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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잔존해 있는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 문제

 

<마침내 해결된 위안부 문제, 하지만 북한은?>

 요즈음 뉴스를 보면 한일 간의 위안부 문제로 시끌시끌한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길고 긴 논의가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죠. 특히 이번 협상에서는 일본에서 주장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더 이상 바꿀 수 없다는 뜻)'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는 양측 모두 위안부 문제에 대해 결론지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우여곡절 끝에 남한의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 것이죠. 하지만 '한반도'의 위안부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여러분은 알고 계신가요? 맞습니다. 북한에도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지금부터 북한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아베총리(좌)와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우)>

 그렇다면 과연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분들에 대한 북한 정부의 입장과 현황은 어떻게 될까요? 북한이 처음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92년 '종군 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입니다. 이 전까지 대내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환기하는데 그치고, 대외에 알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992년 5월 3일, 처음으로 북한 내에서 종군 위안부가 공식 제기되는데요, 이에 대한 계기가 되는 것이 평안남도에 거주 중이던 리경생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이 할머니는 1929년부터 약 5년 간 일본군의 감시 하에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 3살 때 부모를 여의고 군수공장에 끌려간 것은 남의 집 '아이보개(지금의 보모)를 하던 12세 때이다. 그러나 나와 함께 끌려온 비슷한 또래의 처녀아이 20명은 일본군 장교의 시중을 드는 일부터 시작하다가 몇 달 안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하루에 평균 20명을 '상대'했다. 그러다 16세 때 임신을 하자, 일본군은 나의 배를 째고는 태아를 꺼내 강물에 던지고 다시는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한다며 칼로 자궁을 들어내 버렸다. 나는 1933년 9월 철조망 밑을 파고 생지옥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조선중앙텔레비젼으로 실시간으로 방영된 이 공개증언은 자신의 끔찍한 과거를 숨기고 살아온 수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용기를 북돋워주었고, 많은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증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1992년 8월 4일 북한 로동신문에서는 위안부로 끌려갔던 자강도에 거주하는 정문복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일제가 저지른 극악한 인권유린행위>라는 글을 작성하여 본격적으로 일본의 만행을 비난하였습니다. 위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많은 조선녀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성노예로 삼고 심지어 학살만행까지 감행한 이 책임을 외면하여 온 일본 정부의 행위는 얼마나 철면피한 행동인가. 일본 정부는 지난 태평양 전쟁시기 구 일본정부와 일본 군대가 저지른 가장 악독하고 잔악한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하여 솔직하게 사죄하고 응당한 보상을 하여야 한다"


  이 글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정문복 할머니는 일본 정부에 대해 강력히 비난하면서 이 문제가 일본 국가 차원에서 저지른 중대한 범죄인만큼 이에 합당한 국가 차원의 보상과 책임자들에게 응당 받아야 하는 처벌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북한은 비록 주로 대내적인 차원에 국한되긴 했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환기시킴으로써, 인민들에게 위안부의 존재성을 계속해서 피력해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분명한 한계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당시 피해자들의 정확한 실태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고 주로 일본에 대한 비난으로 일관된 것이기 때문이죠. 

 또한 북한은 일본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째는, 북한이 아직 일본과 수교를 맺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에게 직접적인 대응은 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간접적인 대응만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1970~80년 대 자행되었던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입니다. 1977년~83년 까지 일본에서 11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일본은 이 11명 모두 북한과 연루되어있다는 심증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정확한 물증이 없던 찰나,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의 범인인 김현희가 '이은혜'라는 일본인 여자 선생이 있었다고 증언한 것을 계기로 일본은 이 '이은혜'라는 인물이 행방불명 된 11명 중 한명이라는 증거를 포착하게 됩니다. 결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일본에서 납치한 피해자가 총 15명이라고 공식 인정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은 북한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라는 압박에 정당한 대응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일본에 직접적인 문제 해결을 얻지 못하는 북한은 차선책으로 대내적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본격적으로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북한은 위안부 피해자가 총 20~30만에 달한다는 추정치를 내놓는 한편, 당시 조선 총독부 경무부장의 위안부에 대한 자료인 '도항정형보고자료'를 근거로 위안부 가운데 93%에 달하는 수치가 모두 조선인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또한 조사 당시 생존해 있던 38명의 위안부 피해자들 중 36명은 국제법상 매춘 금지 연령대인 21살 미만이었고, 그 가운데 13명은 16세 미만의 어린 소녀들이었다고 합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포스터>

 이처럼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 분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 총 수가 20~30만에 달한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피해자분들 중 겨우 38명만이 생존해 있으며, 이 분들 또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죠. 과연 이분들은 언제쯤 일본의 진정어린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요? 이 분들의 시간은 점차 줄어들어 가지만, 북한 정부의 현재 행보는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가 없어 보이니 매우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와 더불어, 한일 간의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한반도의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은 민족임에도, 남에서는 사과와 보상을 받았지만 북에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으며 국가적인 보상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북한의 위안부 할머니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이분 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하루 빨리 남과 북 모두 힘을 합쳐 일본으로부터 진심이 담긴 사과와 응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사를 쓰면서 한 문구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바로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입니다. 우리 모두 한민족이 겪었던 지난 시기의 아픔과 고난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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