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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세계문화유산 (1) 고구려 고분군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2. 20. 06:00

북한 세계문화유산 (1) 고구려 고분군

 

                       

현재 북한은 몇 개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을까요??

정답은 2개(2014년 2월 기준)입니다. 현재 북한은 고구려 고분군, 개성역사지구 등 2개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한반도와 만주를 중심으로 약 반만년 동안 살아왔고, 우리 역시 그 땅에서 계속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와 광활한 만주지역에 걸쳐 우리 민족의 수많은 유산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와 사정으로 인해 북한에 있는 역사 유산들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번 기획 기사를 통해 북한 지역의 우수한 문화유산을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북한에 있는 2개의 세계문화유산 중 고구려 고분군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의 과정 및 분포상황

고구려 고분군은 2004년 7월 1일 '고구려 고분군'(The complex of the Koguryo  Tombs)'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제28차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만장일치로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북한은 1998년 7월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하였고 그 후 2000년 5월 고구려 고분군을 비롯한 7건을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잠정 목록으로 제출하였습니다. 특히 고구려 고분군을 첫 번째 세계유산 등재후보로 지정했고 이에 따라 2000년 8월, 2001년 7월 두 차례에 걸쳐 유네스코 전문가들이 북한을 방문하여 세계유산 등재를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 고구려 고분군은 2004년 북한의 첫 번째 UNESCO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현재 63기 고구려 고분군(벽화고분은 16기)은 4개 지역(평양직할시, 남포시, 평안남도, 황해남도) 233핵타르(ha)에 달하는 면적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완충지역까지 포함하면 1,701ha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북한 고구려 고분군 분포도 (출처 : 연합뉴스)   안학3호분 주인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네스코가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근거

동명왕릉(진파리 10호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안학3호분 전경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네스코세계유산을 선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하 이코모스)는 4가지 항목에 근거하여 고구려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도록 유네스코에 건의했다고 합니다. 아래의 표는 이코모스가 제시한 4가지 항목입니다.

고구려고분군 등재 기준 4가지 항목

 기준

 내용

 기준 (Ⅰ)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구려 문화의 걸작이며, 고분의 구조는 정교한 건축 공법을 보여 준다.

 기준 (Ⅱ)

 고구려 문화의 독특한 매장 풍습은 일본을 포함한 인근의 다른 지역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기준 (Ⅲ)

 고구려인들의 생활양식, 토속신앙과 더불어 고구려 무덤은 독특한 고구려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기준 (Ⅳ)

 고구려 고분은 고대 매장 양식의 중요한 사례이다.

 

 

 고구려 고분군의 역사적 가치

현재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나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 고분군은 고구려인들이 창조한 과학· 문화·역사·종교·관습 등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즉, 고분벽화를 통하여 문헌자료에서 볼 수 없는 고구려 시대의 다양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분 벽화에는 당시의 관습을 포함하여 귀족과 평민의 복식·무기·음악·춤·종교적 신념·천문학 등 다양한 내용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분건축을 통하여 당시의 매장풍습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건축기술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1) 고구려인의 생활모습 그리고 문화교류

