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영화 비평 -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 (1)"에서 이어집니다)
평등주의와 사상성
김영미를 통해서 북한의 예술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양 건설현장에서 할당된 작업을 마치고 귀향한 김영미를 찾아간 박장필은, 교예를 취미로 하겠다는 김영미를 “재능을 온 조국 앞에 펼쳐야 하지 않겠소?”라며 설득합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해석하자면, “재능은 온 조국 앞에 펼쳐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북한 미술의 특징 중 하나는 ‘진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짜’의 의미는 일반적인 근대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의미, 즉 작가가 최초로 그린 ‘진품’이라는 의미입니다. 벤야민은 이를 아우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북한은 화가가 최초로 좋은 작품을 완성시키면, 이를 온 인민이 즐길 수 있도록 수없이 모작하여 전 국토로 분배합니다. 이렇게 분배된 모든 작품들은 ‘진짜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을 온 인민이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 이처럼 강고한 평등지향성 사회주의의 기본 사상 중 하나입니다. 북한의 정치, 경제 등의 타 영역에서는 이러한 평등성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예술의 영역에서는 사회주의적 평등주의가 짙게 배어있습니다. 그런데 김영미의 교예 실력은 모작이 사실상 불가한 것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즉 평등주의를 더 잘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의 심장부인 평양으로 호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작품이 굳이 더 많은 인민들에게 보여지면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많은 인민들에게 보여져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수많은 모작들에게 ‘진짜’라는 타이틀이 부여되는 것일까요? 사회주의 예술관에 평등주의가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사회주의 예술의 또 다른 특징 때문입니다.
주인공 영미의 실력을 알아채고, 그녀를 평양으로 데려오기 위해 힘썼던 박장필
사회주의 예술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상성이 강조되어 있는 프로파간다라는 점입니다. 좋은 작품이 사회에 내보여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일반적이지만, 그 구체적인 목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서 각기 다릅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작품이 사회에 알려지는 것은 그 값어치가 향상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많은 수요에 노출될수록 작품의 희소성은 더욱 증가하고, 가치 또한 증대됩니다. 반면 사회주의 국가에서 작품이 사회에 알려지는 것은 그 작품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과 사상성이 더 많은 사람에게 홍보될 수 있는 프로파간다로서의 가치가 생성·향상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김영미의 공중교예는 앞서 살펴봤듯 비상하는 조국을 상징합니다. 세계적 수준의 교예는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북한 민중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 충분히 이용될 수 있고, 바로 이 지점에서 김영미의 공중교예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져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름다움과 함께하는 사상성, 이를 홍보하기 위한 평등주의, 이것이 북한 사회주의 예술의 특징이며, 김영미의 공중교예는 이에 완벽히 부합합니다.
이상향 평양
<김동무>에서 주목해야 할 주요 테마 중 또 다른 하나는 ‘평양’이라는 공간입니다. 평양은 김영미의 꿈이 생성된 곳이자 실현되는 곳으로, 불가능해보이던 개인의 바람을 현실로 펼쳐놓을 수 있는 마법의 도시입니다. 이러한 평양의 모습은 그저 사회주의적 공간으로만 포장된 것이 아닙니다.
영화 초반부 평양으로 도착한 김영미는 “이야, 주체사상탑!” 하며 평양에 감탄합니다. 영화는 뒤이어 천리마동상,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동상 등을 자랑스럽게 비춥니다. 그러나 김영미가 평양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는 것 혹은 영화가 평양의 모습을 담는 것은 평양이 품고 있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홍보하고자 함이 아니라, 평양에 감탄하는 김영미의 눈을 통해 관객들도 ‘평양의 모습’을 우러러 보게끔 하는 것입니다. 영화는 평양이라는 공간 자체가 이미 특별하다는 식으로 평양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평양은 어떤 ‘뛰어남’이 수렴되는 특별한 공간입니다. 따라서 영화의 상당 부분은 평양을 무대로 펼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방에 머물던 김영미는 지속적으로 평양으로 소환됩니다. 초반부에는 뛰어난 광부로서, 중반부에는 뛰어난 곡예사로서 평양으로 소환됩니다.
