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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이산가족상봉행사의 조속한 개최를 기원하며①(부제: 한눈에 보는 이산가족)

(60년만에 만난 남매가 서로를 끌어 안은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4-02-20, ⓒ이산가족상봉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2월, 우리는 64년 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고작 11시간 밖에 만날 수 없었던 이산가족상봉의 현장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같은 땅 위에 살고 있는 가족을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비극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60여 년을 살아온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다가오는 여름 햇볕이 새삼 무겁게까지 느껴집니다. 

 위와 같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을까요? 5월의 첫날, 북한이 유엔 인권이사회의 1차 보편적 정례검토(UPR)권고안 가운데 이산가족들의 생사확인과 통신, 정기적인 상봉보장, 이산가족 상봉 촉진을 위한 조치 채택 등 남북 이산가족 문제와 관련한 권고안 등 81개를 수용했다는 소식이 외신(미국의 소리방송(VOA))으로부터 전해졌습니다. 이는 상봉행사 개최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이산가족들을 위한 작은 선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물론 북한이 위의 권고안을 수용했다고 해서 곧바로 이산가족상봉 행사가 진행될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산가족의 고령화 문제가 대두되면서 상봉행사의 조속한 재개와 정례화가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고 우리 정부 역시 드레스덴 선언으로 대북화해협력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북한으로부터 긍정적인 소식이 전해질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개최될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제20차입니다. 69년이라는 분단의 세월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지만,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시기가 속히 도래하기를 기원하면서 지금까지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그 흐름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최초의 상봉]



 상봉의 역사는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남북관계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1970년 초부터 '1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회담(1971)'과 같은 남북 적십자사 간의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어 왔지만, 남북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별다른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985년, 난항을 거듭한 끝에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이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측 35가족, 북측 30가족이 ‘고향방문단’이라는 이름으로 각각 평양과 서울을 방문해 분단의 한을 풀었으며, 이 행사를 통해 많은 이산가족들이 헤어진 가족을 빠른 시일 내에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게 됩니다. 

그러나 상봉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 향후 전개될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우리 측의 제의를 북한이 보류, 거부하면서 상봉행사는 또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최초의 상봉행사 이후 상봉의 항로에 안개가 드리워지면서 향후 15년 동안 어떠한 상봉행사도 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산가족들의 가슴마다 움텄던 상봉의 희망은 그렇게 꽃 한번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 채 스러졌습니다. 

하지만 2000년,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은 상봉행사의 항로를 뒤덮은 안개를 걷어내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의 결과가 발표된 6.15공동선언문에서 남북은 이산가족 문제 등 인도적인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로 합의하였고 이후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어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생사 및 주소확인, 서신 교환 등의 시범적 사업이 논의되었습니다. 그 결과 2000년 8월부터 역사적인 상봉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역대 이산가족 상봉횟수]



 이산가족 상봉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그려지는 이미지는 아마 눈물바다가 된 상봉장일 것입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이산가족과 북측 이산가족이 한자리에 만나서 상봉하는 것을 ‘직접상봉(대면상봉)’이라고 합니다. 본격적인 상봉의 길이 열린 2000년부터 시작된 직접상봉은 올해 2월을 마지막으로 총 19차례 실시되어 약 1만 9천명의 이산가족들이 상봉의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 현재는 실시되고 있지 않지만 직접상봉 외에 '화상상봉'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화상상봉은 대면상봉이 어려운 고령 이산가족을 위해 2005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07년을 마지막으로 총 7차례 진행되었으며 이를 통해 약 3,748명(557가족)이 그리운 가족을 영상으로나마 만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2000년 제1차 이산가족상봉과 함께 시작된 서신교환은 총 4회(679통) 실시되었으며 이는 2003년을 종점으로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종합해봤을 때 현재 이산가족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는 오직 직접상봉 뿐이며, 이마저도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이러한 와중에 북한이 유엔인권이사회의 1차 보편적 정례검토권고안을 수용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참 희망적인 메시지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대 이산가족 교류 현황]



