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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리고 2+4조약 -독일통일에서 얻은 교훈


안녕하세요 제7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임혜민입니다.

통일법 연구회를 취재한 지난 기사를 통해서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법제적 논의를 함께 살펴본 바 있습니다. 법문에 적힌 한 줄의 문장은 곳곳에서 실현되어 사회의 많은 부분을 바꿀 수 있는 커다란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법은 이러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통일에 앞서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과 통일 시대에 적용해야 할 법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계속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이룬 국가가 어떤 법제적 논의를 거쳤는지 살피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1990년 가을 2+4조약에 서명함으로서 마침내 독일은 통일을 이룬다

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의 독일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 등 격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통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통화동맹 등으로 독일 통일의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상황이었고, 통일 이전에 독일을 둘러싼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 독일에 대한 국제적 지위를 결정하고 통일 독일의 영토와 군사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동·서 독일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 외무장관이 모여서 2+4 외무장관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회의는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최종 합의 문서로서 2+4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2+4조약은 '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이라고도 불립니다.


2+4조약▲ 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출처:Political Archive of the German Foreign Office)  

2+4조약이 다루는 내용의 큰 맥락은 향후 남북 통일 과정에서 고려하고 논의해야 할 부분과도 통하는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통일 선배라고 볼 수 있는 독일이 체결한 2+4조약의 내용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잘된 점과 시행착오를 빚은 점을 모두 살핀다면 남북 통일을 준비하는 데에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2+4조약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요?

2+4조약은 독일 통일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주권 문제, 군사적 문제, 영토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선 독일은 2+4조약으로 인하여 주권을 완전히 되찾았습니다. 독일 이외에 조약에 참여한 4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의 동맹을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된 것이죠. 

독일은 더 이상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기 위하여 군사적인 문제 또한 2+4조약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독일군의 규모는 370,000명으로 제한되었고, 핵확산금지조약이 동서독 모두에 대해 적용되었습니다. 동독 지역과 베를린에는 외국군, 핵무기 및 핵무기를 장착할 수 있는 무기가 금지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약 체결 이전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이 동독 지역의 방어를 맡았으며, 이는 1994년 소련군이 동독 지역에서 철수하기 전까지 이어졌습니다. 대신 소련군이 남아있는 기간 동안 서베를린에는 나토군이 주둔하였습니다. 소련군의 주둔과 철수에 관한 비용은 서독 정부에서 지원하였다고 합니다. 

2+4조약은 독일의 국경을 확실히 정하여 미래 독일이 통일하였을 때에 일어날 수 있는 영토 분쟁을 방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독일의 영토는 동독, 서독의 영토 및 베를린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독일과 폴란드 간의 국경선 문제는 독일 통일을 방해하는 대외적 장애요인 중에 가장 큰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기존의 오데르-나이세 선을 그대로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으로 인정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오데르 나이세선▲ 통일 독일의 영토 분쟁 방지를 위해 인정한 오데르-나이세 선(출처:경향신문) 헬무트 콜 총리▲ 독일 통일을 추진하고 2+4조약을 일구어낸 헬무트 콜 총리(출처:경향신문)


이렇듯 2+4조약은 독일 통일에 대해 첨예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주변국과의 분쟁을 방지하고, 독일의 입지를 견고하게 다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느꼈습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의 협조를 얻어낼 수 있었던 2+4조약 체결의 비하인드 스토리

세계 2차 대전 이후에 서독정부는 주변국의 반대를 의식하여 통일 문제에 대해 거론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러나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기회삼아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앞장서서 노력하였습니다. 그 의지를 보여주는 첫 번째 움직임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3주가 지난 시점에 발표한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입니다. 이는 콜 총리를 필두로 한 서독정부의 독일 통일 의지를 보여주며, 이러한 의지가 2+4조약을 이끌어냈습니다. 

서독정부가 생각하기에 독일 통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의할 만한 유일한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하여 초기부터 미국이 요구하는 조건을 전폭 수용하였고, 그 결과 미국의 협조를 받아 주변국들을 설득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하여 독일은 유럽 통합을 신속하게 추진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2+4조약의 군사적인 문제에도 언급하였듯이 통일 독일은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여 영국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소련은 독일이 통일하였을 때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부터 탈퇴한다고 약속해야만 독일 통일에 동의하겠다고 요구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이를 거절하고 통일 독일의 NATO 잔류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1990년 7월 있었던 독·소 정상회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통일 독일의 NATO 회원국 잔류에 동의하면서 이러한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었지요. 이외에도 오데르-나이세 선의 인정, 통일 독일 병력의 37만 명 선 유지, 90억 달러의 원조제공 등을 약속하여 소련의 동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소련은 마지막 순간까지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독일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동의를 구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이 영국 및 프랑스와 연합하여 압박함에 따라 결국 소련도 독일통일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체결된 2+4조약에 대해 2+4회담과 조약은 사실상 형식적 절차에 불과하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조약 체결 이전에 동서독이 이미 통일에 확인하였고, 미국과 서독이 관련국들과 양자협상을 통해 협조를 구해놓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재확인하고 동서독 2개 당사자와 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의 4개국이 함께 조약으로서 이를 명문화하여 주요한 사실을 정리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4조약,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우리나라 또한 통일에 앞서 주변국들과 군사적 문제, 영토 문제, 주권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쟁점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과 관련국 간의 관계, 북한과 관련국 간의 관계를 각각 따져보고 통일 한국과의 새로운 국제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은 필수적일 것입니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국의 통일에 반대하는 국가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소련의 반대를 저지하고 통일을 이룬 독일의 선례처럼 현명한 외교 전략을 통하여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통일에 대해 배우고 생각하면서 통일이라는 문제가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것과 같은 자세로 다자간의 외교 관계를 잘 풀어나가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통일은 다른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결코 한국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나아가 협조를 얻어 통일을 지향할 때에 우리는 더욱 확실하게 하나 될 수 있지 않을까요? 

2+4조약을 보며 한국의 통일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고민할 수 있어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상 제7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임혜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