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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미래 길잡이/현장과 사람

남한청년과 탈북청년이 함께한 토크콘서트, <응답하라 1995>의 현장 속으로

 

반갑습니다!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8기 김명종, 정유진 기자입니다. 저희의 공동 기사는 이번으로 두 번째인데요.

지난 정부 청사 최초 방문기는 재밌게 읽으셨나요? 이번 기사는 통일 토크 콘서트와 관련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지난 6월 3일, 서대문구에 위치한 이화여대 학관에서는 조금 특별한 토크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바로 남북 대학생 연합 캠페인 동아리 L4에서 주최한 7번째 토크 콘서트인 <응답하라 1995> (부제: 북한 고난의 행군, 그리고 남한의 IMF)입니다.

이번 토크콘서트에서는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나신 김 혁씨가 북한의 대표 초대 손님으로 오셨습니다. 김 혁씨는 탈북 수기 <소년, 자유를 훔치다>의 저자 로서 애니메이션 <퍼플맨 (A purple man,2010)>의 실제 주인공 입니다.

 한편, 남한의 대표 초대 손님으로는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나신 이영환씨가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영환씨는 前 대통령직속 미래 기획 위원회 전문관이었고 현재는 전환기정의워킹그룹의 대표로 있습니다. 하지만 토크콘서트 당일 이영환씨으 개인적인 사정으로 김동근씨가 대신 참석해주셨습니다. 김동근씨는 서울 출생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계십니다.

 

△ 토크콘서트가 진행된 이화여자대학교 _ 이미지출처: 정유진 기자△ 토크콘서트가 진행된 이화여자대학교 _ 이미지출처: 정유진 기자


△왼쪽부터 사회자 박윤희 학생, 김혁, 김동근 _ 이미지출처: 정유진 기자△왼쪽부터 사회자 박윤희 학생, 김혁, 김동근 _ 이미지출처: 정유진 기자

 

1부는 김혁씨와 김동근씨가 각각 95년도의 북한과 남한의 전반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며 진행되었습니다먼저 94 7월 김일성 사망 당시 북한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김혁씨가 들려주었고 이어 김동근씨가 남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Q. 김일성 사망당시 남한 사회는 어떤 반응이었나요?

. 먼저,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구요또 다른 하나는  아 이제 통일이 되긴 하겠구나.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어요

저희 삼촌이 군인이셨는데한 달 동안 휴가가 다 미뤄지고전투 준비 태세에 들어가고 굉장히 상황이 긴박했던 걸로 알고 있구요.

또 사회적으로는 ‘이제 통일이 될 거 같다. 라는 희망이 있었죠. 그때가 아마 사재기의 시초였을거에요전쟁날까봐 라면 사들이고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Q.   남북한의 경제상황에 대해서 알아보려는데요김혁씨당시 북한의 경제상황은 어땠나요?

. 많은 사람들이 배급을 받고 그걸로 생활을 하다보니까노동에 대한 의욕이 줄어들고사회주의권이 붕괴가 되면서 그 동안 소련에게서 얻을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자원들이 줄어들고그러다보니 국가적으로 침체가 되었죠.

Q. 그렇다면 그 당시 외국에서의 식량원조는 없었나요?

. 김일성이 사망하고 94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가 있었죠그때 당시부터 미국이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줬어요.

95년도에 청진항으로 식량 배급이 들어오기 시작했구요청진항은 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구요

그때 이제 US라고 찍혀있는 쌀가마니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US라는 쌀 가마니가 있을까왜 거기서 식량이 나오는 걸까굉장히 술렁이기도 했었죠.

Q.: 95년 당시에 쌀 한 가마니는 얼마 정도 했나요?

. 그때 당시 쌀 1KG 25원 정도였어요명태 한마리에 13원 정도였으니까 명태 두 마리면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는북한의 당시 배급을 제외한 임금이 60-90원 정도 였으니까요.

. 그때 통계자료를 보면 쌀 1KG 2000원 정도 했었네요월급은,  평균적인 근로자 월급으로는 70-80만원 정도였어요.

 

△ 톡톡 토크콘서트 판넬 _ 이미지 출처 : 정유진 기자△ 톡톡 토크콘서트 판넬 _ 이미지 출처 : 정유진 기자

이후 김혁씨는 꽃제비로 생활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요.

