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7기 통일부 대학생기자단 임혜민입니다. 포츠담회담이 개최되었던 체칠리엔호프궁 탐방기에 이어 오늘은 베를린 장벽 기념공원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베를린 장벽이 서 있던 곳은 지금은 푸른 잔디가 깔린 공원이자 커다란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베를린 장벽 기념공원은 겉보기에는 여느 공원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저는 KB 락스타 챌린지 7기 대원들과 함께 현지인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옛 베를린 장벽이 있었던 그곳을 한 발 한 발 거닐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니 잠시 전에는 철조 기둥과 평범한 잔디밭으로만 보였던 공원의 조형물과 전경이 새로이 다가왔습니다. 곳곳에 숨어있던 아픈 과거의 사연들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독일이 분단되었을 때 그곳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시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베를린 장벽 기념공원
▲ 옛 베를린 지도를 보여주는 가이드 모습
▲ 옛 베를린 장벽을 보여주는 가이드 모습
베를린은 내륙이지만 마치 섬처럼 주변 지역들과 떨어져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베를린 장벽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서베를린은 서독에 속했지만 이를 둘러싼 다른 지역은 동독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동독 주민들이 서독 지역으로 왕래할 수 없도록 베를린 장벽을 쌓은 것입니다.
8월 13일은 장벽이 시작된 날로서 마침 견학 날이 그 다음날인 8월 14일이라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저는 락스타 챌린지 대원으로서 독일 이곳저곳을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지만, 한 때 이곳 또한 고립되어 통행할 수 없는 지역이 있었다는 사실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3단계에 걸쳐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우선 1단계로서 철조망을 이용하여 시민의 접근을 차단하고 차도를 걷어냈습니다. 인근에는 지하철역이 있었지만 입구 하나는 서독 쪽, 하나는 동독 족이었으므로 정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찰이 경비를 서서 이를 통제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음 단계로는 벽돌을 쌓고 가림막을 설치해서 서독 시민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볼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 마지막 3단계로서 완전한 장벽을 설치하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가 겹겹이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장벽을 넘더라도 쉽사리 서독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 북한주민들이 북한을 떠나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은 다음에도 공안을 피해 거처를 찾고, 제3국이나 한국에 오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는데 베를린에 서 있었던 여러 개의 장벽 또한 당시에 탈출을 막는 장애물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동독 주민들은 정치, 결사, 종교, 사상의 자유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이들의 발자국을 보기 위해 장벽 사이사이에 모래사장을 깔고 가로등을 세웠고, 군인들에게는 월담자를 자유로이 사격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이 때 250m마다 하나씩 감시 초소를 세웠다고 합니다. 한때 생명이라는 당연한 인권조차 위협받았던 곳이 지금은 시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휴식공간이 된 모습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비록 제가 밟고 있는 푸른 잔디는 베를린 장벽 기념공원이었지만, 언젠가는 남북한의 경계 또한 그렇게 변화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관이자 시민들이 쉬어가는 공원으로 거듭나다.
▲ 베를린 장벽에서 희생된 이들
▲ 추모 화환 앞의 시민들
공원을 걷다 보니 추모공간에 흰 장미가 놓여 있었습니다. 마침 견학 날이 베를린 장벽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흰 장미가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갓난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사망한 130명의 희생자였는데, 그 중 장벽을 넘으려 했던 이들은 100명이었다고 합니다.
가이드와 함께 사진 속 얼굴들을 보면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Ida Siekmann이라는 젊은 여성은 베를린 장벽 바로 옆이었던 자신의 집을 통해서 동독에서 탈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서 짐 가방을 던지고 뛰어내리다 그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그렇게 사망하고 만 것이지요.
어떤 젊은 부부는 아기와 함께 트럭 상자 속에 숨어서 동독을 탈출하려 했습니다. 탈출 도중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고, 부부는 발각될 것이 두려워서 아이의 입을 막았습니다. 그 아이가 감기에 걸려 코가 막혀있었던 것을 미처 모른 채 말입니다. 그 아이는 그렇게 질식사하고 말았고, 지금은 추모공간의 사진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한국인 통역자의 목이 멨고, 저 또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락스타 챌린지 7기이기도 하지만 제7기 통일부 대학생기자이기도 한 저는 이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북한이탈주민을 떠올렸습니다. 평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 그들을 잊고 살게 되지만, 여전히 그들의 희생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 기념공원 추모공간에 있는 사람들처럼 사선을 넘다가 실패하여 한국에 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기도 합니다.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이런 비극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분단의 현실을 반드시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옛 베를린 장벽 터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쉼터가 되었다.
▲ 옛 베를린 장벽 터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쉼터가 되었다.
이외에도 베를린 장벽이 지나는 자리, 즉 동독과 서독 사이에 건설되어 있던 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지금은 기도실이 마련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옆에 놓여있는 십자가와 종의 잔해를 지나며 지난 역사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베를린 장벽과 관련된 희생자를 기리며 매일 12시에서 12시 15분까지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베를린 장벽과 맞닿아 있던 집터를 볼 수도 있었는데, 그러한 공간 하나하나에도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결혼식을 치르고 돌아왔더니 집의 문이 막혀 있어서 부모와 만날 수 없던 커플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공원을 찾는 이들이 그 이야기를 알 수 있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베를린 장벽 기념공원 곳곳에 녹아 있는 사연을 들으며 위 사진과 같이 평화로운 휴식공간의 모습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한편으로는 독일의 가장 아픈 역사를 일상적인 공간 속에 녹여내어 시민들이 영원토록 잊지 않도록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자리에 서다.
▲ 근처 건물 또한 기념관 역할을 한다.
▲ 장벽 대신 철제 조형물이 서 있다.
베를린 장벽 기념공원에 대해 안내했던 독일인 가이드는 투어를 마치면서 몇몇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동독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 것이 아니며, 동독 주민의 지속적인 저항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쇠락 등 주변국의 상황도 독일 통일의 큰 변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베를린에 온 것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삼아 한국인으로서 통일 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통일을 위해서도 남북한 주민들의 통일 의지와 주변국과의 외교 등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거 동독과 서독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 터 위에 듬성듬성 철제 조형물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자유로이 오갈 수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장벽을 기억할 수 있는 그 자리에 서 보았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독일을 느끼면서 통일이라는 과제를 풀어가려는 현재와 미래의 한국을 생각하게 됩니다. 통일이 언제 올지, 어떻게 올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독일이 갑작스러운 통일을 감당해내며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한국 또한 통일 미래를 예상하고, 준비해야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미래를 생각하며 지금 이 순간도 준비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사실을 새겨봅니다. 다음 기사에서도 생생한 독일 소식을 들고 찾아오겠습니다. 이상 대학생 기자 임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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