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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 보며 통일한국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고민하다 ①


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9기 황주룡 기자입니다이번에는 향후 통일한국의 사회통합을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과거사 극복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기사는 과거 독일의 통일 과정을 살펴보고 통일된 독일의 사회통합 과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알아 본 다음, 향후 한반도에의 적용을 고민해 보는 방식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통합된 사회란 어떤 것일까요? (출처 : bing)


 현재 한반도는 통일이라는 큰 해결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원래는 하나였지만 체제 경쟁 및 대립으로 인해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을 경험하였고, 그 갈등의 골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깊어 졌습니다. 남과 북은 서로 갈라진 채 살아온 세월이 길기 때문에 당장 언어부터가 다르며, 상호간의 정치·경제·사회·문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이 다릅니다. 이에 서로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 가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당장 외형적인 정치 통일을 하는 것은 북한의 붕괴라는 변수가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용이할는지도 모르지만, 사회통합은 다른 문제입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회 통합을 위해서는 과거사 청산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합니다. 과거사 청산 없이는 같은 나라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이 궁극적으로는 통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는 만큼, 아직까지도 한국 내에서는 분단 상태의 유지보다는 통일을 염원하는 입장이 우세합니다. 이에 우리는 먼저 통일을 하였던 국가들의 사례를 통해 타산지석의 자세로 다가올 통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특히 통일된 국가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사례로 많이 거론되는 독일 통일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ㄴ다. 독일 통일 경험은 교훈이 무엇인지, 그리고 독일의 사례를 한국에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는지 배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70년 12월 7일 당시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태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출처 : bing) 


 우선 독일은 전 서계에서 모범적으로 과거사 청산을 한 사례로 꼽힙니다. 독일은 20세기 후반에 두 번의 과거사 청산을 해야 했는데, 첫 번째는 나치즘의 과거청산입니다. 현재 독일의 학교에서는 나치 집권 기간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며, '3제국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육목표 하에 나치의 과거와 대결(클레멘스 알브레히트 )하는 정치 교육을 끊임없이 시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번 기사 시리즈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내용인, 분단 이후 독일 통일 과정에서의 공산독재에 대한 과거청산입니다. 독일은 이 두 가지 뼈아픈 역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훌륭하게 극복해 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성공적인 과거청산은 훗날 국가 발전의 토대와 원동력으로 작동하여, 현재 소위 말하는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뼈아픈 과거를 발판삼아 새로운 미래를 위한 도약을 꿈꿔오고 실천했던 독일의 진정성 있는 모습은 전 세계의 많은 국가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독일의 준수한 과거청산 사례는 여러 가지 과제를 앞둔 우리나라에 많은 시사점과 교훈을 줄 것입니다. 이에 저는 독일의 통일 과정을 보면서, 독일이 통일 과정에서 어떻게 과거 청산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독일의 통일을 짧게 표현하자면 '독일 민중들의 힘에 이루어진 통일' 정도가 될 것인데이와 같이 민중에 의해 통일을 이뤘다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과거 청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독일 통일 과정은 베른하르트 젤리거의 '독일통일 타임머신'이라는 칼럼 연재물을 읽으면서 참고하였습니다.


▲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입니다. 당시 동독민들의 인권을 탄압했던 동독 정권의 대표적인 산물입니다. (출처 : bing)


