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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통일로 가는 길

추억으로 한 마디, 눈물로 또 한 마디 ─ 이산가족 영상편지 제작 현장 동행 취재

  기사 2부의 김가현 기자와 이소영 기자가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에서 주관하는 이산가족 영상편지 촬영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촬영 장소는 평범한 가정집이었는데요. 촬영기사님과 만나 촬영장소에 도착했을 때엔 큰 아들과 세 딸, 그리고 막내사위까지 온 가족이 모여 영상편지 촬영 준비에 한창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영상편지 제작 현장에 동행한 이야기와 영상편지 전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촬영을 준비하는 가족들(사진=이소영)

 

 몇 가지 기본적 인적 사항을 확인한 후, 촬영에 나선 이지훈 기사님은 촬영에 앞서 가족들에게 찾는 분에 대한 질문을 건넸습니다. 이번 가족의 사연은 조금 특별한데요. 청량리 홍릉동에 살았던 85세의 김옥연 할머니께서는 50년 전에 베트남(당시 월남)에서 실종된 남편을 찾고 있었습니다. 당시 월남에 주재한 무역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남편 분께서는 1968년 1월 31일 '구정 대공세' 당시 출근 도중에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실종된 후, 친구 분께서 우연히 들은 라디오방송에서 '그 때 실종된 사람들은 북으로 갔다'고 하여 북한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습니다. 50년 전에 헤어진 남편, 그리고 아버지. 어디에서 어떻게 계실지도 모르지만 살아계실 거라는 희망 하나만으로 버텨온 가족의 삶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를 들은 후, 할머니께서는 언론과 각종 매체에 영상자료를 제공할 것에 동의한다는 서류에 수결을 하셨습니다. 동의서에는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 제공, 교육역사자료제공, 남북이산가족행사시 상영, 텔레비전이나 남북관계 프로그램 방영, 국내외 언론매체 제공, 촬영한 내용을 콘텐츠에 이용한다는 사항이 기입되어 있었는데요. 동의를 하지 않으셔도 남편 분을 찾는 것이나 영상 제작과는 관련 없지만, 할머니께서는 시원하게 “다 오케이!”를 외치셨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 절차를 거친 후,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섯 가족은 자리를 잡고 앉아서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습니다. 영상 촬영은 기사님이 건네는 질문을 토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가족소개, 고향소개, 함께 했던 추억,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가족들은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긴장도 잠시, 촬영기사님이 공감어린 말투와 재치어린 농담을 건네자 가족분들도 웃음을 지으시며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이 이어졌습니다.

 가족원이 각자 소개를 마치고, 찾는 분에 대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남편 분을 “성격이 몹시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사람입니다. 월남에 있을 때 전화를 자주 하고 편지도 자주 했습니다. 편지에는 항상 마이 달링 누구누구라고 쓰고, 애처가였어요. 외국에 있어도 기념일만 되면 선물을 항상 부쳐주기도 하는 가정적인 남자였어요.”라고 소개하며 추억에 잠긴 듯 눈을 빛내셨습니다.

 이어 가족분들이 더하는 찾는 분과의 추억 이야기 속에서 두 기자는 다정하고 가슴 푸근한 남편, 아버지와 헤어지게 된 가족들의 절절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실제 할머니는 남편분의 실종 이후 5년간 병원에서 불면증 치료도 받았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자녀들을 키워 지금은 다 장성해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꿋꿋이 견딘 세월만큼의 강함이 녹아있었습니다.

질문에 대답하는 순서가 끝나고 드디어 영상편지를 읽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영상편지의 내용입니다.


영상편지 촬영 중(사진=이소영)