 덕흥리 고분       백희기악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요고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강서대묘 사신도 현무 모사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고구려 고분군의 주인들은 사후에도 현실의 삶과 유사한 삶을 누리고 싶어했습니다. 그 예로, 덕흥리 고분을 들 수 있습니다. 덕흥리 고분은 무덤주인이 공적인 업무를 보던 사랑채부터 살림집인 안채, 응접실 그리고 휘장이 설치된 침실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거주하는 집처럼 축조되었습니다. 또한 생전의 생활을 벽화로 자세하게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덕흥리 고분의 경우 벽화를 통해 무덤의 주인이 유주자사 진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외에도 고분군의 벽화에서 활쏘는 모습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통해 고구려인들이 활쏘기를 평상시 즐겨했음을 알 수 있고, 추운 지방이라 육류를 자주 먹었던 사실, 그리고 좌식과 입식을 겸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등 벽화를 통해 다양한 고구려인의 생활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초기에는 주로 무덤 주인의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 많았고, 후기로 갈수록 점차 추상화되어 사신도와 같은 상징적 그림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고분군의 벽화를 통해, 고구려가 다른 문명과 공동체들과 활발히 교류를 했던 '열린 사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5, 6세기 가까운 중국은 물론이고 멀리 서역의 상인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습니다.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 '장천 1호분의 백희기악도'의 서역인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고구려인들과는 달리 코가 크게 그려져 있고 이들을 '고비인(高鼻人)'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고비인들은 서역계 사람들로서 머리 모양도 상투를 틀지 않고 늘어뜨린 상태로 지내는데 당시 고구려의 활발한 대외교류과정에서 흘러들어온 유목계통사회의 사람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황해도 안학 3호분 대행렬도에 요고를 들 수 있습니다. 요고는 오늘날 장구의 전신에 해당하는 악기입니다. 요고는 인도에서 만들어진 타악기로 중국전역을 비롯해 고구려에서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인도의 요고가 고구려까지 흘러들어간 것은 그 당시 세계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교류가 활발했으며, 고구려 역시 그 흐름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단순히 문화를 수용하고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화를 재창조 하였습니다. 문화란 창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문화를 잘 향유하고 발전시키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강서대묘 사신도를 통해 고구려의 문화 재창조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강서대묘의 청룡·백호·주작·현무는 중국의 생활풍속도인 백호벽화와 소재나 기법면에서 매우 유사합니다. 하지만 중국의 백호벽화보다 더욱 세련된 모습으로 향상된 후, 일본에 발전된 벽화 문화를 전파했습니다. 다카마스 현의 현무벽화가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벽화 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고구려의 문화력은 벽화를 한 단계 성장시켰으며, 이는 동아시아 벽화 문화의 향상에도 공헌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벽화를 통해, 동아시아 벽화 문화의 흐름과 발전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2) 고구려 고분의 건축양식 

돌무지무덤 양식을 가진 '장군총'(출처: doopedia)       굴식돌방무덤 양식인 강서대묘(상공촬영) (출처: 연합뉴스)

고구려 고분들은 1~7세기 사이에 축조된 독특한 무덤 양식에 속합니다. 돌무지무덤, 굴식 돌방무덤 등 크게 2가지의 모습을 띄고 있는데, 초기의 돌무지무덤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고분에 흙 봉분을 덮고 벽화를 그리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평양 지역에는 굴식 돌방무덤 양식의 고분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국내성의 장군총과 평양의 강서고분 사진을 보면, 돌무지무덤과 굴식 돌방무덤의 차이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군은 건축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뛰어난 유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강서고분을 들 수 있습니다. 강서고분의 천장은 내장판자양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전문가들은 다른 양식들과 비교해볼 때, 판석을 서로 정교하게 끼워 맞추는 작업, 주춧돌과 현실 벽과 천장의 판석을 따라 흐르는 부드러운 곡선 표현 등이  고구려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또한 고분군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주변 동아시아 사회에도 널리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백제의 석촌동 일대의 계단식 돌무지무덤, 백제 돌방무덤과 벽돌무덤 내의 그림들, 신라의 굴식 돌방무덤, 일본 다카마스현 고분 등을 통해 고구려 고분이 백제·신라·가야·일본 등 동아시아 전역에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군'과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묘지'의 관계

고구려와 관련된 세계문화유산 현황 ('고구려 고분군'과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묘지')(원본출처 : 동아일보)