 독일 통일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895월로 거슬러 올라가서, 동독 내의 평화시위 현장을 시간순으로 빠르게 살펴 볼까요? 당시 동독의 선거는 공식적으로 자유, 비밀, 평등 선거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주의통일당(줄여서 '사통당')과 이에 준하는 소위 '블록정당'으로만 구성된 단일목록에 찬성 혹은 반대하는 형태였습니다. 사실상의 독재인 것이지요. 동독을 통치하고 있던 사통당은 57일에 지방선거를 계획하고 실시하였습니다. 공식적인 선거결과에 따르면 총 투표율 99.91%, 그리고 단일 제안에 대해 99.85% 찬성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당시 교회를 중심으로 한 환경운동과 평화운동 조직들은 이 선거 결과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동독 사통당이 독재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보위부(슈타지)를 통해 선거부정을 저지른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선거감시인들은 선거조작에 공식적으로 제소하였고, 동베를린 내의 서독 특파원들에게도 정보를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소가 기각되자 동독 교회 중심의 반정권 세력은 매달 7일마다 시민들에게 선거조작 항의 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고, 이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촉발되었습니다. 이 시위는 이후 107일 동독 창립 40주년 기념행사와 동시에 진행되었고, 동독 인민경찰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 당시 탈냉전의 흐름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정책은 소련이 추진했던 글라스노스트가 아닐까요? (출처 : bing)


 당시 동구권에는 탈냉전의 물결이 강하게 일고 있었는데, 이 물결은 소련의 고르바쵸프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고르바쵸프는 개방 또는 공개를 의미하는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국민들을 개혁으로 이끌었습니다. 소련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반사회주의 움직임을 처단하였던 '브레즈네프 독트린' 조치를 해제함으로써 각각의 개별 국가들이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유도하였습니다. 당시 고르바쵸프가 주도하는 새로운 물결에 따라 폴란드에서의 자유노조 결성, 헝가리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국경 개방으로 이어집니다. 이에 많은 동독 시민들은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동독정권은 이러한 개혁 추세를 거부했고, 더욱 강한 체제 이념을 공고화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동독시민들은 7월 여름휴가 기간 동안 자유를 향해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911일 헝거리가 서독으로 향하는 국경을 개방하자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탈출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동독은 주민들에 대해 여행금지 조치를 내린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에 대해 동독민들의 탈출을 도와주거나 방조하였던 것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였는데, 동구권 국가들이 거부하여 동독 탈주민들의 서독행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930일 서독 외무장관은 동독탈주민의 서독 입국허가를 내립니다. 그런데 동독을 벗어나는 방식이 기차를 타고 동독을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독 정북부가 스스로 동독민들을 쫓아 낸 것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동독민들의 탈출 욕구는 점점 더 높아졌고, 민심이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습니다.


▲ 당시 부정선거 의혹으로 인해 월요시위를 불러 일으켰던 89년 5월 7일 동독 지방선거 (출처 : 국민일보) 


 다시 899월 초로 돌아가서 상황을 정리해 봅시다. 위와 같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탈냉전 추세와 동독 사통당의 실정이 이어지면서 동독 시민들의 민심이 동요함에 따라 독일 내에서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우선 많은 동독주민들이 동독을 탈출하였고, 또 하나는 동독 내 저항 세력들이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동독의 저항 시위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 평화예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8994일 동독 반정권 활동가들은 교회에서 월요예배를 마친 후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 참가자들에게 현수막을 배포하고 평화 시위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들은 '여행의 자유, 의사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현수막에 내걸고 평화와 민주를 외쳤습니다. 이에 대해 동독 슈타지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94일 라이프치히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서독 주요 뉴스 시간대에 TV 뉴스로 방영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동독은 일정 기간 서독 기자들의 라이프치히 방문 금지령을 내리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후죽순으로 번져 나가는 평화시위는 동독 내 반정부 세력들에게 성공적인 선전 효과를 발휘했으며, 대부분의 동독 주민들이 시청하고 있었던 서독 TV를 통해 동독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월요시위는 점점 규모가 커져서 나중에는 진압을 위해 대규모 군대가 동원되어야 하는 상황까지 가게 됩니다.


이상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동독 붕괴 및 독일 통일과정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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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 보며 통일한국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고민하다 ①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 보며 통일한국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고민하다 ②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 보며 통일한국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고민하다 ③

독일 통일 과정을 지켜 보며 통일한국의 과거사 극복 문제를 고민하다 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