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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장대현학교 후원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9월1일 부산 호산나교회에서 장대현학교 후원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임창호교장 "올해 드디어 첫 번째로 고등학교 3학년 학생 두 명이 대학입시 수시 시험을 봤는데 성공적으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후원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대현학교는 통일 시대에 가교 역할, 주인공 역할을 맡아 북한도 알고 남한도 알고 글로벌 시대에 전 세계도 아는 학생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키워서 장차 통일 한국의 인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통일 독일에 지금 총리를 하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은 서독 사람이 아닌 동독 사람입니다. 동독 출신인데 통일을 준비하며 대학생 시절에 자유민주주의를 배우고 통일 독일을 꿈꾸고 있다가 통일이 됐을 때 동독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지도자가 됐습니다. 이렇게 독일의 총리로 세워져서 오늘 세계 강국 독일을 만들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북한에서 내려온 탈북청소년, 북한도 한국도, 세계도 아는 이 학생들이 북한을 끌어안고 북한을 이끌어갈 수 있는 정서를 가진 지도자로 자라나서 통일한국의 대통령, 장관, 총리 등으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탈북 청소년들을 위해 한국의 청소년들이 응원을 왔습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아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와서 합주를 하였고 동인고등학교 중창단으로 남학생 청소년으로 구성된 중창팀인데 소년들의 목소리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장대현 학교 학생들과 가까이 앉아 있었는데 남학생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옆에서 감탄 감탄을 하더라고요. 특히 여학생이 꺄르르 웃으면서 좋아했는데 너무 귀여웠습니다.

  

 정요한 교수는 2009년도에 탈북을 했는데요. 북한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0.1%에 해당되며 평양음악대학 교수, 전 김정일 전용 오케스트라 단장 겸 악장까지 했었습니다. 지금은 동포에 대한 사랑으로 한정협이라고 탈북민 정착 지원을 돕는 단체에 홍보대사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장대현학교 후원의 밤을 한다는 말을 듣고 "장대현학교는 우리가 도와야 되고 후원해야 할 학교다."라고 말하면서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탈북민과 북한 동포에 대한 뜨거운 눈물이 교수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정요한교수 "많은 사람들이 믿기 힘들어했지만 하나님을 마음껏 믿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서 북한에서 평양으로 탈북했습니다. 주님의 나라 대한민국에 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성령으로 거듭난 바이올리니스트 정요한집사입니다. 정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은 북한에서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이름이에요. 재작년부터 오픈을 하면서 지어부르는 가명입니다."