꽃제비는 , , 굶을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듣고 있던 학생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꽃제비는 겨울에 얼어죽기 쉽고, 구걸하다 맞아죽기 쉬우며, 구걸에 성공하지 못하면 굶어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현재 북한에서 꽃제비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어림잡아 200만 명 정도이고, 인구의 10%를 차지한다니 북한의 경제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김동근씨가 이야기를 이어받아 95년도 당시의 남한의 경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Q. 90년대 경제위기의 아픔은 북한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죠. 남한도 90년대 말 IMF라는 국가적 경제위기가 있었는데요. 90년 중후반 출생한 저희에게는 IMF는 힘들었다는 것만 알지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남한의 IMF는 어떤 모습이었고어떤 변화를 낳았는지. 영환씨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南. 97년 말에 IMF 경제위기가 일어났었는데 다들 IMF는 많이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학술적인 얘기보다는 제가 겪었던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일단 기업에서 강하게 구조조정을 하니까 실업자들이 생겼잖아요. 제 친구 아버님께서 실직을 하시고, 그때 실직하신 분들이 사업을 많이 하셨어요. 치킨집 같은 것. 그런데 노하우가 없으니까 많은 분들이 극단적인 선택도 하셨어요.

저희 아버지께서도 자영업을 하시다가 잘 안되니까 저희 집도 상당히 어려웠었고 기업들도 부도가 날 정도로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었어요.

 전 국민적으로 채무를 갚자고 해서 금모으기 운동을 했었고 바로 그때 시작된 것이 '아나바다' 운동이에요. 전 개인적으로 중고등학생이었는데 90년대 말에 강남과 강북의 차이를 처음으로 느꼈어요.

 제가 본 기사 중에 유가상승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차를 끌고 다니지 않으니까 교통 체증이 완화되었는데 강남사람들이 그 상황을 보고 이대로 경제위기가 쭉 갔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기사가 있었어요. 그걸 보고 강남과 강북의 차이를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가 가장 사회양극화가 심했고, 중산층이 없어졌던 시기라고 생각해요.

 

Q. 현재 남한에서 북한 정치를 전공으로 배우고 계시는데, 북한 생활에서 들었던 남한의 모습과 실제 남한의 모습에서 괴리가 가장 큰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北. 북한에 있을 때는 정보가 굉장히 제한되어있어요.

예를 들어 서울역의 지하철 같은데 보면 노숙자들이 계시잖아요. 그건 분명히 있는 것이지만 북한에서는 그렇게 일부만을 찍고 크게 부풀립니다. '남한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지로 살아가고 있다.'이런 식으로요.

그리고 노동운동도 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시위들을 일부만 보도하여 남한 사회가 굉장히 혼란스럽다는 교육을 시켰어요.

그 외에 우리가 남한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어요. 제가 한국에 들어오고 가장 크게 느낀 것은 굉장히 자유로운 곳이다.

북한에서는 일어나고 나가서 일하고 퇴근하고 이러한 생활이 수레바퀴처럼 반복되었는데 남한에 와서 '아 여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정말 자유롭구나.' 라는 것을 느꼈어요그런 점이 제가 느낀 괴리 중에 가장 컸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탈북 전 꽃제비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혁씨 _ 이미지출처: 정유진 기자△탈북 전 꽃제비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혁씨 _ 이미지출처: 정유진 기자


Q. 90년대 당시 남한에서 북한 이탈 주민의 인식이나 북한에 대한 생각들이 어떠했는지 듣고 싶어요.

A. 80년대 생까지만 해도 북한 주민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나쁘지 않고요. 매체를 통해 비춰진 모습은 불쌍한 인식이 있었어요.

제가 2005년도 쯤에 금강산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제 키가 170 정도로 그리 크지 않은 키인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가장 큰 편이었어요.

남한 사람들이 오는 행사라서 건강한 편인 남자들을 배치했을 텐데도 저보다 머리 하나가 작을 정도로, 굉장히 왜소하다는 느낌은 있었어요.

저때만 해도 적대적인 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는데 제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70년대 생들은 어렸을 때부터 '북한은 악마다.'라는 이미지, '북한 사람 만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뭐가 베인다.'라는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해요.

 

Q. 첫 번째 질문과 반대되는 질문인데, 남한에서 현재 비춰지는 북한의 모습 중에 정치적이고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이야기가 아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 정확성이 있는지, 신빙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사실 다 있는 얘기예요. 북한 사람들이 성형 수술을 한다, 북한에 한류 열풍이 있다는 내용 모두 북한에 현재 있는 얘기입니다.

남한 한류 열풍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탈북자들입니다. 탈북자들을 통해 중국을 거쳐 북한에 퍼지는  것이구요.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것 중에 하나가 북한에 쌀 포대가 가게 되면 US라고 적힌 것은 빼고 쌀만 보내진다 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게 이제는 쌀 포대를 많이 찾아요. 대한민국 어디에서 생산된 쌀이고, 언제 생산된 것인지 적혀있는 포대를 선호하는 추세예요. 이런 빈 포대 하나가 옥수수 1KG의 값이에요.