 "여보, 50년 만에 불러봅니다. 1966년 12월에 김포공항에서 헤어졌을 때는 35, 37세의 꽃다운 젊은 나이였는데 지금은 85, 87세의 황혼의 여정을 걷고 있네요. 몸은 건강한지 몹시 궁금합니다.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남자형제분들은 다 무고하시며 두 시누이들은 돌아가셨어요. 우리 자식들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 결혼식, 칠순 잔치 때 나의 옆에 당신 자리가 비어있어서 몹시 섭섭했습니다. 이 땅 위에 살아있다면 하루 속히 소식 전해주세요. 가족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보고 싶어요. 일반 주택에서 38년간 살다가 아파트로 2015년 2월에 이사했습니다. 빨리 집으로 오세요."
 "보고 싶은 아버지께. 어린 시절 홍릉에서 살 때 여섯시만 되면 퇴근버스에서 내리시는 아버지를 마중 나갔던 일, 저녁을 먹고 아버지 손잡고 산으로 산책 갔던 일, 제가 혓바늘이 서서 아팠을 때, 홍릉 갈비 집에서 불고기 먹었던 일, 창경원에서 같이 선글라스 끼고 그네 타던 일. 그때 찍었던 사진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항상 아버지가 생각나고 보고 싶습니다."
 "아빠 둘째딸이에요. 아빠랑 함께 한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아빠와의 추억이 별로 기억나지가 않아요. 제가 기억나는 것은 가족사진 찍으러 간 것과, 아빠가 월남에서 오신다고 공항에 마중 갔었는데, 비행기가 연착돼서 저희들 먼저 집에 와서 자다가 깨보니까 주무시고 계셨어요. 색색이 예쁜 젤리와 빨간색 포장지에 쌓인 계피 껌을 사오셨어요. 또 월남에서 텔레비전과 녹음기, 카메라를 보내주신 것 생각나고 아빠와의 마지막은 공항에 배웅 나갔던 것이 벌써 50년이 흘렀네요. 아빠 보고 싶어요. 제가 7살 때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 행방불명되셨다고 큰고모와 고모부가 신문을 들고 오셔서 소식을 전하셨던 게 기억나요. 시간이 흐른 후 아빠의 옷가지가 든 트렁크만 집에 왔을 때도 아빠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실 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살아계신다면 87살 쯤 되셨겠네요. 보고 싶어요."


영상 편집 때 쓰일 사진을 한 장, 한 장 신중히 고르는 가족들(사진=이소영)

 그간의 촬영 이야기와 경험담을 더 듣고 싶었던 기자단은 촬영 후 돌아가는 길에 이지훈 기사님과 따로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Q. 영상편지를 그간 여러 번 촬영하셨을 텐데, 하실 때 마다 특별히 느끼시는 점이 있으신가요?
A. 슬플 때가 많죠. 마음 아프고. 근데 그걸 제가 어떻게 직접 해결해줄 힘은 없으니까……. 영상을 잘 만드는 게 저에게 가장 큰 숙제인 거 같아요.


Q. 사연을 담으면서 가장 가슴 아프셨던 때가 언제인가요?
A.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신 한 할아버지 사연입니다. 7살짜리 딸이 같이 가자는 거 떼어 놓고 오셨다는데,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는 95세이신데 아직도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신대요. 잘 살아있을까 싶어서. 영상 찍고 나서는 고향에 갔다 온 거 같다고 무척 고맙다고 하셨어요. 아파트에 혼자 사시는 독거노인인데, 베란다 밖에까지 나와서 손 흔들어주실 때가 제일 마음이 아팠어요. 

Q. 이번에 촬영한 분들이 독특한 사례인 거 같은데요.
A. 네, 맞아요. 보통은 한국 전쟁 때 많이들 헤어지셨더라고요. 특히 1·4후퇴 때 헤어진 가족들이 많아요. 그 때 실제로 일주일만 있다가 다시 올 거라고 하고는 평생을 헤어지신 분들이 많죠. 사연들을 들어보면 다 절절해요.

Q. 촬영할 때 가족분들이 이야기를 잘 털어놓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도하시는 모습이 돋보였어요.
A. 그게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많이 들어주고, 같이 공감해주면서 희망을 만들어드리는 거요. 그렇게 하면 좋은 영상이 나오죠. 

Q. 촬영일정은 언제까지 잡혀있나요?
A. 아마 10월 정도면 지방까지 다 끝날 거 같습니다. 올해 만 명 정도 촬영을 해야 하는데, 지금 2500명 정도 촬영이 완료된 상태예요.

 기사님과 인터뷰까지 마치고 나니 이 땅의 분단으로 흘려야 했던 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기자단은 자연스레 다가오는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영상편지 전달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다가오는 스무 번째 이산가족 상봉

지난 7일,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사진=연합뉴스)

 지난 8월 25일. 대한민국을 일촉즉발의 위기로, 전 세계의 염려를 한반도로 향하게 했던 남북대립이 극적으로 해소되었습니다. 나흘간 이어진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양측은 6개 조항에 합의했는데요. 그중 가장 큰 기대를 잡아끈 것은 “남과 북은 올해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고, 앞으로 계속 하기로 하였으며, 이를 위한 적십자실무접촉을 9월초에 가지기로 하였다.”는 부분입니다. 상봉을 위한 규모, 일정, 장소 등의 조정을 위해 9월 7일부터 판문점에서 남북 적십자 실무접촉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7일간 금강산에서, 100쌍의 가족이 65년 세월 그리워만했던 얼굴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9일에는 132대1의 경쟁률을 뚫고 500명의 1차 상봉 후보자 추첨 결과가 발표되어 많은 이산가족의 희비가 교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500명이라는 수도 실제 상봉이 가능한 인원의 5배수로, 상봉 후보자들의 연령과 직계 가족 여부를 따져 250명의 생사확인 의뢰 대상자가 재차 선정되고,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100명에 불과합니다.