 "저는 평양에서 태어났고요. 4살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5살에 전국 어린이 방송예술 경연에서 1등을 하는 계기로 사회적인 이목이 집중됐고 중요하게는 북한의 자선 예술영화 아역배우로 출연했어요. 그 아역배우에서 배역으로서의 어머니 역을 맡았던 배우가 김정일 와이프 송혜림 이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어렸을 때부터 김정일의 특별한 관심 속에 있었습니다. 저는 음악학원을 거쳐서 평양음악대학 그리고 러시아에 있는 음악원을 졸업하고 또 평양 중앙예술단에서 리더로 평양음악대학 바이올린 교수로 그리고 김정일 전용 악단 악단장, 악장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탈북 전에는 동유럽에 교환 교수로 나가있었죠. 탈북 전까지의 저의 인생행로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습니다. 바꿔 말하면 저는 북한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잘나가는 케이스였죠. 그렇다 보니까 제가 탈북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저는 탈북전에 교환 교수로 동유럽에 나가  있을 때 거리를 지나가다가도 일행에게 저 십자가가 있는 교회 안에는 남조선 사람들이 숨어 있어 북한 사람들을 유괴, 납치하고 나라를 배반하고 당을 배반한 탈북자들이 저 교회 안에 숨어 있다고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그렇게 앞장서서 선동하곤 했습니다. 북한에서 나서 자라는 전 과정에서 북한의 정치 시스템인 세뇌교육을 받아 교육받은 그대로 말하고 행동했었습니다. 저는 유학시절도 그렇고 제가 해외에 나가서 공연활동을 하는 많은 과정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고요. 그 시점에서 어느 날 대서 모임이 끝나고 맞은편에 앉은 동유럽사람이 저에게 왜 얼굴색이 안 좋냐고 스트레스를 받냐고 물어보며 교회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때만큼은 교회에 가보라고 하는 그 말이 크게 맘에 닿았지요. 그래서 가까운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말이죠. 해외에 어떤 명분으로 나오든 그 감시 통제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환경에서 교회에 난생처음가서 받은 충격으로 인해 제가 결국은 매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구실을 대가며 몰래 혼자 두 달 반 정도를 교회에 나갔어요. 정말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그렇게 세뇌를 받았습니다. 혹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양에 봉수교회가 있고 또 장충성당, 묘양산에 큰 절 등 이런 종교시설들이 몇가지 있어요. 이러한 종교시설들은 전 세계, 전 인류 앞에 '북한도 신앙의 자유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완전한 거짓입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가짜 교회, 가짜 성당, 가짜 절이예요. 저는 평양에서 나서 자랐지만 단 한번도 그 교회 주변에 얼씬조차 못했어요. 위의 말씀을 보고나니 김정일과 김일성의 정체가 드러나더라고요. '아 이래서 그렇게 피눈이 돼서 총칼로 기독교인들을 탄압했구나' 하고요. 그중에서 제가 악단장으로 있을 때 저의 선배 한 사람이 기독교에 대한 특별지령을 받아서 2년동한 한 사실을 자랑삼아 얘기한 게 있어요. 광복이 된 후 공산당이 수립되고 기독교인들이 탄압받아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지하로 들어갔어요. 지하에서 2세, 3세가 태어나는 거죠. 기독교 씨를 말리라는 지령으로 현상적으로 들킨 기독교인들은 발견하는 족족 죽이고 두 살짜리, 세 살짜리 어린애들은 작은방에다 가두고 애들만 나올 수 있는 크기의 개구멍을 만들어 놓아요. 그 애들이 무섭고 배고프고 부모를 찾다가 밖으로 나가겠다고 개구멍에 본능적으로 머리를 들이민대요. 그러면 밖에서 사람이 모든 복장을 다해 장갑을 끼고 얼굴도 가리고 눈만 보이게 하고 작은 망치를 들고 있다가 갓난아기들이 나오면 그 망치로 그 작은 애들 정수리를 툭 친대요. 그럼 그 애들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려요. 여러분 인권, 인권 전 세계가 북한 인권가지고 얘기가 많이 되고 있지만 아마 통일이 된 이후엔 여러분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별의 별 북한의 역사적 사실들이 밝혀질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대한민국에 와서는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가는 곳마다 십자가가 있고 교회가 있고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이런 천국이 또 어디 있나 싶었습니다. 북한은 어렸을 때부터 서로 감시, 통제하는 조직적인 수단이 한 두가지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가 두 달 반씩이나 외국에서 어떻게 교회를 다녔는지 정말 꿈만 같아요. 결국 발각이 되어서 한국으로 탈북을 결심하고 오게 되었지만요. 제가 처음에는 탈북민이라는 그 세 글자가 아주 부끄러웠어요. 북한에서는 교만할 대로 교만했던 저였고요. 하나님 말씀이 저 안에 녹아내리면서 지금은 우리 탈북민이라는 세 글자가 있기 때문에 하루빨리 부모, 형제들을 그리는 마음으로 이 나라가 평화적으로 복음으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돼요."

 "탈북민 학생들을 위해 장대현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만사 다 제쳐두고 이렇게 호산나교회에 오게 되었어요. 여러분 10년 20년 훅 지나온 만큼 10년 20년 지나는 것도 곧입니다. 통일은 금방 와요. 늘 만나는 기회 때마다 김정일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문이 열리고 통일이 되면 너희를 데리고 제일 먼저 서울과 부산을 가겠다"라고 김정일이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먼저 서울과 부산을 오게 됐습니다." (웃음)

