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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기자단/쫑알쫑알 수다방

간첩의 력사 (2) 심현섭의 아버지, 아웅산 폭탄테러의 희생자



무장간첩. 간첩이 무장한 순간 간첩은 더 이상 간첩이 아니라 테러리스트가 된다. 간첩과 테러리스트 차이가 무엇일까? 간첩이 상위 개념이고 테러리스트는 하위 개념인가? 반대로 테러리스트가 상위 개념이고 간첩은 하위 개념일까? 간첩과 테러리스트는 목적과 방법이 다르다는 점에서 상 하위 개념으로 볼 수 없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6.25 전쟁이 휴전된 지 10여 년 뒤 무장간첩은 극에 달했다. 19681 21일 청와대 기습사건, 같은 해 10 30일부터 11 1일까지 울진, 삼척지구 무장간첩, 83년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 사건, 85년 천사포 간첩 침투 사건, 87 11 29 KAL기 폭파 사건, 96 8월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그리고 3년 전 천안함 피격 사건까지 무장한간첩, 아니 북한의 테러 행위는 계속되어왔다. 이들 사건은 정보를 수집하는 간첩의 차원을 넘어 수 많은 사상자를 낸 테러 행위이다. 그리고 피해자 중에는 83년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 사건에는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 심상우 의원이 있었다.


뉴스채널 YTN에서 심현섭이 아버지 故 심상우 의원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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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전두환 정부는 서남아-대양주 6개국 공식순방에 나섰다. 그리고 이 공식순방의 첫 방문국은 미얀마였다. 당시 미얀마(당시에는 버마)는 네윈의 쿠데타로 군부권위주의와 버마식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었으며, ‘사회주의라는 공통분모로 북한의 영향력이 큰 나라였다. (당시 북한도 우리식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북한이 제3국 외교의 일환으로 미얀마에게 이념과 통치방법 등을 전수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전두환 대통령의 방문 이전, 경호팀은 촉각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D-31

당시 북한에서는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8군단 소속 강창수 부대에서 특공대 3명을 선발해 대통령 암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폭파담당, 통신담당 그리고 조장으로 이루어진 3명은 한 달 전부터 구체적인 테러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99일 실제 폭탄 테러가 있기 정확히 한 달 전 이들은 황해도 웅진항을 출항, 9 17일 오후 미얀마 양곤항에 도착했다. 미얀마에 도착한 이들은 북한 대사관 전창휘 참사관의 집에서 2주일 간 머물면서 세부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테러를 위해 선택한 방법은 아웅산 묘소에서 원격조종 폭약을 이용한 암살이었다. 아웅산 묘소는 미얀마 독립 영웅들을 모신 장소로 미얀마를 방문하는 외국 원수들은 반드시 그의 묘소를 참배하게 되어 있다. 북한의 금수산 기념궁전과 같은 곳이다.(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책 <피스메이커>에 따르면 과거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조율과정에서 북한은 김대중 대통령이 금수산 기념궁전을 꼭 참배했으면 좋겠다고 주장하여 우리 측과 갈등을 겪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D-2

3명으로 구성된 북한 특공대는 이른 새벽 아웅산 묘소에 침투하여 건물 천장에 폭탄 세 개를 설치한다. 설치된 폭탄은 크레모어 2개와 소이탄 1. 크레모어는 지금도 DMZ 철책선에도 설치되어있는 폭탄으로 화약이 폭발하면서 700여 개의 쇠구슬을 날려서 인명을 상상한다. 소이탄은 섭씨 4000도의 고열을 발생시켜 화재를 일으키는 폭약으로 현장의 증거를 없애는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이들은 이틀 전부터 이곳에서 노숙하며 운명의 그날을 준비하였다.


