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강경책과 유화책, 어떻게 해야 하나요? ②
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9기 황주룡 기자입니다. 지난 기사에서는 햇볕정책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인 대북 연계의 원칙과 유화책을 비교해 본 다음, 한미의 대북 정책 기조를 냉전기와 탈냉전기로 구분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대북 햇볕정책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를 이어 가도록 해 보겠습니다. 우선 햇볕정책은 결과의 성패 여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던 정책입니다. 그 당시에도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일단 햇볕 정책 자체를 놓고 보면 한국과 미국이 일정 부분 정책적으로 협조를 하였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의회 야당의 정책 검증 능력 부족이고, 다른 하나는 미 행정부의 성격 변화입니다.
의회 야당의 정책 검증 능력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미국의 경우를 살펴 보면, 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되는 과정에서 수시로 청문회가 열립니다. 그리고 청문회에서 정책 집행 관련 당사자들을 의회에 불러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질문도 하고, 정책을 시행할지 말지에 대한 문제도 논해보고, 예산 문제도 결정하면서 의회가 행정부 정책의 상당 부분을 구체적으로 검증합니다. 심지어는 의회에서 행정부 정책을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의회 야당의 정책 검증 능력이란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회의 성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햇볕정책의 기본 목표가 잘 설정된 것인지, 원래 목표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국회 차원에서 검증하는 절차가 미약했습니다. 효과적인 정책적인 검증 대신 공격적인 정치 공세로 인해 많은 논란만 불거지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햇볕정책의 의의를 잘 살리고, 문제점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한국 정치체제 구조의 문제로 인해 정책의 구체적인 실현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다음은 미 행정부의 성격 변화입니다. 햇볕정책을 추진할 당시의 미국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였습니다. 민주당 행정부를 말합니다. 미국 내에서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국제주의적인 정책을 표방하며, 공화당은 고립주의적인 정책을 표방합니다. 국제주의와 고립주의가 무슨 말이냐고요? 미국 외교 전통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 개념입니다. 국제주의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 및 패권 국가로서 세계의 평화·안보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 미국이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고립주의는 미국이 다른 나라들의 안보를 위해 예산 지원을 해 주거나, 미군을 해외에 파병하는 등의 행위를 경계합니다. 대신 미국 국내 문제에 집중하고자 하는 것이 큰 골자입니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고립주의 성격이 강하고, 민주당은 국제주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클린턴 행정부는 민주당 행정부였고, 국제주의 성격이 강항 외교정책을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즉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도 북한에 철저한 관여를 하는 것이니, 한국과 정책 흐름 상 호흡이 잘 맞았던 것입니다.
그 흐름은 2000년 1월부터 부시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끊기게 됩니다. 그동안 클린턴 정부가 해 왔던 대북 정책에 대해 전면적인 재검토에 들어갑니다. 외교정책을 보수주의적인, 고립주의적인 관점에서 재편하는 것이죠. 그래서 부시 정부는 클린턴 정부가 북한과 체결한 94년 당시 제네바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기 시작합니다. 미 행정부가 북한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다 보니 김대중 정부도 북한을 상대할 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한미 간의 대북 정책 공조가 잘 이뤄져야 일을 진행하기 수월하지만, 차질이 생겨 버립니다. 부시 행정부 또한 대북 햇볕정책에 노골적으로 불편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연계 원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북한이 핵 개발 등의 나쁜 행동을 행한 것에 대해 물질적인 보상으로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정황이 맞물리면서 대북 햇볕 정책은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공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합니다.
햇볕정책의 성공 여부와 관련하여 또 하나 따져봐야 하는 것은 북한의 상황입니다. 햇볕정책의 목표가 제대로 달성될 수는 있는지 북한 내부의 상황을 봐야하는 것이죠. 햇볕정책의 기본 가정은 우리가 북한에 대해 지속적인 호의를 보이면 북한도 얼어붙어 있던 자세를 풀고 우리와 대화하여 화해하는 길을 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북한 내부의 상황에 따라 대북정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한 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햇볕정책 이전의 대북정책인 북방정책의 양상을 살펴 보겠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북방'외교' 차원에서 진행하는 과정에서 7·7 선언을 제시합니다. 당시 시기만 하더라도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혁 개방을 하던 상황이었씁니다. 북한도 대내적으로는 고난의 행군을 필두로 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동구권 붕괴로 인해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다 한국이 러시아, 중국과 수교하면서 고립이 더욱 심화됩니다. 그래서 북하는 완전한 고립을 피하기 위해 남한과도 일정하게 교류를 하는 방식으로 7.7 선언을 수용하고, 92년에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도 채택하게 됩니다. 물론 이후에 채택된 선언을 무시하고 핵무기 개발을 하기는 했습니다. 아무튼 노태우 정부 당시에는 북방외교라는 형태로 대북 정책의 골간이 짜여져 있었습니다.