이렇게 요즘 트렌드도 변화하고 있죠. 가장 큰 변화는 탈북자들의 유형 변화예요. 요즘은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심을 기본으로 탈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이는 북한에서 남한에 대한 정보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런거라고 짐작 수 있죠. 실제로 남한으로 들어오신 탈북자분들께서 북한에서 접한 남한의 드라마와 다른 남한의 모습에 실망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 2부 시작, 95년도의 북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혁씨 _ 이미지출처: 김명종 기자△ 2부 시작, 95년도의 북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혁씨 _ 이미지출처: 김명종 기자

Q. 아까 꽃제비와 관련된 얘기를 해주셨는데, 북한에 현재 꽃제비가 어느 정도 있는지 그리고 꽃제비들의 탈북이 궁금해요.

A. 꽃제비는 추정치가 아직까지는 불분명해요. 꽃제비들의 떠돌아다니는 특성상 집계가 힘들어요97년도에 국정원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약 20만 명에서 23만 명 정도로 추정해요.

그런데 제가 2010년도에 논문을 쓸 때 추정한 것은 약 223만 명 정도예요. 다시 말해서 200만 명 정도라는 것은 북한 인구의 약 10% 정도라는 거예요.

저는 '학교에 나온 학생들 중에서 시장에서 꽃제비 생활을 한 친구를 본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을 토대로 평균치를 내서 추정했어요. 그리고 한 마을을 30가구라고 가정했을 때 몇 가구, 몇 집이나 집이 비어져있느냐를 토대로 추정했어요.

그렇게 꽃제비들이 북한에서 떠돌기는 하지만, 외국으로 나오기가 힘들어요.

외국으로 나올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어요. 그냥 중국에서 구걸을 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실제로 제 친구들이 그러기도 했구요.  

 

Q. 시기와 장소를 막론하고 연애는 공통된 것이잖아요. 90년대 중후반, 남북의 연애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 사람들 마다 연애의 방식이 많이 다르죠. 저는 북한에 있을 때 주로 짝사랑을 많이 했어요.

또 직접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어요그래서 고백은 별로 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주로 사람들은 소개팅이나 선자리를 통해서 많이 만났어요. 사람들이 데이트를 하게 되면 바닷가에 놀러가서 남자들은 수영을 하고 조개를 주워다주고 여자들은 조개를 굽고, 조개껍데기로 목걸이를 만들고 놀고 그랬죠.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사랑이 주를 이뤘어요.

. 저도 김 혁씨와 사랑하는 방식이 비슷했어요. 주로 짝사랑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저는 그 대신에 남한에서 유행했던 드라마와 광고 같은 걸 얘기해드릴게요. 그때 당시에는 남한에서 <모래시계>라는 작품이 굉장히 히트쳤어요. 시청률이 거의 60~70%에 달했으니까요. 제가 생각했을 때 현재보다 TV광고의 영향이 훨씬 컸던 시기같아요. 94년에 SBS가 개국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죠.

. 북한에서는 반대로 TV보급이 적었어요. 아파트 한 세대에서도 TV를 가진 가구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때 당시 유행했던 것으로는 김정일의 국방색 잠바가 있어요. 이러한 스타일이 간부급들 사이에서 대히트를 쳤죠. 신발은 중국 신발이 대세였구요.

 

△ 북한 젊은이들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혁씨 _ 이미지 출처 : 김명종 기자△ 북한 젊은이들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혁씨 _ 이미지 출처 : 김명종 기자


 

△ 90년대 남한의 대중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동근씨 _ 이미지 출처 : 김명종 기자△ 90년대 남한의 대중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동근씨 _ 이미지 출처 : 김명종 기자

 

Q. 마지막으로 인생을 먼저 사신 선배로서 두 분께서 청춘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주세요.

. 청춘은 다 한때예요. 그래서 더 소중하죠. 저는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조언해주고 싶어요. 저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왔더니 어느 순간 이 자리에 와 있더라구요.

바로 그게 가장 바른 길이고 옳은 일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세요.

. 저는 오히려 이번 토크 콘서트를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배웠어요. 지금처럼 자신의 전공 분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살라고 말하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이번 토크 콘서트를 통해서 남북의 90년대 중후반 교육과 연애 등 다양한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교과서나 방송 매체에서만 접하던 90년대 중후반의 모습을, 그 시절을 중고등학생으로 보낸 분들의 이야기를 바로 접하면서 더욱 실감나고 생동감이 있었던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통일부 대학생 기자단 8기 김명종, 정유진 기자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탈북자 김 혁씨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 퍼플맨

 

남북대학생 연합 캠페인 동아리 L4는?

남북대학생 연합동아리 L4남북대학생 연합동아리 L4

이번 토크콘서트를 주최한 동아리 L4 '사랑으로 배우고, 배우기를 사랑하자' 라는 의미입니다.

서울권 소재 대학생들, 남북한 대학생들로 이루어진 연합동아리 입니다. 중국에서 떠도는 탈북자들을 대한민국으로 안전하게 모셔오는데 드는 구호금을 마련하기 위한 다양한 모금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기금은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을 통해서 중국에서 구호활동을 하는 활동가들에게 전달됩니다. 

남북 대학생 연합 캠페인 동아리 L4의 공식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l4campa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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