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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 보며 통일한국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고민하다 ③

 안녕하세요, 제9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황주룡 기자입니다. 이번 기사는 저번 기사에 이어 3편입니다, 통일독일이 사회통합 과정에서 과거사 극복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갔는지를 다루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독일의 과거 청산은 1~2편의 기사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독일 시민들에 의한 슈타지 본부 점거 및 슈타지 문서 공개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이 부분은 연세대학교 고상두 교수의 『통일 독일의 과거 청산과 한반도에의 함의』라는 논문을 참고하였습니다.관심있게 읽어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 사회 통합을 위한 과거사 청산이라고 하니 조금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나요? (출처 : bing)


 사실 독일에서 과거청산이라는 용어는 2차대전 이후 통용되었습니다. 나치의 만행을 바로잡는 표현을 하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 논문에 의하면 과거 청산이라는 용어는 엄밀히 존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과거에 엎질러진 일을 주워 담을 수 없고, 깨끗이 청산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상두 교수에 의하면 오히려 '규명된다'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저는 과거 청산이라는 용어 대신 '과거사 극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 청산의 궁극적인 목표는 뼈아픈 과거를 재조명한 후 이를 발판삼아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통일 과정에서 과거사를 극복하는 뼈아픈 경험을 거친 이후로, 놀라운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발전을 이루어 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봅니다.


▲ 동독 과도정부에 의해 체포된 당시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 (출처 : bing)


 이제부터 독일 과거사 극복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볼 것입니다. 먼저, 독일이 통일 과정에서 '과거청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독일의 과거사 극복 과정은 편의상 '과거청산'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독일은 20세기 후반 두 번의 과거청산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나치정권의 과거청산, 그리고 동독 공산독재의 과거청산입니다. 그리고 동독 공산정권의 불법 행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하나는 흔히 말하는 '정권 범죄'이며, 다른 하나는 슈타지와 관련하여 가담한 사람 등에 관한 행위입니다. 우선 독일은 동독 공산정권의 범죄에 대해 처벌 하였습니다.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90년 동독 과도정부는 공산당의 불법행위를 처벌하였는데, 먼저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호네커를 체포합니다.


▲ 과거 청산 문제는 막상 시행하려고 해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 참 많은 듯합니다. (출처 : bing)


 하지만 예상보다 빨리 진행된 통일로 인해 동독의 주권을 이양받은 서독 입장에서는 공산 정권 처단에 대해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소극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된 이후  서독법이 동독 지역까지 확대 적용되면서 동독의 과거 불법 행위에 대한 사법적 처벌 요구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독일 헌법 103조의 형사 불소급의 원칙에 의하면 과거 행위를 소급하여 처벌할 수 없었습니다. 정권 범죄 대부분의 경우 명확한 처벌 근거가 존재하지 않아 처벌 적용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동독 공산정권 지도부 인사들의 연령대도 높았기에, 건강을 염려하여 형 집행도 늦추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권범죄 피해자들은 이에 대해 책임자에 대한 확실한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확실한 보상을 요구하며, 미온한 정권범죄 심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에 동독 반체제 운동가 측은 실정법 대신 자연법주의에 의거하여 정권 범죄 처벌 방안으로 국민심판소 설치를 제안합니다. 이에 연방의회는 92년 3월 동독 공산독재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합니다.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의회가 과거청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사법적 처벌이 아닌 진상 규명을 통한 '국민 심판'의 장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진상조사위원회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27개월의 활동기간 동안 306쪽에 달하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통일 직후 국민 다수는 사법 처리를 통한 정치적 재판을 요구했지만, 점차적으로 사법적 처벌이 '보복 재판'으로 통일 독일의 통합에 많은 지장을 준다는 지적을 받기에 이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은 과거 청산보다는 사회 통합이라는 더 큰 과제에 직면하여 국민들은 점차 총사면에 대해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 슈타지 문서 공개로 인해 벌어진 사회 파장을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판도라의 상자가 적당할 듯합니다. (출처 : bing)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슈타지의 문서에 대해서는 동독 반체제 운동가들의 강한 요구 때문에 공개됩니다. 하지만 이의 결과는 다소 부정적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염탐기록을 열람한 수 있었기 때문에 염탐 사실이 확인됨과 동시에 수많은 인간관계가 깨지게 되었으며, 동독인들은 '염탐꾼'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게 됩니다. 이는 사회통합을 바라보는 통일독일의 입장에서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하지만 슈타지 문서는 서독에서도 논쟁에 휩싸입니다. 나치 정권의 과거 청산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동독 공산정권을 심판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독 주민들이 "동독에 살았던 사람만이 동독의 과거에 대해 평가할 자격이 있다."와 같은 입장을 표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슈타지 문서 공개는 과겅 대한 진정한 반성 대신 동서독 간의 감정대립만 남게 되었다는 부작용도 존재합니다. 위와 같이 독일은 물론 통일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과 시행착오를 겪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은 독일이 과거사 극복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최종 목표인 사회 통합으로 이어지게 하는 데에 유의미한 성과를 내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기사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기사는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과거사 극복 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마지막까지 관심 있게 읽어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 시리즈로 기사 보기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 보며 통일한국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고민하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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