고구려의 유산은 만주부터 한반도까지 광대한 범위에 걸쳐있으며, 그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전역에 정치·사회·문화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고구려사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대 정치의 역학 관계는 위의 고구려의 세계문화유산등재과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북한은 오랜 기간 동안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했고, 그 결과 단독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의 단독 등재를 반발하여 단기간에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하여 공격적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경쟁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양국은 각자의 영토에 공통적으로 속한 고구려의 유산을 별도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하는 것을 ‘비정치적’인 행위로 여기는 데 동의했고, 각자 고구려 고분군,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u Kingdom)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를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보다 더 많은 지역, 국내성 오녀산성 등 고분군 이외의 더 다양한 고구려 유적들을 유네스코에 등재하였습니다. 즉,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는 오녀산성, 국내성, 환도산성 3개 도시와 무덤 40기(왕릉 14기, 귀족묘 26기)를 포함하며, 4,165ha에 이르는 방대한 면적이 되었습니다. 고구려연구회 서길수 회장은 현재 북한과 중국이 등재 신청한 결과만 놓고 보면, 고구려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고구려의 수도와 중심지는 모두 중국 땅에 있고 북한에는 일부 고분군만 남아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앞으로도 평양의 안악궁, 대성산성, 평양성, 청암리토성 같은 성터 유적과 정릉사, 광법사 등 고구려 절터(현재까지 중국에서 고구려 절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를 기준에 맞게 정비해 추가 등재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훌륭한 만주지역 고구려 유산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바로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입니다. 현재 중국은 고구려사를 동북공정을 통해 바라보고,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중국의 지방정권)로 바꾸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남북 학계는 공통적으로 이번 유네스코 등재과정에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아래 [표]는 이코모스가 5가지 항목에 근거하여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묘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도록 유네스코에 건의한 내용입니다.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묘지 등재 기준 5가지 항목 

 기준

 내용

 기준 (Ⅰ)

고구려 무덤의 벽화와 구조는 인류의 천재적 창조물 가운에서도 최고 걸작이다.

 기준 (Ⅱ)

고구려의 수도들은 산악도시의 초기 예로, 이후 주변 문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한자로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고구려가 중국 언어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무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기량과 독특한 양식에도 다른 문화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기준 (Ⅲ)

이 유적은 사라진 고구려 문명이 남긴 특별한 발자취이다.

 기준 (Ⅳ)

국내성과 환도산성에서 볼 수 있는 도시 체계는 고구려의 후발 수도 건설에 영향을 끼쳤다. 또한 고구려 묘지들은 적석총과 봉토분 건축 발전상의 뛰어난 예이다.

 기준 (Ⅴ)

고구려의 수도들은 인류의 창조물이 바위, 숲, 강 등의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광개토대왕릉비  환도산성 터 (출처: 소년한국)

 

 고구려 고분군의 의의와 쟁점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고구려의 유적은 국가의 중심부였던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경향이 있지만, 5세기 이후 특히 장수왕의 남진정책이후부터 현재 서울 근처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포진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한강 근처에서 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즉, 고구려 고분군을 비롯한 고구려 유산들을 단순히 한반도 북부 및 만주에 집중하여 볼 것이 아니라, 한반도 및 만주 전역을 같이 생각하여, 관리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고구려 연구에서 우리나라 학계의 역할도 앞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한 최대 고구려 고분군 발굴 기사, 2010-03-25, 경향신문)

고구려 역사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구려 고분군' 및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묘지'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앞으로 고구려사에 대한 발전과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 필수입니다. 하지만 고구려 고분군에 대해서는 경색된 남북 관계,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묘지는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현재 제한적인 정보를 얻고 그에 따른 평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남북관계가 좋았던 지난 2000년대 초반, 남북 학계는 고구려사에 대해 공동논의를 진행하였습니다. 2004년 9월 11~12일 양일에 걸쳐 금강산에서 개최된 <고구려 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남북공동전시회와 학술토론회>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4년의 학술토론회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최초의 남북 학계 공동대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현재 고구려 고분군은 북한의 문화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이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유산은 남북의 공동유산이며, 한민족의 유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과 협력하여 역사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공동 고구려사 연구가 활성화될 그날을 기대하며, 지금까지 통일부 대학생기자단의 김창균, 조현기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