2007년 제16차 이산가족 상봉 2회차 만남에서. 남쪽의 아버지와 북쪽의 딸. (사진=파이낸셜 뉴스)

 2000년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성사된 첫 이산가족 상봉 이래로 지금까지 총 19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상봉으로 가족을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남북 합해서 4,000여명에 불과합니다. 그마저도 상봉 자체가 정례화 되어 있지 않아 언제 있을지 모르는 상봉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산가족 1세대의 시간은 충분하지 않은데요. 분단 이후 70년의 세월이 흘러 이산가족 등록자의 연령대가 상당히 높아진 것입니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는 이런 상황을 감안해 2005년부터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편지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올해 이뤄지는 촬영은 6번째입니다.

 

◆ 이 마음, 멀리 멀리 날아 북쪽에 닿았으면 : 영상편지 제작 그리고 전달

(사진=경기 적십자)

 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많은 이산가족들이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고자, 더 늦어지기 전에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을 전하고자 영상편지 제작을 신청하고 있습니다. 작년까지 카메라에 담긴 절절한 목소리는 총 8,000여 편(2005년에 4,000편, 2008년에 20편, 2012년에 821편, 2013년에 2,007편, 2014년에 1,202편). 올해에는 10,000편 가량의 영상편지가 제작될 예정으로, 제작에 필요한 비용 20억 1천여만 원은 남북협력기금으로 조달되었습니다.

 하지만 편지가 쌓여가는 만큼 현실에서는 무거운 마음도 커져가고 있습니다. 영상편지가 언제 전달될지 알 수 없는, ‘부치지 못 할 편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일부 이산가족들은 언제 전해질지도 모를 영상편지를 촬영하는 것이 희망고문 같다며 촬영을 거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2008년 영상편지 교환이 이루어진 당시 뉴스 보도화면.(MBC뉴스)2008년 영상편지 교환이 이루어진 당시 뉴스 보도화면.(MBC뉴스)

 그러나 전달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2006월 4월 제18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영상편지 데모 테이프를 전달하며 영상편지 교환사업을 제안한 것을 계기로 이산가족 영상편지 교환 사업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7년 4월,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당해 추석을 계기로 영상편지를 교환할 것에 합의했으나, 장비 지원을 비롯한 기술적인 문제로 이행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영상편지 교환 사업을 다시 추진할 것에 합의하면서 영상편지 교환 사업 추진은 물살을 타게 되고, 마침내 2008년 2월 5일, 판문점에서 「남북이산가족 영상편지 교환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고, 2008년에 제작된 20편의 영상편지가 시범적으로 교환되었습니다. 합의서에 따르면 당초 남북은 시범적으로 20편의 영상편지를 교환한 후, 분기마다 이미 상봉을 한 대상자 중에서 각각 30가족씩 영상편지를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합의사항은 지켜지지 못했고, 2008년 2월 이후로 현재까지 전달된 영상편지는 전무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바스러져 내리는 기억들만이 비디오에 쓸쓸히 담겨있을 뿐입니다.


 대한적십자사는 북측 가족들의 신원이 확인되는 대로 편지를 전달하도록 하고, 생전에 전달되지 못해도 사후에라도 전달한다는 방침입니다. 하지만 편지를 수신할 혹은 교환할 상대인 북한의 협조 없이는 전달이 힘든 상황입니다.

 2015년 4월 기준으로 등록된 이산가족은 총 129.682명. 그중에서 생존자는 66.873명으로, 등록자의 절반을 간신히 넘기는 비율입니다. 분단 이후 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산가족 1세대들의 연령은 높아져 많은 분들이 해마다 세상을 달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남북 양측 간 주기적인 상호 생사확인사업과 제작된 영상편지 전달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행사 정례화까지. 모두 서로가 상대방에게 신뢰를 보이고, 적극적으로 임한다면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같은 하늘을 이고도 만나지 못하는 얼굴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이산가족들에게 좋은 소식이 간절한 때입니다.

참고자료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 https://reunion.unikorea.go.kr/
남북의 창. “애타는 이산가족들 ‘이제는 만나야 한다.” 2015년 9월 5일 방영분.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142342&ref=A
통일부. 자료마당>남북관계 주요일지. http://www.unikorea.go.kr/
정책브리핑. “남북이산가족 ‘영상편지’로 만난다.” http://www.korea.kr/main.do. 2008년 2월 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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