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여명학교 조명숙 선생의 삶

알 수 없는 사용자 2015. 11. 25. 22:51

 

 지난 11월 25일,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잔뜩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향한 학교.
이른 아침임에도 학생들로 가득 찬 강의실에서 통일을 향한 마음을 울리는 강연이 열렸습니다.
평소에는 봉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교양 수업이었지만 이 날은 여명학교 (북한이탈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 의 교감선생님이신 조명숙 선생 강연으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작성했습니다. :-)

 
 조명숙 선생은, 빈민촌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빈민촌 가정의 가난이 대물림 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다른 아이들이 가난을 대물림 받지 않고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마음으로 교사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사범대에 입학해 대학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외국인 노동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집으로 전화를 잘 못 건 외국인 노동자는 영어를 할 줄 알면 자기를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덕분일까요? 사람의 눈빛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지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 외국인 노동자를 도와 병간호를 시작했어요. 잘 먹지도 못하며 친구를 간호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을 보며 이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아가는지 느낄 수 있었죠.”

  “그 무렵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오던 시기였고, 이 때 제가 도운 외국인 노동자가 산재로 죽은 첫 번째 케이스가 되었어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고, 도움을 주겠다는 단체도 생겨났죠.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를 거절하고 저에게만 도움을 청해요. 저는 그게 버거워서 거절을 하려는데, 그 외국인 노동자들이 저에게 ‘너는 친구잖아.’ 라는 말을 했어요. 그 말이 너무 간절해서 뿌리칠 수가 없었고, 그렇게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지금의 남편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이 조명숙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있다


 중국으로 신혼여행을 간 그녀는 한국에서 도왔던 외국인 노동자를 만났고, 자신보다 더 어렵고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탈북자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북한의 고난의 행군 이후 많은 탈북자가 생겼을 때였고, 아직 공식적으로 남한에는 이런 탈북자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부모를 직접 선택 할 수 없잖아요. 북한 사람들도 선택할 수 없었고, 태어나보니 북한이에요. 아무 이유가 없죠. 그런데 그들은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것 하나로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본 뒤로 탈북자들을 돕기 시작했어요.”

당시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아이가 있어요. 중국과 북한의 물물교환을 위한 기차에서 잠들어서 중국으로 넘어오게 된 아이였어요. 3일을 넘게 굶다가 옥수수 낟알을 주워 먹고 식곤증으로 기차에서 잠이 들었죠. 15살이었는데, 키가 130cm가 안되고 아주 왜소했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여러 음식을 사주는데 아이가 생전 처음 먹는 기름기에 탈이 난거에요. 너무 미안했죠. 남을 도울 때 그 수준에 맞춰 도와야지, 내 수준에 맞춰 도우면 탈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계란을 10개 사줬는데, 아이가 먹지 않고 숨겨둬요. 이유를 물으니 북한에 있는 엄마와 동생들이 생각나서 그렇대요. 정말 안타까웠죠. 저는 그 아이와 함께 남한에 가고 싶었는데, 아이는 두 명의 동생들이 분명 굶어 죽을 거라며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이에게 군인들에게 뺏기라고 담배와 쌀, 과자 등을 싸주고 돈을 봉지에 싸서 실에 연결한 뒤 항문에 넣어서 보냈어요. 혹시나 싶어서. 그런데 아직도 그게 마음에 걸려요. 두 명을 살리겠다고 그 아이까지 세 명을 죽게 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강연 중인 조명숙 선생님

 그 뒤로도 계속해서 탈북자들을 돕던 그녀는, 탈북자들을 데리고 남한에 오기 위한 도전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당시 남한으로 탈북자를 데려오는 것이 처음이라 KBS에서도 동행취재를 했었는데요.(1998년 KBS ‘일요스페셜 13인의 탈출’) 먼저 선생님을 포함하여 4명이 여러 가족으로 이루어진 탈북자들을 데리고 연변에서 아파트를 구해 살았습니다.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북한 사람들의 특성이나 심리를 파악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중 첫 번째는 가부장적인 리더입니다.

