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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③중국 공산당의 탄생

제9기통일부대학생기자단 2016. 11. 17. 00:00

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③중국 공산당의 탄생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식- 출처:구글코리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안녕하세요 통일부대학생기자단 노도희기자입니다. 저번에 지난 기사에서 '중국 국민당의 탄생'을 다루었는데요, 이번에는 '중국 공산당의 탄생'에 대한 글을 다뤄보려고 합니다.

중국인들이 마르크스주의에 접촉한 것은 대략 1905년 전후입니다. 이때 한 신문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인 엥겔스가 쓴 '공산당선언 서문' 등이 실리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중국인들이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중국인들은 마르크스주의에 열광적이지 않았고 단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건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뒤 연설하는 레닌- 출처:구글코리아, '볼셰비키 혁명''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확산은 1919년 5.4운동과 러시아에서의 1917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한 후로 중국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 위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러시아에서의 혁명의 성공으로 마르크스주의, 특히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중국인들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중국인 지식인들에게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매력적으로 다가온 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중국의 옛날 전통과 오늘날 서양의 지배를 거부하는 '실천사상'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즉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적인 위력과 사상으로 그들 현실의 중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천력을 제공할 수 있는 점에 주목한 것입니다.
2. 또한 사회주의 사상이 나타난 국가는 이제 막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뿐이었고, 유럽과 미국사회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기에 만약 그들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면 그들과는 다른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일종의 내재적 욕망이 있었습니다.
3. 당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성공한 소련이 중국에게 매우 우호적으로 접근하였습니다. 레닌은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위를 비판하였으며, 기존 러시아가 중국에 대하여 갖고있던 각종의 이권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련의 모습은 중국인들에게 매력적일 수 밖에 없었고, 그에따라 사회주의 역시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4.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적극적인 반 제국주의적 태도도 중요했습니다. 레닌은 제국주의란 자본주의가 최상의 절정에 도달했을때, 나타나는 모습으로 과다하게 생산된 상품을 팔기 위해서 시장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러면서 타국을 침략하는 제국주의적 양상을 띄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식민지배를 받고있는 아시아와 기타 낙후된 지역의 국가의 인민들은 그렇게 불합리한 제국주의 국가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중국인들에게 마음의 안식처였고, 그들이 가야할 길을 명시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좌측부터 차례대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출처:구글코리아, '마르크스주의''

가장 대표적인 이유들을 꼽게되었지만, 사실 이보다 많은 이유와 상황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 정도만하고 간단하게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상의 매력이 소련의 우호적인 태도와 볼셰비키 혁명의 실제적인 성공은 중국에게 더욱더 강한 사회주의 확산의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의 가장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지식 추구의 장이었던 국립 베이징 대학교가 사회주의, 급진주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918년 당시의 베이징 대학교 도서관 주임이었던 '리따짜'는 이러한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함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마르크스 연구회'를 창건했습니다. 그의 제자에는 취추바이, 장궈타오, 그리고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는 마오쩌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따짜오- 출처:구글코리아, '리따짜오'' 

'리따짜오'와 함께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천두슈'입니다. 천두슈는 정치적 행동주의의 필요성을 깊게 깨닫고 5.4운동에 참여하였지만, 투옥됩니다. 이후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더욱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주의적 정치행위는 그를 더욱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사회주의 청년당'과 '마르크스 학설 연구회'를 조직합니다.

'천두슈' - 출처:구글코리아, '천두슈'' 

리따짜오와 천두슈가 중국에서 양대산맥으로 적극적인 마르크스주의 운동을 실천하고 있을 때, 제 3인터네셔널, 즉 코민테른이라고 부르는 기구에서 중국에 공산당을 창설하라는 임무를 받고 중국에 온 러시아인 '보이틴스키'가 오자 중국에서의 공산당 창당에 속도를 내게 되었습니다. 리따짜오와 천두슈가 각자의 길에서 마르크스 사회주의 운동을 실천해가는 상황에서 보이틴스키는 그 둘이 회담을 가져 하나의 공산당을 창당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결국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을 실천하던 지식인 13인들이 상해의 한 여자 기숙학교에서 몰래 모여서 공산당 창당 결의를 하게 됩니다. 바로 이 순간이 역사적인 '중국 공산당' 창당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당국의 이들은 경찰들의 눈에 피해서 하여야했고, 창당 그 순간의 회담에도 경찰들의 눈을 피해 도망쳐야 했습니다. 또한 리따짜오와 천두슈가 당시의 중국 공산당 창당 회담에 참여하지 못했으나, 각각이 서로 다른 대표를 선발하여 회담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중국 공산당 창당의 그 순간에는 '마오쩌둥' 역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중국공산당 창당을 재현한 조각상' - 출처:구글코리아, '중국공산당 창당'' 

리따짜오와 천두슈는 중국 공산당 창당이라는 것에는 뜻을 함께 했지만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노선에는 의견을 다르게 했습니다. 리따짜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농민이라고 주장했고, 천두슈는 농민이 아니라 도시 노동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리따짜오는 중국의 현실상 농민이 90%를 차지하고 그들의 순박함을 사랑했으며 도시생활의 타락함을 증오했습니다. 반면 천두슈는 농민은 분산되어 있어 규합하여 힘을 모으기 힘들고 그들은 우매하여 선동되기 쉽고 보수주의 경향이 되기쉽다고 주장하면서, 도시 노동자들이 혁명에 앞장서고 농민들은 순순히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중국 공산당의 창당은 정말 미미하고 보잘것없었기에 그 누가 약 30년 후에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당이 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미미한 출발일지더라도 결국 중국 대륙 패권 다툼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통일부대학생기자단 노도희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