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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⑤1차 국공내전

중국판 6.25전쟁, '국공내전'에 대해 알아보다!

 - ③중국 공산당의 탄생 -

 

안녕하세요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기자입니다!!

이번 기사는 지난 '1차 국공합작'에 이은 1차 국공합작의 분열과 그에 따른 1차 국공내전에 대해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민혁명 당시의 국민혁명군, 출처: 구글코리아 '국민혁명군'

쑨원의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 드디어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습니다. 쑨원은 국민당을 개편한 후, 서둘러 이미 오랫동안 계획해온 북벌을 서둘러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쑨원이 1925년 3월 12일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실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쑨원이 죽은 후, 쑨원의 정치적 중책은 왕징웨이와 후한민에게 맡겨 졌는데, 그들은 각각 국민당 좌파와 우파의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군권은 당시의 황푸 군관학교의 교장인 장제스에게 있었습니다. 쑨원이 사망한 후, 드디어 국민당 한켠에 있던 좌우분열이 조금씩 커져 갔습니다. 1925년 우파들이 공산당 출신의 중앙위원들을 제명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좌파들은 이 결의가 무효라며 선언하는 등 국민당 내부에서의 좌우분열이 표면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내부적인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쑨원의 염원인 국민혁명(민족통일운동)은 장제스의 지휘아래 꾸준히 진행되었습니다. 내부적인 군사반란을 모두 진압한 후, 드디어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간부 6,000명과 국민당 사병 85,000여명의 규모로 1926년 7월 27일에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군사행동을 개시하였습니다.

국민혁명 당시의 국민혁명군 북벌진행도, 출처: 구글코리아 '국민혁명'

국민당의 국민혁명은 약 2년간 1928년까지 이어졌으며,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과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북벌군은 후난, 후베이, 푸젠, 저장, 장시, 안후이 등의 6성을 석권하고 우페이푸, 쑨추안팡 등의 군벌들을 격파하고 드디어 남방은 모두 통일하고, 북방 군벌 장쭤린과 대치하였습니다. 결국 장쭤린은 국민당의 난징정부에 흡수되는 것을 택하였고, 결과적으로 중국대륙은 중국 국민당의 지배아래 통일되어 북벌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중산함, 출처: 구글코리아 '중산함'

하지만 장개석은 근본적으로 반공주의자였고, 국민당 내부에서도 공산당을 타도하는 세력이 힘을 점차 얻자 드디어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이 점점 표면화되었습니다. 또한 중국 공산당 역시 국민당내부에서 점차 그 규모와 발언권을 확장해갔고, 국민당을 공산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국민당 내에서 세력 확장을 위한 갈등을 계속해갔고, 그 갈등은 점점 정점에 이르렀고, 점차 내부적인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시발점은 바로 1926년 3월 20일의 중산함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공산당원인 이지룡이 함장으로 있던 중산함에 회항할 것을 명령해 놓고, 중산함이 돌아오자 함장이 마음대로 군함을 이동하였다고하여 이지룡 이하 공산당원 60여 명을 체포하였습니다. 바로 이 사건이 최초의 반공쿠데타였고, 이후 1927년 상해에서의 반공쿠데타의 시작인 것입니다.

즉, 1926~1928년은 국민당 외부적으로는 국민혁명, 즉 북벌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내부적으로는 반공분위기 형성과 반공데타가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국공분열은 바로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급진적으로 치닫고 있던 국민당 내부의 좌우 갈등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국민당 우파들이 당시 상해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무차별하게 학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휴는 사실상 끝이 난 것이고, 중국 공산당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코민테른 역시 공산당에게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국공합작이 결렬된 이후, 그리고 북벌이 종료된 이후 국민당군은 자연스럽게 다음의 토벌대상을 중국 공산당으로 지목하였습니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의 상해 반공쿠데타 때 체포된 공산당원. 대부분은 처형되었다., 출처: 구글코리아 '4.12 상하이 쿠데타'

중국 공산당 역시 이러한 국민당군의 토벌에 대응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켰지만(무창 봉기), 실패하였고, 국민당군에게 쫓기고 패전하기 바빴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모든 면에서 국민당에게 열악했던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농촌 농민 병행 혁명노선을 택하여 농촌과 민중에게 스며들어 그들의 마음을 얻는 혁명노선을 택하는 동시에, 전술 방식을 유격형식으로 바꾸어 국민당군과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공산당군은 국민당군의 집요한 추격에 점점 세력을 잃어가고 5차에 걸친 토벌전에 힘을 잃어갑니다. 결국 모택동은 국민당군의 추격을 뿌리치기위하여 국민당군의 예상에서 벗어난 탈주로, 그리고 도망치면서도 반격하는 유격전술등을 택하여 산악과 강을 건너며 약 1만 2500km를 행군하여 그들의 해방구인 연안에 도착합니다. 바로 이것이 '대장정'입니다.

홍군(중국 공산당군)의 대장정 경로, 출처: 구글코리아 '대장정'

대장정을 시작할 때에 공산군은 약 10만명이었으나, 대장정이 끝나고 연안에 도착한 병력은 겨우 8천명에 불과했습니다. 약 1/10만이 대장정에서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이후의 항일투쟁과 2차 국공내전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베테랑 군인이 되었습니다. 공산군이 연안으로 겨우 도피하였고, 국민당군이 재차 공산군을 추격하고 있는 그 상황에 바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중국대륙침략이 결국 1차 국공내전을 종결시키고 2차 국공합작을 가져오게 됩니다.

다음 기사에서는 '2차 국공합작'을 다루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노도희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