 “북한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사회적 용어는 어버이 수령님이고, 집에서도 아버지를 세대주로 하며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이 강해요. 탈북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공안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대비해서 모두에게 비상금을 줬는데, 아저씨들은 그 돈으로 자꾸 술이랑 담배를 사와요. 그래서 그러시지 말라니까, 그 분들이 보기에는 20대 처녀가 뭐라고 하는 게 못 마땅한거죠. 그렇게나 제 욕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선생님은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변화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교사가 꿈이었던 만큼 북한 아이들을 데리고 매일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해주고 교육을 했는데요. 이로 인해 변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어른들 또한 변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탈북자들이 탈북을 한 가장 큰 이유가 배고픔이다보니, 밥을 제때 줘야 하는데 제가 어느 날 아이들 교육을 하다가 설거지를 하고 밥을 하는 시간을 놓쳤어요. 서둘러 부엌으로 갔는데, 세상에. 저를 욕하던 그 아저씨가 설거지를 하고 계셔요. 그러면서 본인도 민망하신지 ‘이런 건 남성 동무들이 해야 벅벅 잘 까셔져요’ 라며 계속 설거지를 하세요. 그리고 그 다음 말이 저를 충격에 빠지게 했습니다. ‘선생님의 짐을 덜어 드릴 테니, 아이들을 더 가르쳐 주세요.’ 라는 말이었어요. 북한에서 선생님이란 굉장히 권위 있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아이들을 가르쳐 주니까 저에 대한 호칭이 욕에서 선생님으로 바뀐 거죠. 그래서 이 일을 할 때에 자녀들을 교육하면서 어른들도 변화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베트남 국경지대 강 - KBS 13인의 탈출 방영장면 캡처. 국민일보

그들을 남한으로 데려오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베트남을 통해 들어오려고 하는데 중국과 베트남의 영토 분쟁으로 국경지대의 육지는 지뢰밭이었고, 지뢰가 없는 곳은 강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강을 건너기로 결심하죠. 선생님은 탈북자들이 강을 건너는 동안 베트남 국경수비대를 따돌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진한 화장을 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 손을 흔들며 숲으로 뛰어 들어갔고 5분도 지나지 않아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을 큰 부대로 데리고 갔고 밤새 심문을 했습니다.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그냥 너무 겁나니까 웃음이 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 국경수비대들이 저를 그냥 정신이 이상한 관광객이라고 생각하고 보내려 해요. 그런데 한 군인이 자기가 보기엔 수상한데, 다른 사람들은 속고 있다고 하고는 저보고 따라오래요. 얼떨결에 따라갔는데, 쪽문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잠가요. 그리고는 저를 정말 징그럽게 쳐다봐요.”

 “저는 그 때 탈북자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다짐하고 들어갔지만, 너무 두려웠어요. 정말 신이 있다면, 이런 것 까지 원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뒤로 굉장히 담대해졌어요. 그리고 저도 이 사람을 따라 똑같이 쳐다보았죠. 그 5분간의 시간이 정말 28년의 세월보다 더 길게 느껴졌어요. 계속 있다 보니 그 군인이 저한테 돈을 달래요. 그래서 제가 아까 화장품을 사고 남은 돈이 겉주머니에 있기에 그 중 20불 정도를 세서 줬어요. 그니까 그 군인이 너무 행복해하면서 나가요. 그 때 제가 너무 깜짝 놀랐던 게, 문을 여니까 다른 군인들이 한 줄로 서있는거에요. 그리고 한 명씩 들어와요. 이제 만약 내가 그 첫 번째 군인에게 당했더라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끔찍하죠. 하지만 저는 제 겉주머니에 있던 200불 되는 돈으로 그 사람들을 다 소화해냈어요. 이 사람들은 저한테 돈을 받았으니까 이제 빨리 나가라고 하고, 그렇게 탈출하게 되었죠.”

 조명숙 선생에게 그 날의 일은 너무나 충격적이라 계속 잊고 지내다 일 년 전에야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 큰 공포를 겪었을 선생님은 오히려 자신의 일에 감사하며 탈북 여성들을 걱정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여성들이 주로 탈북을 해요. 그리고 제가 만약에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라 북한의 여성이었다면, 돈이 없었더라면 저는 그렇게 담대하게 이겨내지도 못했을 거에요. 탈북여성들은 탈북과정에서 본인이 겪은 일들로 인해 차마 남편을 못 데려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자녀들은 돈을 줘서라도 데려오게 하죠. 그래서 탈북자 인구 분포가 70프로는 가임기 여성, 그 다음 15~20 프로가 20대 미만의 자녀들이에요. 그 고통을 겪어 냈을, 겪어 낼 탈북 여성들을 생각하니 안타깝죠.”

 

△강연 중인 조명숙 선생님과 강연을 듣는 학생들

많은 어려움 끝에 탈북자들을 남한으로 데려왔으나, 그들은 적응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탈북자들은 북한에서는 배고파서 못살겠고, 중국에서는 잡혀갈까 무서워서 못살겠고, 남한에서는 몰라서 못살겠다며 힘들어했습니다.