또한 평양은 앞서 언급한 예술작품의 평등주의를 실현하는 직접적인 매개체가 됩니다. 김영미의 가족들과 지인들은 김영미의 공연을 보기 위해 평양으로 한 걸음에 달려오는 장면에서 이러한 점을 단편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특별함의 도시’ 평양이 가지는 위상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격상되고 고착화됩니다.
여성의 상징성
<김동무> 또한 여느 북한 영화와 마찬가지로 당국의 철저한 통제와 감시 하에 촬영·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예술작품이 아니라 선전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 선전작품의 전반적 특징 중 하나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설정된다는 점입니다. <김동무>에서 탄광 노동자인 김영미도 그렇고, <한 녀학생의 일기>의 주인공 ‘수련’이나, <꽃파는 처녀>의 ‘꽃분이’, <피바다>의 ‘순녀’, <당의 참된 딸>의 ‘강연옥’도 마찬가지입니다.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와 마찬가지로, 북한 예술작품에서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일은 흔하다.
북한 선전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된 여성의 의미는, 이른바 사회적 약자입니다. 북한 당국은 사회 통념상 큰 비중을 차지 못하는 인물의 서사를 통해 인민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며, 그 메시지는 북한이 인민에게 항시 교양하는 ‘사상성’, ‘당성’, ‘조국애’, ‘민족애’ 등입니다. 국가가 지향하는 가치를 온몸으로 지켜내거나 완수해내는 여성의 이야기는 사회의 실질적 약자들에게는 ‘하면 된다’는 긍정성을, 일반적인 사회 구성원들에게는 ‘나보다 약한 사람도 이렇게 하는데!’와 같은 자극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극은 북한의 선전작품이 이른바 ‘사회정치적 생명체’로서의 인민의 이야기만을 다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을 크게 직장과 같은 사회적 공간에서 형성되는 공(公)적 정체성과 가족과 같은 개인적 공간에서 형성되는 사(私)적 정체성으로 나누어보면, 전자에서 여성은 남성과 다를 바 없는 지위를 부여받습니다. 실제로 북한의 사회적 성평등 의식은 높은 편인데, 가령 고된 육체노동이나 국정 영역에서도 혁명을 위한 헌신이 가장 강조되므로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아선 안되고 남성 또한 여성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물론 실상은 남성 위주입니다)
그 결과 여성이 사적 영역에서 약자로서 겪는 실제적인 폭력이나 억압은 은폐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은폐라는 개념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깡그리 무시되어 아예 그런 것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북한 예술작품·선전작품에서 여성이 갖는 상징성은 이 지점에서 명확한 한계를 지닙니다. 애초에 여성이 주인공으로 선택되는 것 자체가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의 지위를 드러내는데, 여성이 철저하게 당이 강조하고자 하는 교훈을 위해 도구로 이용되기만 하는 것입니다.
김영미라는 상징
<김동무>에서 비상, 날개, 공중 4회전, 사상성, 평양, 여성이라는 주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김영미’라는 거대하고 복합적인 상징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딛고 일어서 하늘을 나는 김영미는 인민들의 조국을 상징하며, 이를 열심히 보조하는 인민들은 날개가 됩니다. 공중 4회전이라는 단일한 동작은 북한적 꿈을 상징하며, 이를 완수해내는 김영미는 북한이기도 하며 능력을 갖춘 인민대중 혹은 당을 상징합니다. 공중교예를 통해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김영미는 핵 등 국가전략을 통해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북한적 존재이고, 온 인민을 대표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인 동시에, 평양으로 호출되는 특별함이다. 김영미는 그야말로 북한이 인민들에게 심어주고자 하는 이상적이고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비상하는 꿈을 꿨던 김영미를 연출한 장면
물론 김영미라는 인물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과 결국 이것이 해피엔딩으로 지속되었다는 점은 기존의 북한 작품에서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개인적 욕망에 충실하고 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도 된다는 뉘앙스가 영화 전반에 걸쳐있는 것은, 북한 사회 내적으로 그만큼이나마 개인적 자유가 새로이 생겨났기 때문이며, 김영미는 인민적 욕망의 상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는 논리적 결함이 존재하는데, 김영미의 교예는 단순히 개인적으로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북한의 예술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일반적 특징 중 하나는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이 당성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이 요구하는 것이 주인공이 바라는 것과 다를 때 내적 갈등이 유발되며, 그 갈등은 결국 당을 위해 행동하는 방향으로 봉합됩니다. 교예를 하고 싶은 김영미의 욕망이 주인공이 바라는 것이고, 광부를 하는 것이 당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분명 김영미가 교예단원이 된 것은 주인공의 욕망이 승리한 이례적인 줄거리입니다. 하지만 김영미가 교예단원이 된 것은 주인공의 욕망이 아니라 당의 요구였습니다.
