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의 역대 통일 정책

- ① 대한민국 정부 출범 ~ 1970년대 -

 

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기자입니다.

오늘은 한국 정부의 역대 통일 정책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통일 정책을 안다는 것은 남북 관계의 역사를 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남북 관계의 정책은 시대 변화와 국제적, 국내적 정세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습니다. 의외로 국제 정세가 남한의 통일 정책 기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되는데요, 오늘은 남북 정책 변화 과정을 각 시대의 흐름 순으로 핵심적이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950년대: 제 1공화국, 이승만 정부 - '북진 통일론', '유엔 감시하의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


'6.25전쟁이 끝난 후,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그 뒤의 '북진', '통일'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출처 : 구글 코리아, '북진통일'

1948년, 5월에 남한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에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당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 측에 자유 총선거를 통한 민중대표를 유엔의 공식 승인을 받은 남한 정부에 보내달라고 의견을 보냈지만 북측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북한은 남한의 요구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여 갔고, 적화통일을 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아예 분단이 된 후, 이승만 정부는 한국만이 유엔이 승인한 한반도의 합법정부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불법적으로 북측을 점거하고 있는 북한 정권을 괴뢰 정부로 규정하였습니다. 또한, 북한 정권이 지배하고 있는 땅을 한국 정권이 회복해야할 땅으로 명시하였습니다. 이런 기조를 바탕으로 이승만 정부의 기본적인 대북 정책은 북진통일, 멸공통일이었습니다. 무력을 통한 공산주의 박멸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한 정부는 당시 북한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던 자유 총선거를 대한민국의 헌법에 따라 실시하여, 남한을 중심으로 한반도 통일 정부를 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북한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2. 1960년대 초반 제 2공화국, 장면 내각 - '남북협상론', '중립화통일론'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부가 붕괴한 뒤, 혁신계 학생들 중심으로 남북협상론이 대두했다.', 출처 : 구글 코리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후, 한국 정치는 다소의 혼란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통일 정책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기존의 기조를 유지하되, '선 경제, 후 통일'의 원칙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합니다. 또한 혁신계, 그리고 학생들 일부를 중심으로 남북 협상론, 중립화 통일론이 대두되기도 하였습니다. 학생들 중심에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와 같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남북한이 서로 교류하고 협상하자는 통일론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국내 정치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북한과의 관계도 많이 진척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 운동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3. 1960년대 제 3공화국, 박정희 정부 - '반공체제 강화를 위한 경제 발전', '국토 통일을 위한 실력 배양', '선 건설, 후 통일'


''선 건설, 후 통일'의 의지가 보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출처 : 구글 코리아, '선건설, 후통일'


4.19 혁명 이후의 혼란의 시기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바로 반공체제를 강화하고, 반공을 국시로 내걸었습니다. 반공을 위한 실력 배양, 국토 통일을 위한 경제 개발 등의 모토는 당시의 군사정권의 국시와 일맥상통 합니다. 이후 제 3공화국 출범 (1963년 12월 17일)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박정희 정부가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통일, 실지회복을 통한 통일, 통일을 위한 경제적 제반 마련 등을 국시로 내걸면서 반공을 위한 경제 개발, 반공 의식 강화 등을 통일 정책으로 내걸었습니다. 이러한 의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선 건설, 후 통일' 슬로건이었습니다.


4. 1960년대 말~1970년대 제 3,4공화국 - '선 평화, 후 통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중국의 마오쩌둥이 악수하는 매우 역사적인 장면이다. 이후 냉전체제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출처 : 구글 코리아, '닉슨독트린'

1960년대 말부터 국제적 냉전기류가 점점 약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으며, 다른 나라에서 역시 반전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1969년,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냉전기류가 본격적으로 서서히 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미국과 중국이 접촉하여 국교를 맺고, 중국과 일본 역시 세계 2차 대전 당시의 중일전쟁으로 끊어졌던 국교를 다시 맺었습니다. 점차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의 접촉이 많아졌고, 국제적으로 냉전기류가 약해지던 시기에 한국 정부는 더 이상 반공 정책을 고수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남북한 사이의 분단이후 최초의 성명인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출처 : 구글 코리아, '74남북공동성명'

이러한 국제적인 변화를 반영한 것이 바로 이 시대의 통일 정책 변화입니다. 그 출발은 바로 1970년 8월 15일 대통령 경축사에서 발표된 '평화통일구상 선언'입니다. 이 선언을 통해서 남한 정부는 북한 정권을 사실상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대한적십자사는 북한과의 인도적 교류를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활동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 정부간의 공식적 문서라고 할 수 있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이후, 남북조절위원회, 남북불가침협정 체결 등은 이전의 북진통일, 멸공통일, 반공 등과는 다르게 평화를 우선시하는 통일 정책 기류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5. 1980년대 제 5공화국 -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 '조국 평화통일'

'전두환 대통령은 국정연설을 통해 민족통일협의기구를 구성하는 등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발표하였다.', 출처 : 구글 코리아,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

이후에도 역시 평화통일을 위한 남한 정부의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은 통일은 '민족자결'과 '민주적절차'를 강조하며 궁극적으로는 '평화적'으로 통일이 이루어져야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방안은 무력 적화노선 및 무력 멸공통일 등과 같은 비정상적인 남북관계 및 한반도 통일 정책을 버리고 민족화합, 민족평화를 실현하여 통일을 하는 방안으로 목표를 굳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1987년 헌법개정에서 역시 평화통일을 헌법상으로 명료히 하였습니다. 헌법전문에는 '조국의 평화통일 사명'을 천명하고 제 4조에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의 수립과 추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85년에 최초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는데, 불과 20년 전 만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성과는 무력 대결구도로 한반도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화 통일과 협상과 대화를 통일 정책으로 중심으로 걸고 꾸준히 노력해온 정부와 인도적 교류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해온 적십자사와 같은 단체들의 노력의 결실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2편에서는 평화통일 정책기조를 유지하는, 그리고 한반도 평화 통일 분위기 정점을 이끌어낸 정부들을 다뤄볼 생각입니다. 그 이후 북한의 핵도발, 미사일 발사, 대북 강경 체제 등을 통한 대북 통일 정책 기류 변화 등에 대한 최근의 경향도 다루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기자였습니다.

 

#출처 및 참고자료

1. 2016통일문제 이해(통일부 통일교육원)

2. 구글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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