 “저는 몰라서 못 살겠다는 말이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어요. 그러다 이해가 간 것이, 외국인 노동자는 모르는 단어나 개념이 있을 때 그 나라 말로 설명하면 다 이해를 하는데 탈북자는 그렇지 못해요. 아예 북한에는 없는 개념이니깐요. 우리는 상식인데 이들에게는 다 외워야하는 지식인거죠.”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억해야할 두 번째는 유물론적 사회주의 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요. 우리는 첨성대가 굉장히 소중한 유물이고 첨성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배우는데, 그들은 이해를 못하고 얼마냐고 물어요. 북한의 역사책에서는 첨성대를 벽돌 몇 장, 높이가 몇 미터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적으며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가치를 판단하죠.”
 

 마지막 세 번째는 군사문화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군인 톤으로 이야기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죠. 그래서 남한의 돌려 말하는 언어를 못 알아듣고 힘들어해요. 다른 지식은 책을 읽어서 알 수 있지만, 이러한 문화적 배경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고 책을 읽어도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자기 빼고는 다 알고 있죠.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자기가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아요. 자기의 약점이 될 수 있으니깐 그런 거죠. 이게 탈북자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에요.”

 
 

△여명학교 학생들과 조명숙 선생님 - 여명학교

조명숙 선생님은 그렇게 몰라서 못살겠다는 탈북 청소년들을 가르쳐주기 위해 여명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의미 없이 쉽게 이야기 하던 통일이 탈북 청소년들에게는 부모님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하고 절실한 방법인데요. 그들은 밝아올 여명을 기다리며 다시 하나가 되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소원은 엄마하고 같이 있는 것 입니다. 아이들 중에 엄마하고 같이 탈북을 하다가 공안들이 오니까 엄마가 반대로 뛰고 아이보고는 숨어서 탈북을 하라고해서 이 곳으로 오게 된 아이가 있어요. 엄마의 희생으로 탈북을 성공한거죠. 그러니 이 아이는 매일같이 내일 통일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요. 우리는 매일 부모님이 차려주시는 밥 먹고 따뜻하게 사는데, 이들에게는 그러한 일이 기적인거에요.”

 선생님은 또한 통일을 향한 비전과,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비전을 나타냈습니다.

 “저는 이 아이들이 여기서 교육을 잘 받으며 통일이 된 다음에는 북한으로 가서 최고의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 있던 아이들이 리더가 되어 일하게 하고 뒤에서 그들을 돕는 사람이 되라고 말해요. 그게 더욱 행복하고, 더욱 남을 빛나게 해주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명의 뜻은 ‘새벽 동 트기 바로 전’입니다. 선생님은 북한을 여명의 바로 전. 즉, 가장 어두운 때라고 칭하며 북한은 곧 여명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북한을 외면할 수 없고, 북한과 어우러져 살아야하는데요.

 “제 좌우명이 ‘인생 뭐 있어?’ 에요. 그런데 그 인생을 보람 있게 살려면, 북한을 회복시키는 일을 하고 통일을 위한 꿈을 가져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통일이 되었을 때 우리 자녀들에게도 할 말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왜 유관순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을까요. 각 시대는 시대에 맞는 사람들을 요구하는데, 일제강점시대에는 유관순 같은 사람이 필요했어요. 민주화 운동시기에는 민주화 투사가 필요했죠. 이제 통일을 앞두고는 여러분이 필요해요. 통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저는 이 곳에서 사랑을 받은 여러분들이, 다른 곳에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믿어요. 통일을 위한 일은, 남자 여자가 나뉘는 것도 아니고 힘으로 나뉘는 것도 아니에요. 그 사랑과 마음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통일을 준비하고, 통일 시대에 민족이 고마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북한 기아 동영상 시청중인 학생들


 통일을 향한 선생님의 간절한 마음과, 북한이탈주민, 북한이탈청소년을 향한 선생님의 사랑이 절실히 느껴지는 강연이었습니다. 강연 시작 전, 통일이 될 것 같은지에 대한 물음에 과반수 이상이 통일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는데요. 강연이 끝날 쯤에는 학생들이 모두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북한의 모습에 안타까워하며 통일에 대한 관심 보였습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곳이자, 가장 관심을 쏟지 않는 나라일 수 있는 북한. 그리고 그 곳에서 살다 온 북한이탈주민에 대해 들으며 정말 ‘통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이 되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공감 하나가 통일부기자단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글 내용에 공감하셨다면, 공감을 꾸욱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