김영미는 분명 교예를 하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영화 중반부까지는 교예단원이라는 주인공의 욕망과 광부라는 당의 요구가 부딪쳤습니다(이는 특히 아버지의 희망사항과 겹쳤습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부터 김영미는 교예단원이 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고, 광부로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북한의 일반적인 영화는 이러한 다짐이 형성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다루었을 것이나, <김동무>에서는 그러한 과정이 생략된 채 지금 선 자리에서 열심히 살겠다는 김영미의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그려졌습니다. 지금껏 북한 영화가 다루어왔던 줄거리를 축약해버리고, 새로운 국면을 조성한 것입니다.
만약 주인공의 욕망과 당의 요구의 대결에서 주인공의 욕망이 승리하려면, 김영미는 교예단원을 향한 꿈을 버리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예술축전 이후에는 주인공의 욕망이 사실상 소멸함으로써 주인공의 욕망과 당의 요구 간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사라졌습니다. 이 지점에서 당의 요구는 김영미가 광부로써 일하는 것에서, 능력을 살려 교예단원이 되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개인이 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당이 개인을 적극적으로 호출하는 흐름이 만들어졌습니다.
탄광촌에서도 교예를 좋아해 교예를 했던 김영미. 그녀는 교예를 하고 싶었으나, 결국 그녀를 끌어낸 것은 당이었다
김영미를 끌어낸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니고 평양의 교예단원들입니다. 즉, 김영미가 교예단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김영미의 갈망과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영화 전반부까지만 통용되는 설명일 뿐, 더욱 직접적으로는 그녀의 출중한 능력을 교예단원들(조국)이 알아주었기 때문이고, 그가 교예단원이 되기를 교예단원들(조국)이 바랐기 때문입니다. 김영미에게는 훌륭한 교예단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김영미는 이러한 기회를 잘 붙잡았으며, 교예단원들(조국)은 이를 허투루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자유는 오늘날의 북한에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가령 북한에서 화가가 되고 싶으면 열심히 그림을 연습해서 평양미술대학에, 교사가 되고 싶으면 김형직사범대학으로 갈 수 있습니다. 김영미는 교예단원이 되고 싶어서 교예 연습을 열심히 했고, 그 노력은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물론 오늘날 북한에서 예체능은 어느 정도 잘 살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일일 수 있고 영화 속에서도 박장필의 가족을 통해 어느 정도 그렇게 표현되는데, 이에 북한 당국은 오히려 김영미의 이야기를 통해 “열심히 노력하여 능력을 갈고닦으면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조국이 이를 알아준다”는 점을 홍보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물론 무언가를 홍보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 무언가가 결핍되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당이 개인에 우선하는 구도는 유지된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당이 개인을 적극적으로 호명하는 모습으로, 개인이 당에 고개숙였던 기존의 모습과는 달랐을 뿐입니다.
“출중한 재능을 숨겨선 안된다”는 것은 앞서 사회주의 예술관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출중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그 재능을 만방에 펼치고자 하는 욕망을 품는다면, 이것은 북한에서도 크게 환영받을 일입니다. 북한은 뛰어난 교예 실력을 바탕으로 교예단원이 되고자 했던 김영미의 사례를 통해 온 인민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조국의 부름을 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북한 인민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는지는 북한 사회에서 살아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북한적 꿈들이 뒤섞인 거대한 상징인 김영미와, 그런 김영미의 이야기를 그려낸 ‘상징의 향연’ <김동무>를 통해 북한이라는 국가의 몇 가지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추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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