. 한편 프랑스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다시 베트남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제 1차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는 베트남 전역을 석권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결국 1954년의 제네바 정전협정으로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호치민의 월맹은 북쪽으로, 프랑스는 남쪽으로 철수하기로 하면서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제 2차 베트남 전쟁(1954~1975)

(출처 : http://rokarmy.tistory.com/entry/%EB%81%94%EC%B0%8D%ED%95%9C-%EB%B2%A0%ED%8A%B8%EB%82%A8%EC%A0%84%EC%9F%81-%EC%82%AC%EC%A7%84%EB%93%A4, http://www.english-online.at/history/vietnam-war/vietnam-war-background.htm)

  제네바 협정에서 양국은 베트남 전역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은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고자 총선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북베트남은 남부에서 베트콩을 통한 테러와 게릴라 전법으로 남베트남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에 미국은 베트콩의 게릴라를 진압하기 위해 1962년에 처음으로 특수부대 1만 2000명을 파병하였다. 이후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군 구축함을 공격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개입을 강화한다.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0&aid=0000326702)


  미군은 막강한 화력과 54만 명 수준의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월맹군의 게릴라 전술에 말려 패배를 거듭했다. 1968년 한 해에 미국이 쏟아 부은 전비만 265억 달러였는데 이는 미 군사비의 30%, GNP의 3%정도였다. 그만큼 베트남 전쟁은 경제적으로도 미국에 큰 부담이었다. 뿐만 아니라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전 세계의 반전여론에 직면했다. 결국 미국은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미군이 철수하자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붕괴시키고 통일을 달성했다. 


베트남의 전후 통합 방식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기 시작한 때부터 통일을 이룰 때까지 약 90년 동안 외세에 투쟁해왔다. 이에 따라 피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고 새롭게 들어선 혁명정부를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정치권력을 굳건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통일 직후 남북의 생활수준 격차는 상당했다. 북부는 남부의 높은 생활수준에, 남부는 북부의 열악한 환경에 놀랐다. 따라서 시급히 남북 통합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또 다른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함락 당한 사이공
(출처 : http://cafe419.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0WAl&fldid=O1ho&datanum=638&contentval=&docid=10WAlO1ho63820120503232050)


  정치적 합의를 위해 베트남의 남북 협상단은 1975년 11월 15일부터 20일까지 민족통일자문회의를 개최했다. 이를 통해 최고인민회의가 국가 권력의 최고 기관이 되며 총선거를 실시해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할 것을 합의했다. 그 결과 1976년 4월 25일 총선이 실시되었고, 총 492명 중 북부 출신이 249명, 남부에서 243명이 선출되어 제 6기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했다. 대의원들의 출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북이 거의 비슷한 수로 권력 지분이 배분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의원의 직업도 다양했으며 선거 절차 또한 민주적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6기 최고인민회의는 형식상으로 합법적인 모양새를 띠었다. 


  경제에서는 남베트남까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적용되었다. 통일정부는 여타 사회주의 국가들과 같이 계획경제, 생산수단의 국유화, 집단화정책을 실시하며 남과 북의 경제를 하나로 통합해나갔다. 이러한 경제 조치들은 남베트남에서 부르주아계급을 완전히 척결하고 사회주의의 목표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건설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1978년 3월에 발표된 ‘상행위 금지’는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해 베트남을 통합하고자 했던 통일정부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활력 넘치는 베트남의 모습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1/03/2006110360488.html)


  그러나 이러한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는 매우 비효율적이었고 서방의 경제제재 등으로 인해 베트남은 심각한 경제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베트남 정부는 1986년 경제 개혁 정책인 이른바 ‘도이모이’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경제개방을 통해 자본주의를 받아들였으며, 그 결과 1991년부터 2000년까지의 10년 동안 연평균 7.6%의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또한 2002년 이후에도 7%의 고도성장을 유지해나가고 있다. 이제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국가로 떠오르고 있다. 


구희상

mejunate@nate.com


[참고자료]

임채완, 『분단과 통합』, (서울: 한울아카데미, 2006)

http://ko.wikipedia.org/wiki/%EB%B2%A0%ED%8A%B8%EB%82%A8_%EC%A0%84%EC%9F%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