 지금까지 개최되었던 남북이산가족교류현황 통계를 그래프로 만들어본 결과, 이산가족교류는 그 당시의 남북관계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북관계가 비교적 원활했던 김대중, 노무현정권 시기의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살펴보면, 상봉행사가 매년 최소 1번에서 최대 3번까지 연례적으로 꾸준히 개최되어 왔으며, 상봉 인원 역시 연평균 2,000명에 달할 정도로 많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08년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도발수위가 높아지고 새로 집권한 이명박정부가 원칙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펼치게 되자 남북관계는 경색국면에 접어들게 되었으며, 같은 해 7월 금강산관광객 피살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잠정 중단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상봉행사는 다음해인 2009년 추석을 계기로 재개되었지만 상봉행사 인원은 이전과 비교하였을 때 거의 반토막으로 줄어들었습니다. 2010년에도 비슷한 숫자로 상봉행사가 재개되었지만 2011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에 치닫자 이산가족상봉행사는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우리정부는 이산가족상봉행사 재개를 위한 실무접촉을 지속적으로 제의했지만 북한의 무응답 및 거부로 성사되지 않았으며 상봉행사가 재개될 것이라는 기약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014년 1월 24일, 침묵으로 일관하던 북한이 먼저 이산가족상봉을 제의하였고 우리 측이 이를 즉각 수용함으로써 2014년 2월 20일, 이산가족상봉행사가 3년 4개월 만에 재개되었습니다. 이 날 총 723명의 이산가족이 금강산에서 혈육의 정을 나눴습니다. 60여 년 동안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는 그 기쁨, 과연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들에게 허락된 만남의 시간은 고작 11시간. 이는 우리에게 참 많은 의미를 던져줌과 동시에 우리에게 '왜 통일이 되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안겨줍니다. 


[역대 이산가족 상봉장소]

 


 '이산가족 상봉장소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강산'이라고 대답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애초부터 금강산에서 개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창기 상봉행사(1,2,3차)는 남과 북 양측 100명 씩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오가는 상봉단 교환방식으로 진행되어 서울의 센트럴시티(밀레니엄홀)와 평양의 고려호텔에서 각각 개최되었습니다. 하지만 제4차 상봉을 앞두고 북한은 우리정부에게 상봉장소를 금강산으로 바꾸고, 상봉단 교환방식이 아닌 양측이 순차 방문하는 방식으로 개최하자고 요구하게 됩니다. 이는 이전 상봉행사를 통해 서울에 방문한 북한주민들이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에 놀라고 북으로 돌아가 이에 대한 입소문을 퍼트리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우리정부는 북한의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였고 그에 따라 4차 상봉행사부터 가장 최근이었던 19차까지, 모든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금강산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앞으로 진행될 제20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역시 금강산에서 개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산가족상봉, 지금까지 19차례 진행되어왔지만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달래기에는 정말 터무니없이 부족한 숫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습니다. 정치와 이념의 문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산가족문제, 그에 따라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상봉행사, 로또에 맞먹는 상봉 대상자 추첨, 그리고 이산가족 고령화와 그에 따른 사망률 증가까지.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상봉이 재개될 그날만을 학수고대하며 살아가고 계신 7만 이산가족 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내년이면 분단의 역사가 70년이 됩니다. 70이라는 숫자 안에 녹아있는 이산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유엔인권이사회 권고안 수용이라는 북한의 작은 움직임이 진정성 있는 움직임으로 확대되어 '제20차 이산가족상봉행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그래서 이산가족들에게 슬픔보다는 기쁨으로 차오르는 한해가 되기를 분단국가 국민의 일원으로서 소원해 봅니다. 이상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7기, 남궁바다 기자였습니다.



인포그래픽 ⓒ남궁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