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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들어는 보았나, 15만원 탈취사건!





(영화 <암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영화계에,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1,200만 관객을 동원한 최동훈 감독의 <암살>을 비롯하여, 윤동주·송몽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준익 감독의 <동주>,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귀향>, 조선 황실의 이야기를 다룬 <덕혜옹주>, 그리고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김지운 감독의 <밀정>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제강점기 배경의 영화들 중 그 시초가 되었다시피 한 작품으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2008년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입니다.


영화 <놈놈놈> 스틸컷 ⓒ네이버영화


그런데,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을 알고 계시나요? 김지운 감독은 영화 <놈놈놈>을 만들면서, 1971년 개봉한 이만희 감독의 영화 <쇠사슬을 끊어라>에 큰 영감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개략적인 줄거리와 캐릭터 성격 등을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놈놈놈>과 <쇠사슬을 끊어라>는 숨겨진 보물을 탈취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인데, 이 스토리는 과거 간도에서 일어났던 '15만원 탈취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간도 지역에서는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항일독립운동은 대원 모집, 훈련, 식대, 물품 구입 등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했습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인 사회에서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받거나 친일인사들에게 돈을 강탈하는 등으로 자금을 충당하고자 했지만, 항상 부족한 형편이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만주 침략을 가속화하기 위해 길회선(조선 함경북도 회령에서 중국 길림성으로 이어지는 철도)을 부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조선은행회령지점에서 조선은행 용정파출소로 15만원을 실어 보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서기로 일하고 있었던 전홍섭은 철혈광복군에게, 1920년 1월 4일에서 5일 사이에 15만원을 실은 트럭이 용정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철혈광복단은 철도부설자금을 탈취하기로 한 것입니다. 철혈광복단은 1919년 한상호·윤준희·임국정·원세훈·최봉설 등 항일인사가 모여 결성하고, 1920년에 북로군정서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장독립단체입니다.


철혈광복군 창립자인 임국정(오른쪽)과 최봉설(왼쪽)


당시의 15만원은 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75억 정도 되는 커다란 돈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제 최신 총 한 자루가 30원 정도였다고 하니, 총만 5,000자루를 살 수 있었습니다. 1920년 10월의 청산리 대첩이 4,000여 명의 독립군으로 일구어낸 승리였던 점을 감안하면, 탈취 사건이 성공했다면 이후 독립운동에 있어 큰 변환점이 될 수도 있는 계획이었습니다.


임국정, 최봉설, 윤준희,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 6명은 권총 4자루, 소총 2자루, 수류탄 몇 개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호송경비대도 도착지인 용정에 다다르면 경계가 느슨할 것이라 판단해, 용정 근처의 동량어구 길목에서 트럭을 기다렸다 습격했습니다. 그들은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 5명의 무장 호송대를 사살하여 15만원을 탈취했습니다. 이들은 곧장 돈을 가지고 러시아로 이동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홍백내전(1917~1922)을 벌이고 있었는데, 당시 시베리아에서는 백군의 편에 서서 홍군과 싸우기 위해 시베리아까지 진군했던 체코군이 패배를 예감하고 총을 헐값에 팔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시베리아에서 약 3만 정의 총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철혈광복단은 안중근 장군의 의형제이자 홍범도 장군과 친밀한, 독립운동가로 이름날렸던 무기상 엄인섭과 접촉하여 계약을 진행시키고자 했습니다. 임국정과도 안면이 있었던 엄인섭은 1908년 무장독립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이범윤 장군의 독립부대에서 부대장을 맡아 국내진공작전을 지휘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독립운동가로 유명했던 엄인섭(왼쪽)이 홍범도 장군(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엄인섭은 자신이 계약을 성사시키러 가는 중의 안전이 위험하니, 철혈광복단에게 자신과 동료들에게 총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총을 빌려준 채 잠에 빠져들었는데, 이들을 깨운 것은 계약 성사 소식이 아니라 무섭게 짖는 개들이었습니다. 엄인섭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변절한 일제의 밀정이었던 것입니다. 엄인섭은 총을 빌려 철혈광복단을 무장해제시킨 뒤, 곧장 일본 헌병대로 달려가 이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최봉설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사살되거나 붙잡혔고, 15만원 중 13만원은 다시 일제가 가져갔습니다. 


엄인섭은 노덕술과 함께 영화 <암살>의 캐릭터인 염석진(이정재 역)의 모티브로 유명해졌다


이 사건으로 당시 간도 일대는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무작위로 붙잡아 심문했고, 여러 독립군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합니다. 붙잡힌 엄인섭, 윤준희, 한상호는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된 후 사형에 처해집니다. 엄인섭은 27세, 윤준희는 30세, 한상호는 23세의 나이였습니다.


말년의 최봉설. 철혈광복단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최봉설은 만주 일대를 전전하다 러시아의 강제 이주 정책에 휩쓸려 중앙아시아로 쫓겨났으며, 1973년 생을 마감했다


철혈광복단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최봉설은 '적기단'을 결성해 만주 일대에서 홍범도 장군 등과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러시아의 강제 이주 정책에 휩쓸려 중앙아시아로 쫓겨났으며, 1973년 생을 마감했습니다. 엄인섭 이후 행적은 원산의 한 술집에서 자신을 친일파라고 생각한 손 모 씨와 싸우다 병이 들어 죽었다는 말도 있고, 밀정에서 해직된 후 훈춘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아무 것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15만원 탈취사건 기념비가 있는 용정시 인근 동량어구


15만원 탈취사건은 우리나라에서는 교육과정에 비중있게 실리지 않았고, 많이 알려지지도 않은 사건입니다. 그러나 연변의 조선족들에게는 크게 각인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에겐 낯선 15만원 탈취사건의 이야기들을 알아감으로써 조선족을 이해할 수 있듯,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혹은 숨겨져 있는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남북이 함께할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추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