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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톡톡바가지

6·25 전쟁 그것이 알고싶다 2부 <6·25 참전용사>

625 참전용사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해보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안중근 의사가 남긴 말입니다. 지난 세월동안 우리나라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 큰 아픔들을 겪어 왔지만, 그 때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다하여 이 땅을 지킨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의 피와 땀으로 인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6.25전쟁 중에서도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용사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땅을 위해 싸우신 63개 지원국의 군인들과 우리나라의 군인들. 이들의 공로와 수고를 다시 한 번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을 가져봅니다.



  지난 기사에 이어 이번 기사에서는 이 용사들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꼭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을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생사의 갈림길 속에서 생명과 나라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용사들의 이야기. 그들의 마음이 전해지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지금부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국내 6·25 참전용사들

1 김풍익 소령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의 하루 뒤인 26일, 적의 전투력이 집중된 의정부 동북쪽 축석령에서 일반화기로 격파하지 못했던 북한군의 전차를 50미터 앞까지 유인하여 곡사포 직접조준사격으로 파괴하고 적 전차포에 의해 장렬히 산화하였다.


2 김홍일 장군  28일 새벽, 국군은 미아리 방어선이 돌파되자 북한군 전차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국군과 서울 시민을 한강 이남으로 철수 및 피난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한강교를 폭파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한강이남으로 분산되어 철수한 국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7월3일까지 적의 한강도하를 지연시켜 유엔군 참전에 필요한 천금같은 시간을 확보하였다. "앞으로 3일 동안 이 한강선을 지키느냐, 지키지 못하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가름된다. 죽을거면 당당하게 여기서 죽자." 한강방어선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에 대한 시흥지구 전투 사령관 김홍일 장군의 훈시였다.


3 맥아더 원수를 감동시킨 어느 병사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 중인 맥아더 원수가 물었다. "자네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것인가?" 병사가 대답했다. "군인은 오직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의 상관이 철수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이에 감동한 맥아더 원수는 미국 대통령에게 미 지상군 부대의 투입을 건의하여 승인을 얻어냈다.


4 심일 소위  제7연대 대전차포 소대장. 대전차포로 북한군 자주포가 파괴되지 않자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하여 화염병과 수류탄을 들고 육탄공격으로 자주포를 파괴하였다. 이를 목격한 장병들은 자주포를 파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5 백선엽 중장  제1 사단장으로서 적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고 있는 부대원들에게 훈시했다. "사단장이 직접 선두에 서서 나갈 터이니 나의 뒤를 따르라. 내가 선두에서 물러선다면 너희가 나를 쏴라." 이에 감동한 장병들은 곧바로 역습을 감행하여 자신들이 버리고 후퇴했던 고지를 30분 만에 탈환하였다.


6 학도의용군 1950년 6월 29일에 피난길에 올랐던 학생들이 수원에서 조직한 "비상학도대"를 시초로 하여 1953년 9월까지 전쟁 수행에 기여하였다. 이들은 교복을 입은 채 책 대신 총을 메고 전투에 뛰어 들어 많은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


7 소년병  특히 낙동강 전선에서는 14세에서 17세로 병역의무가 없는 나이어린 소년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애국충정으로 입대하여 연대 수색중대 및 특공대 요원으로 치열한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8 노무부대  6.25전쟁동안 수송, 보급, 잡역을 겸한 1인 3역을 담당했으며, 전선 전후방에서 국군뿐 아니라 미군에도 배속되어 수많은 탄약과 식량, 무기를 운반하고 부상자를 후송하였다. 특히 무더웠던 날씨에 치뤄졌던 낙동강전선의 산악고지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9 서울의 숭례문과 덕수궁을 지킨 사람들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서울 폭격 계획을 세우자, 당시 주일공사 김용주는 맥아더 원수를 찾아가 민족의 역사를 간직한 문화적 유산인 숭례문과 덕수궁의 온전한 보전을 약속받았다. 또한 미군, 포병장교 '제임스 헤밀턴 딜'은 9월 25일 덕수궁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부대가 덕수궁을 나올 때까지 폭격을 지연시켜 문화재를 보존했다.