그 후에 나온 대북정책의 큰 기조가 바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입니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주장하던 시기였습니다. 김정일의 선군정치는 94년에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시작됩니다. 원래 김영삼 정부도 김일성과 정상회담을 하려고 준비를 해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구체적인 외교 성과를 만들지 못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집권한 다음은 북미 간의 제네바합의가 타결됩니다.
여기서 잠깐! 김정일이 선군정치를 표방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통치 정당성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부자 간의 세습이라는 것은 사회주의 이념 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통치 정당성 획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김일성의 경우 소련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등에 업기는 했지만, 어쨌든 본인이 젊은 시절에 직접 항일 무장투쟁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 시기에 같이 무장투쟁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군부 요직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50~60년대에 권력투쟁을 통해 다른 계파를 숙청한 다음 확실한 권력 기반을 가지고 북한을 지배했었습니다. 그런 김일성에 비해 김정일은 아들이라는 이유로 후계자로 선택되어 정권의 세습을 받았으니 통치 정당성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세대의 빨치산 원로들의 후원이 필요했습니다. 왜냐면 통치 정당성이 약하다는 것은 자칫하면 가장 위협적인 상황으로 번질 수도 있는, 쿠데타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김정일은 군부에 공을 많이 들입니다. 군부에 대해 많은 혜택을 주고 군부의 고위 인사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펼쳐 나갑니다. 그래서 선군정치를 펼치게 됩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90년대 중반 당시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 때문에 고난의 행군에 시달리게 됩니다. 원래 고난의 행군이란 항일 무장투쟁(빨치산 투쟁)을 하던 시기에 역사적인 전투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중후반 북한의 경제난이 심각해지며 굶어 죽는 주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 시기를 과거 항일투쟁의 고난의 행군을 빗대어 고난의 행군이라고 칭하기 시작합니다. 대략 표현하자면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고 어려운 상황을 이겨 나가야 한다'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는 대북 포용정책의 일환으로 햇볕정책을 주장하였고, 이를 통해 이뤄낸 사업이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입니다. 남북 간의 교류 협력도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금강산 관광이 처음에는 해(海) 단위로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금강산 관광의 계획 초안을 보면 속초 근처의 동해항에서 시작해서 크루즈 여객선을 통해 북한 원산항에 정박시킨 후 금강산 관광을 하고 내려오는 방식이었습니다. 아무튼 규모가 축소되긴 했지만 당시에는 금강산 관광이 꽤 유행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개성공단은 사실 김대중 정부 당시에 협의만 이뤄졌고, 실제로는 노무현 정부 때 가동되었다고 합니다. 개성공단의 경우 북한은 노동력과 개성공단 부지를 제공하고, 남한은 자본과 기술을 투입하는 방식의 남북 경제협력 모델입니다. 원래 금강산 관광 개발과 개성공단 규모는 지금 실시된 것보다 10배 이상 큰 규모였습니다. 금상산 관광 같은 경우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금강산 지역에서 출발해서 북한 동해안 지역까지 주변 일대를 완전히 관광 특구로 지정하려 했습니다. 개성공단도 프로젝트 상으로는 10배 이상으로 확대시킬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두 사업은 모두 중단됩니다. 금강산 관광의 경우 2008년 관광객 피살사건으로 인해, 개성공단의 경우 2016년 초 4차 핵실험으로 인해 중단됩니다.
아무튼 김대중 정부 당시 햇볕정책의 성격은 무엇일까요? 바로 정경분리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과 관련한 여러 가지 협의들이 우지고 있고,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서해안 등에서 군사적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경분리 원칙에 근거하여 경제교류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추진한 것이죠. 하지만 이는 나중에 미국 정부가 바뀌면서 정책 흐름이 끊기게 됩니다.
다음은 북한의 체제적 성격과 대북 햇볕정책의 성패 여부입니다. 북한의 체제와 관련하여 대북 햇볕정책이 거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목표와 의도를 가지고 대북 화해·협력 정책으로서의 햇볕정책을 추진했는데, 북한은 과연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정치체제일까요?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논란이 발생합니다. 북한은 우리와는 다르게 유일지도체계인 수령관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정치 체제입니다. 그렇다면 대북 정책을 통해 경제협력을 하고, 경협을 통해 북한에도 일정 부분 자금이 유입된다면, 이게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그런 동력으로 정말 사용되는 것일가요? 아니면 오히려 북한의 유일지도체계의 존속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일까요? 당시 이런 부분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결론은 현재까지도 사실 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무튼 남북경협이 핵개발 자금으로 쓰인다는 입장, 그리고 남북 경협 및 햇볕정책을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은 지금까지도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오늘 기사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통일 정책 관점에서 대북 햇볕정책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그리고 대북 햇볕정책의 방향성은 어떻게 설정해 나가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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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이정복, 『한국정치의 분석과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제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