D-DAY

10 9일 현지시간 오전 10시 (한국시간 낮 12 30)

아웅산 묘소에는 한국 정부 인사들이 도열하고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은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아웅산 묘소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이는 대통령을 안내할 미얀마 외상 칫 라잉이 늦게 도착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미얀마 외상의 결례가 대통령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10 24분 태극기를 단 검은색 벤츠 한 대가 경호를 받으며 북한 공작원이 잠복하던 곳을 지나간다. 이 차가 지나가자 북한 특수 공작조는 대통령이 탄 차로 오해했다. 공작원이 이 차가 대통령 차라는 확신을 갖게 된 이유에는 미얀마 나팔수의 실수도 한 몫 했다. 대통령의 참석을 알리는 진혼 나팔이 나팔수에 오인으로 불리자 공작원들은 대통령이 묘소에 참석한 것으로 확신하게 된 것이다.


결국 미얀마 외상의 지각과 나팔수의 실수로 전두환 대통령이 테러를 피할 수 있었다


대통령을 환영하기 위해 불었던 나팔 소리는 폭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공작원이 크레모어 폭발 버튼을  아웅산 묘소 건물이 폭발하였다. 폭발과 함께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던 한국 정부 각료 17명과 미얀마 취재 기자 4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묘소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은 급보를 받고 즉시 차를 돌려 영빈관으로 돌아갔다.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당시 사진


D+1

한국 정부를 충격에 휩싸이게 만든 폭발 사건이 발생하자 전 대통령은 모든 순방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사건 발생 하루 만에 미얀마 주민의 신고로 파준다웅 샛강에서 헤엄쳐 가는 북한 공작원이 체포되고, 다음 날 나머지 테러범 두 명 중 한 명은 현장에서 사살되고 한 명은 체포된다.

체포된 이후 사건의 배후로 밝혀진 진모 소좌와 강민철은 모두 사형판결을 받았고 진모 소좌의 사형은 빠르게 집행되었다. 당시 수사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던 강민철은 사형이 보류되었다. 당시 국내 보도에서는 강민철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정부의 확인결과 공식적인 감형조치는 없었다고 한다.

강민철의 자백

이념이나 종교에 따라 범죄 행위를 하는 것을 확신범이라고 한다.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인줄 모르며, 오히려 역사에 의해 긍정적으로 평가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북한에서 철저하게 사상교육을 받았을 강민철은 어떻게 자백을 하게 되었을까?

강민철이 자백을 하게 된 배경에는 북한 당국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테러 이후 이들의 탈출을 위해 북한측은 양곤 강에 고속정을 배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이 양곤 강에 도착했을 때 고속정은 없었다. 강민철은 고속정이 없자 애초부터 탈출 계획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들을 적지에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2008. 5. 18.

강민철은 간암으로 미얀마 인세인 수용소에서 수감 생활 25년 만에 최장기 외국인 수감자로 숨을 거두었다.

국제법상 간첩의 사전적 의미는 교전당사자의 작전지대(作戰地帶) 내에서 상대방 교전자에게 통보할 의사를 지니고 은밀(隱密) 또는 허위(虛僞)의 구실로써 행동하며 정보(情報)를 수집하고 또는 수집하려고 하는 자를 말한다(헤이그 육전법규 제29)고 한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무장간첩의 행위는 사전적 의미의 간첩의 범위를 넘었다. 이들을 간첩이라 부르지 않고 테러리스트로 불러야 마땅한 이유이다. 하지만 김신조도 그렇고 강민철도 그렇듯 이들은 체포된 이후 자백 과정에서 테러리스트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념과 종교에 심취하여 범죄행위를 저지르는확신범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쉽게 잘못을 인정했고 자백했다.

 

전쟁이 장기화 될수록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은 새삼스레 자신이 왜 싸워야 하는지 그 이유가 희미해진다고 한다. 영화 <고지전>, <태극기 휘날리면서>, <웰컴 투 동막골> 등 6.25 전쟁을 다룬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분단이 장기화되면서 점점 희미 해져가는 반공사상과 안보불감증에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한 사상교육을 받고 자란 북한이 길러낸 테러리스트 즉 ‘확신범조차 자신의 행위에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새삼스레 우리가 왜 분단되어있는지 물어야 할 때가 아닌지 생각해보며 '간첩의 력사' 두 번째 기사를 마친다.


사진 참고

YTN 화면 캡쳐

중앙포토