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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통일의 열쇠, 북일관계의 모든 것 (2)

일본인 납치문제


(왼쪽)대한항공 테러범 김현희와 그녀의 일본어 교사였던 납치 피해자 (오른쪽)다구치 야에코 (출처 : http://news.donga.com/3//20090212/8695238/1)


  1977년부터 83년까지 일본인 11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정부는 납치 사건의 배후에 북한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그러던 중 87년에 일어났던 대한항공 858기 폭발사건의 테러범인 김현희가 일본인 ‘이은혜(다구치 야에코)’에게 일본어를 배웠으며 그녀가 일본에서 납치당했다고 폭로하면서 문제가 대두되었다. 북한은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 그러한 사실이 전혀 없으며 일본 당국과 남한정부가 꾸며낸 정치적 모략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일본은 1991년 5월의 제3차 북일 수교교섭에서 ‘이은혜 사건’의 문제를 제기했으나 현저한 입장 차이를 보이다 결국 1992년 11월을 끝으로 회담은 중단되었다. 


  북한은 남파 공작원들의 신분을 일본인으로 위장시키고 그들의 일본인화 교육을 위해 일본인들을 납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납치 피해자들은 다음과 같다.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cid=504&docId=956665&mobile&categoryId=504)


북일정상회담

  회담은 1992년을 끝으로 중단되었다가 7년만인 2000년 4월에 재개되었다. 이어 8월과 11월에 각각 10차, 11차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뚜렷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02년 9월 17일에 북일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성사되었다. 북한이 북일정상회담에 응한 것은 미국 부시정부의 강경책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였다.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나자 부시 정부에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북미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특히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지목하면서 북미관계의 악화는 절정에 이르렀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북미대립 해소의 출구전략으로 삼았던 것이다. 여기에 북한은 2002년 7월에는 ‘7.1 경제관리개선조치’, 9월에는 ‘신의주 경제특구’를 발표했는데 경제가 고립된 상황 속에서 일본의 경제 지원 또한 절실했다.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45488)


  한편 일본은 정상회담을 통해 북일 관계의 가장 큰 이슈인 납치문제와 미사일문제를 동시에 해결함으로써 고이즈미 정부의 지지율을 반등시키고자 했다. 고이즈미 정부는 경제개혁의 부진으로 지지율 하락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납치문제 해결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또한 일본은 북한의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여 미국으로부터 더 자주적인 입장에서 가장 큰 안보위협을 해소하는데 개입하고자 했다. 북일정상회담 후 발표된 ‘평양선언’을 통해 일본은 납치문제를 사실상 공식화하는데 성공했다.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이 요구한 11명의 납치 피해자 외에 3명을 더해 총 14명의 생사를 확인해주며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정상회담 그 후

  고이즈미 총리는 납치문제를 정상회담 의제에 올리고 사과를 받아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지만,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일본 사회는 피해자 13명 중 8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의혹이 제기되자 대북강경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일본 정부 역시 대북 강경책으로 노선을 급선회하게 된다. 북한은 이러한 일본의 여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납치 생존자 5명의 일본 방문을 허용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들을 다시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서 북일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왼쪽)납치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와 (오른쪽)그녀의 부모 요코타 사키에, 요코타 시게루씨
(출처 : http://www.rachi.go.jp/kr/shisei/radio/message.html)


  2004년 5월에 제2차 북일정상회담이 열렸다. 양국은 ‘평양선언’을 재확인했으며 빠른 시일 내에 수교협상을 재개하는 것에도 합의했다. 여기에 북한은 납치 피해자의 북한 잔류가족 5명을 고이즈미 총리를 통해 일본으로 귀국시켰다. 이로써 북일 간의 납치피해자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북한이 2004년 11월에 일본으로 보낸 납치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의 유골이 가짜라는 판명이 나면서 일본 내의 여론은 더욱 강경해졌다. 이에 대해 북한은 납치문제가 완전히 끝났으므로 더 이상 수교협상에 이 문제를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반면 일본은 아직 납치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이므로 일본의 요구를 북한이 모두 수용하기 전까지는 국교를 정상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북일관계는 양국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납치 피해자 문제로 인해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고 있다. 납치문제는 정치적 차원을 넘어서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되어야할 문제이다. 더욱이 납치문제가 대북정책에 대한 일본 내의 여론과 정서를 악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북한 역시 북일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납치 피해자 문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구희상

mejunate@nate.com

[참고자료]

이종선, “북일관계 개선의 현황과 전망”, 『의정논총』, 제3권1호(2008)

신정화, “북한의 국가전략과 북일관계”, 『북한연구학회보』, 제12권2호(2008)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599&docId=572116&mobile&categoryId=1599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865&docId=68712&mobile&categoryId=2865

http://terms.naver.com/entry.nhn?cid=504&docId=956665&mobile&categoryId=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