정요한 교수가 탈북하고 제일 먼저 찬양하고 편곡해서 연주했다고 한 'amazing grace'를 연주했습니다. 북한에 실제로 교회, 절, 성당이 존재하지만 허울뿐 북한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정요한 교수가 한국에 와서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드렸다고 했을 때 저는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었던 자유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연주할 곡은 '사향가'입니다. 이 곡엔 저의 작은 스토리가 있는데요. 북한에서 어린애부터 어르신까지 전 국민이 즐겨 부르고 널리 알려진 작품이에요. '불후의 고전적 명작' 이런 얘기는 북한에서는 아무 작품에나 못 붙여요. 반드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작사, 작곡했을 때만 붙일 수 있어요. 이름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어요. 다 이름을 바꿔야 해요. '위대한'이라는 말도 아무 데나 쓸 수 없습니다. 세종대왕이 지은 훈민정음이 남한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음이 우러나오면 말할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가장 초보적인 어떤 명사도 대명사도 모든 말이 절대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쓰이는 것이 북한이에요. '사향가'가 불후의 고전적 명작이라고 북한에서 말하게 된 것은 김일성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되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사향가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편곡된 것은 저와 깊은 인연이 있어요. 북한에서 상영된 다 부작 영화에서 제가 직접 오케스트라와 사향가를 연주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애착이 가는 곡이죠. 하지만 남한에 와서 (김정일이 작사작곡했기 때문에) 사향가를 다시 연주할 수 없겠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깜짝 놀랄 얘기를 들었죠. 이 사향가는 1916년도에 정사인이라는 사람이 작사 작곡 한 것이라는 얘기를 말이죠. 이렇게 작곡가도 찾고 역사도 바로 알게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사향가를 마음껏 연주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바이올린 독주 부분은 제가 다 외우지만 반주보가 없어서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피아노 반주보를 가지러 평양에 다시 다녀올 수도 없고요. (웃음) 그러다 어떤 지인의 소개로 중보기도모임에 간 적이 있었어요. 중보기도모임에 갔는데 자매님들이 모여 앉아서 그렇게 통곡을 하면서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하시더라고요. 제가 그때 굉장히 은혜를 받으면서 저의 정체성을 돌이켜 보게 되고 또 도전을 받았어요. 나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남한에 오게 되었는데, 그 중보기도모임에 나와서 기도하는 분들은 북한과 아무 관계도 없대요. 그런데 그렇게 매주 한 번씩 나와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였죠.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요. 그래서 제가 그때 저를 오픈하기로 결심했어요. 그 날 굉장히 은혜 받아서 있는데 누군가가 소개를 해주더라고요. 그 자리에 탈북 피아니스트가 앉아 있었죠. 알고 보니 평양음악대학 저보다 한참 후배이지만 동문이었고요. 그래서 얘기하다가 사향가 얘기가 나왔어요. 악보가 없어서 연주를 못한다고 하니까 그 자매님이 그 반주보를 다 외우고 계시다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3만 명 이상의 탈북민들 중에 클래식 음악을 체계적으로 어릴 때부터 배운 피아니스트가 한 명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바이올린 협주곡 사향가 반주보를 다 외우고 있는 것은 더 기적적인 일이었어요. 제가 한국말로 하면 그분에게 완전히 꽂혔습니다. 꽂혀가지고 꼬시느라 정말 몇 년 동안 대학교 정문 후문, 낮밤을 가리지 않고 지키고 있다가 픽업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던 끝에 결혼까지 성공했습니다. 저의 아내를 소개합니다." (박수)

 탈북하고 음악적으로 잘 맞는 두 분이 운명처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에 정말 기뻤습니다. 그리고 두려울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정요한, 김예나 부부가 고향인 북한을 위해서 자신을 오픈해 통일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감사한 음악회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한글도 북한에서는 마음껏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억압 속에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데다가 자유를 느껴보지 못한 북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지금 평범한 일상에 대한 감사와 함께 통일이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요한 교수는 사향가 연주 후에 Zigeunerweisen과 사명을 연주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기회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간절한 부탁하나 드릴게요. 지금도 언제 붙잡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찬양하고 예배하는 북한의 지하 교인들을 위해서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탈북민으로 구성된 영남권 내 유일한 대안학교 장대현학교 탈북민들을 위해서 많은 기도와 지지, 성원 부탁드립니다"

 장대현 학교 후원 음악회를 통해 엄청난 귀 호강을 했는데요. 음악뿐만 아니라 실제의 절절한 북한의 상황을 듣고 나니 더욱 통일을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한 청소년들과 탈북민 청소년들이 함께 손잡고 축복송을 부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생들이 지금 볼 때는 웃으면서 행복해 보이지만 마냥 좋은 일만 겪은 행복한 아이들은 아닙니다. 한국에서 중국에서 북한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괴롭힘과 안 좋은 시선을 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이 악물고 버텨낸 아이들이고요. 장대현 학교에 와서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스피치 대회에 입상하고 대학에 붙는 등 많은 성과도 보이고 있습니다. 임창호 목사는 "그 때 박수받으면서 그 뜨거운 눈물의 기도 덕분에 내가 이렇게 자랐다고 먼 훗날 학생들이 고백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고 얘기했는데요. 정말 그럴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학생들이 더욱 좋은 교육을 받고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으며 통일 한국시대에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기도와 후원 부탁드립니다. 장대현 학교 후원 및 문의 (051-261-0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