10 연제근 이등중사  1950년 9월 16일 포항탈환을 위해 형산강 도하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 때, 수류탄을 몸에 매달고 수중돌진하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어깨가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끝까지 도하하여 3발의 수류탄을 투척하여 적의 기관총 진지를 완전히 파괴시켰다. 끝까지 싸운 후, 장렬히 산화하였다. 이로 인해 연대는 도하작전에 성공하여 포항을 탈환하고 반격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11 흥남철수작전의 여섯영웅들  장진호 전투 이후, 중공군의 공세에 국군과 유엔군은 해상을 통해 철수하게 된다. 이때,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드는데, 가용한 선박을 총동원해도 이들을 모두 태우기는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과 미군 10군단 사령관 알몬드 장군의 고문으로 있던 재미의학자 현봉학 박사는 피난민도 데려갈 것을 요청하였고, 다른 국군 지휘관도 피난민을 버리고 갈 바엔 국군이 걸어서 철수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강력히 피난민도 함께 철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미 해병인 포니 대령도 동참하여 상관인 알몬드 장군을 설득한다. 그 결과 10만 명의 피난민이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무사히 거제도에 도착하게 되고, 이 와중에 죽은 자는 한명도 없고 오히려 5명이 선상에서 탄생하게 된다. 이를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김백일 장군, 현봉학 박사, 박시창 대령, 알몬드 장군, 포니 준장 이들이 바로 흥남철수의 여섯 영웅이다.


   유엔의 6·25 참전용사들

1 맥아더 원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는 은퇴 시 맥아더 원수가 남긴 말이다. 그는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연합군과 국군을 지휘, 통솔했다. 그리고 워싱턴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주장하여 미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냈다. 그 결과 낙동강선에서의 정면공격을 통한 총반격에 비해 전투기간을 3분의 1로 단축하고 아군 약 14만 명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2 워커 중장  1950년 7월13일 미 제8군사령관으로 참전해서 낙동강 방어선에서 남한의 사수를 주장하며,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 장병들에게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 "Stand or die." 라고 명령하며 전의를 다졌다. 이러한 의지로 결국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보장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3 프랑스 육군 중령 몽크라르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며 중장에서 중령으로 자청하여 참여하였다. 그리고 2월 지평리전투에서 중공군을 막아 유엔군이 전세를 역전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 했다.


4 폴 프리먼 미국 육군 대령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폴 프리먼 대령. "한국은 지금까지 미군이 파견된 지역중 가장 험난한 곳이 될 것 같소. 나는 연대장으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프로다운 모습을 버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소."라는 편지를 아내에게 보내고 2월 지평리 전투를 치르던 중, 포탄으로 인해 부상을 당하여 후송 조치가 내려졌지만  “제가 우리 부대원들을 이곳으로 끌고 왔으니 마무리도 제 손으로 직접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후송을 거부했고 결국 전투에서 승리했다.


5 영국 육군 중령 칸  영국군 글로스터부대 대대장인 칸 중령은 중공군 제1차 공세 당시 적성 일대에서 임진강을 방어하던 중 중공군 2개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고립 된 상태에서도 철수 작전을 지휘하며 '우리가 알고있는 바로 그 행동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라는 대대의 신조아래 끝까지 임진강을 지켜내었다.


6 터키 중위 메르멧 고넨츠  1951년 4월 22일, 중공군이 최대 병력을 동원해 마지막 공세를 벌인 이 날, 중공군은 터키군이 배치된 경기도 연천군 대광리 인근 장승천 일대에 40분 동안 준비사격을 했고, 터키군 포병진지와 통신시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메르멧 고넨츠는 연대에 무전을 보내어 발포를 해야하는 좌표를 알려준다. 그 좌표는 바로 자신의 부대가 배치된 곳이었다. “적군은 우리 중대가 주둔하고 있던 언덕을 점령했다. 

많은 군인들이 교전 중에 사망하였고 우리 무전병 역시 사망하였다. 포병부대가 발포해야 하는 좌표를 주겠다.”  “그렇다. 우리는 적군의 포로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적의 손에 넘어가도록 하지 말라! 아군의 총에 죽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지막 유언이다. 정확한 좌표를 다시 주겠다. 모든 포병부대는 이곳에 발포해야 한다!” 결국, 모든 사단의 포병대대는 이곳에 발포하였고 그 후, 고넨츠 중위를 포함한 터키군은 장렬히 산화하였고 중공군의 남하도 멈추었다.

6.25전쟁 유엔군 참전규모

 이와 같은 정의와 생명을 향한 헌신과 희생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 당시 주어진 상황과 자신의 자리 가운데에서 최선을 다해 나라를 사랑하며 생명을 사랑했던 용사들. 그 때와 같이 지금도 현재의 상황을 잘 인지하고 바라보며, 내가 있는 곳에서 나의 소명을 다하는 용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분단된 이 조국을 회복하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 마음과 열정을 다할 용사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하는 소원을 품어 봅니다. 그리고 저부터 지혜롭게 이 걸음들을 준비해 나가길 원하고 또한 그렇게 노력하고자 합니다.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정말로 이 통일이 어서 오기를 꿈꾸며, 오늘도 통일을 향해 한걸음 함께 내딛어 봅시다.

 

 

 

[사진출처 : 1, 2]

참고자료 : 국가보훈처 선정, 이달의 전쟁영웅 참고, 육군군사연구소 발간 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