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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한국전쟁 고아 한상만 씨, 암 투병하며 북한 고아를 돌보다 떠난 이야기


안녕하세요, 제7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임혜민입니다.

지난 번에 북한어린이 복지법안에 대한 소식을 전해드린 것을 계기로 저 또한 북한어린이들의 인권과 관련 사회문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로서 보호되어야 마땅하고, 특히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북한어린이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어린이를 돕는 국내외 단체들이 많은 것을 깨닫고, 이를 조사하던 와중에 한국전쟁 때 고아가 된 본인의 경험을 떠올리며 북한 고아들을 돌보다 떠난 고(故) 한상만 씨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한상만 씨는 미국에서 성공한 이후에 그 삶에 안주하지 않고 아픈 과거를 승화시켜 북한 고아들을 돌보는 삶을 택했습니다. 그의 특별한 인생 이야기를 함께 살펴볼까요?

 

한국전쟁 고아에서 미국 입양아로

 한상만▲ 한상만 씨는 생전에 자신의 고아 시절 사진을 이따금 찾아보았다고 한다.(출처:쿠키뉴스에서 재인용)

한상만 씨는 한국전쟁 당시 피란을 떠났다가 여섯살 때 부모를 놓치고 전쟁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린 소년 시절 구걸로 힘겹게 연명하였고 낯선 농가에서 길러졌다고 합니다. 1954년, 그는 열두 살이 되어 의사의 꿈을 안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고 약제법을 배우고 싶다며 서울대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이를 계기로 서울대 재건 사업 총책임자였던 미국인 아서 슈나이더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2시간 넘게 한상만 씨의 사연을 들은 슈나이더 교수는 이후 계속 한 씨를 후원하다가 1961년 미국 귀국 당시 한 씨를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슈나이더 교수는 한 씨를 입양하기 위해서 독신은 입양을 할 수 없다는 당시의 법을 개정하고자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노력했다고 합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한씨의 입양을 청원하는 특별법에 서명하면서 한씨는 북한 고아에서 미국시민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스탠포드 MBA를 마치고 사업가로 성공하였습니다.

한 씨는 1995년에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인 고아들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기 때문에 북한 당국자들에게 고아원을 가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북한 당국자들이 "북한에는 고아가 없다"라고 주장하며 고아원에 데려다주지 않았지만 이후 평양 근처 고아원에 갈 수 있었고, 고아원을 보면서 고아를 돕겠다는 대학 시절의 꿈 다시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와 사업에 몰두하고 생활하면서 그 꿈을 잊게 되었습니다.

 

▶ 골수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새 삶을 택하다.

 한상만▲ 한 씨는 북한뿐만 아니라 탄자니아, 캄보디아 등에 있는 고아들도 지원하였다.(출처:연합뉴스)

그러던 한상만 씨는 어떻게 북한 고아를 돌보게 되었을까요?

2002년 한 씨는 가슴에 통증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골수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기껏해야 3~5년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더 늦기 전에 대학시절부터 가졌던 꿈을 이뤄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꿈은 위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외국 고아를 돕는 일이었지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삶의 목표와 살아야 할 이유를 일깨워주었다고 합니다.

 한-슈나이더국제어린이재단▲ 한-슈나이더국제어린이재단은 북한 아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린다.(출처:공식홈페이지)


한 씨는 그 길로 집과 가산을 처분했고, 5만 달러를 출연하여 한-슈나이더국제어린이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AP통신과 CBS방송 등을 통해 미국 주류 사회에 탈북 아동의 실상을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한 씨는 미국 의회에 '탈북고아 입양법안' 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과 로비 활동을 벌이는 등, 물심 양면으로 북한 고아를 위하여 자신의 여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보육원 건설과 로비를 위해 밤낮 전화통을 붙잡고 살면서도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정신적으로 너무나 행복하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 씨는 생전에 중국을 헤매는 12세 북한 고아의 사진을 컴퓨터에 붙여놓고, 이를 보면서 12세 당시 고아였던 자신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한 씨는 말기 암 판정을 받은 이후 기존에 선고받은 3~5년보다 훨씬 오랜 시간동안 왕성하게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지인은 "그는 고통이 너무 심해 움직여선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활동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누구도 그 사실을 잊게 된다. 그게 그를 살아있게 하는 힘일 것이다."라고 당시 한 씨의 모습을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한 씨 자신도 북한 고아를 돕기 위하여 자신의 삶이 연장되었고, 그 일이 자신에게는 치료약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 씨는 의사들이 선고했던 것보다는 오래 살았지만 항암치료에 큰 진전이 없었고, 2012년에 골수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 한-슈나이더국제어린이재단(HSCIF)

한-슈나이더국제어린이재단▲ 한-슈나이더국제어린이재단(HSCIF) (출처:공식홈페이지) 한상만 ▲ 고(故) 한상만 씨의 좌우명(출처:공식홈페이지)

한상만 씨는 세상을 떠났지만, "인생은 사랑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인생" 이라는 그의 좌우명을 기억하는 여러 지인들이 그의 사명을 이어받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슈나이더국제어린이재단▲ 재단이 후원하는 캄보디아 아동의 모습(출처:공식홈페이지) 탄자니아▲ 재단이 후원하는 탄자니아 아동의 모습(출처:공식홈페이지)

한-슈나이더국제어린이재단(HSCIF)은 북한 사리원과 평성 보육원 어린이들에게 포장음식 수십 만 개와 겨울옷 수천여 점을 보내고, 탄자니아·캄보디아 등에 보육원을 짓는 일도 지원한다고 합니다. 재단에서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 고아들을 위하여 뉴질랜드와 한국에서 준비해 간 초유와 의약품 외에 평양에서 구입한 과자와 빵, 강냉이 국수, 두유 등을 평성 지역에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활동 기금 마련을 위하여 골프대회를 열기도 하고, 기금 마련 만찬 등 각종 모금 활동도 벌이고 있습니다. 

북한 고아를 돕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고 합니다. 북한 당국이 재단의 지원물품 모니터링을 막아 물건을 보내지 못하는 일도 생기고, 북한의 로켓 발사 등 한반도의 긴장이 팽팽해 질 때에는 인도주의적 지원 또한 주목을 받기 때문에 정치적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슈나이더 교수가 고아였던 한 씨를 도왔던 것처럼, 한 씨가 세운 한-슈나이더국제어린이재단 또한 여러 방면으로 북한 고아를 포함한 국제 고아들을 돕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 씨의 사연을 들으며 단 한 사람의 결심과 활동도 주변 사람들과 전 세계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파급력을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마주하며 오히려 타인을 위한 삶을 택하는 그의 모습에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마다 각자의 인생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그렇지만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돌아보는 것은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한 씨의 사연을 읽고 독자 여러분도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의미 있지 않을까요? 이상 대학생 기자 임혜민이었습니다.


한-슈나이더국제어린이재단(HSCIF) 홈페이지

한-슈나이더국제어린이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