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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북한의 선전나팔, 역사 (2) 고려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는 사실로서의 역사를 주장했다특히 1824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라틴 및 게르만계 민족의 역사, 1494~1514(Geschicthe der romaenischen und germanschen Voelker von 1494 bis 1514)의 서문에 적힌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Wie es eigentlich gewesen)을 다루고자 했다.”는 글귀는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그는 현대 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그는 역사가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랑케가 주장했던 실증주의 사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그들은 주체사상을 확립한 이후부터 역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문을 체제 선전 및 선동의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랑케가 그토록 경계하던 모습이다학문이 정치에 종속되는 구시대적 방식의 연구방법이 현재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다역사적 연구에서 북한이 추구하는 바는 북한 정치체제의 정당성과 정통성이다북한 역사학계는 북한이 한민족의 정통 정부라고 주장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된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이에 본 기사에서는 여러 회에 걸쳐 고조선과 단군릉고려 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고려에 대한 북한의 인식

고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북한의 주체사상은 역사에도 영향을 미쳐 '주체사관'이라 자칭하는 사관을 고집하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고려는 중세사회를 여는 국가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북한이 고려를 중세사회를 여는 국가이자 정통성을 지닌 국가로서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북한으로 이어지는 민족 역사의 흐름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지적할 부분이 존재한다.
고려 항공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북한은 정치적 정당성이나 정통성보다는 민족이라는 정통성을 강조한다. 북한의 역사서 『조선통사』의 상고사 부분은 고조선을 중심으로, 삼국시대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기자의 이전 기사인 고조선 편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1990년대 단군릉 발굴 작업을 통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된다. 평양에 도읍을 둔 고조선과 고구려, 현 북한이 점유하는 땅에 있는 송악에 도읍을 둔 고려. 북한은 이들 국가를 통해 한민족 국가들의 중심지를 현재 북한지역으로 주장하며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려에 대한 정통성의 주장은 상당히 강력하다. 그 예로 북한은 고려의학, 고려항공, 고려호텔, 고려 박물관 등의 명명으로 고려에 대한 자부심을 표방하며 대외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고려가 분명 우리 역사에 있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자주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뚜렷하게 지니고 중세의 문을 연 왕조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북한은 이러한 점을 대내외적으로 선전하며 자신들의 정당성, 정통성을 주장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



고려의 통일 VS 신라의 통일


 고려는 918년 왕건이 궁예의 후고구려를 정변을 통해 무너뜨리고 세운 왕국이다. 신라의 분열 이후 고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을 936년 다시 통일하였고 약 474년동안 1392년까지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다.  고려의 통일은 삼국의 통일과 달리 '한반도 최초로 자주적 통일'로 평가 받는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당시 당(唐)이라는 외부 세력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의 자주적 통일은 신라의 통일과는 다른 당시 국제 정세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

 신라의 통일은 당시 당이 인식하던 국제 질서와 세계관의 영향 또한 존재했다. 당 중심의 세계질서와 조공체제에 한반도 국가를 편입하고자 하던 당은 신라의 제안이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병참의 문제로 번번히 고구려 원정에 실패를 겪은 당태종은 한반도 내 병참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신라와 함께 동방지역의 안정화를 꾀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라는 당을 업고 백제와 고구려를 꺾을 수 있었고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드러낸 당의 야욕을 저지하며 삼국통일을 이룩한다.

 하지만 고려의 상황은 이와는 달랐다. 물론 고려는 거란 등 외부 세력과 손 잡을 의지가 없었기도 하지만, 당시 중국과 만주는 오대 십국시대로 후삼국을 능가하는 난세였다. 또한 일본은 일왕 권력의 약화와 고립주의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조차 없었다. 

 이에 북한은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는 당이 개입되어 있다는 표면적인 사실만을 놓고 신라의 통일이 외세의존적이라며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북한에서 발행한 『조선통사』, 『조선전사』, 『조선단대사』 등의 책에는 통일신라에 대해 '후기 신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연히 고려는 민족 내부의 통합을 이룬 뛰어난 업적으로 보는 것은 맞다. 또한 이후 후삼국으로 나뉘었다는 점에서도 신라가 완벽하게 삼국을 통합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무시하는 신라의 통일은 충분히 당시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이를 실리적으로 이용한 외교적 승리이자 뛰어난 지략으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으며 고려의 통일만을 인정하는 북한의 모습은 전술한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북한으로 이어지는 그들만의 정통성을 위해 만든 장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